파리 전시 : 2025 아트바젤 파리 리뷰
2025년, 파리의 현대미술을 가장 뜨겁게 만든 곳, 바로 아트바젤 파리에 다녀왔다.
세계 3대 아트페어 중 하나로, 150여 개 갤러리가 참여하고 거래 규모만 해도 수천억 원!
그런데 이처럼 거대한 전시 앞에 서면 막상 “어떻게 봐야 하지?”라는 물음표가 먼저 떠오르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난해하다
... 나도 매우 공감하는 바이다.
그런데 우리가 책을 읽을 때 흐름과 문맥을 따라가듯, 미술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고전미술 = 소설
현대미술 = 시
이해방식과 난이도의 관점에서, 이런 수식을 세워 본다. 고전미술이 뚜렷한 서사를 가진 소설과 닮아 있다면, 현대미술은 시에 가깝다. 행간에 숨어 있는 맥락을 읽어야 비로소 의미가 열린다.
하지만 여전히 ‘현대미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위압감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한 걸음 물러서게 되는 경우도 많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세는 '동심으로 돌아가는 자세'이다. 사실 현대미술, 파헤치고 나면 뭐 별거 없다 (위험 발언..?! 뭐 쨌든...) 그만큼 나는 작품을 가능한 한 단순하게 접근한다는 뜻이다.
내가 작품 앞에서 자주 사용하는 현대미술을 가장 쉽게 읽는 세 가지 방법과 함께 올해 아트바젤 파리에서 만난 장면들을 나눠보고자 한다.
‘크다. 웅장하다. 움직인다’ 이렇게 크기, 실루엣, 움직임처럼 첫눈에 들어오는 요소부터 찬찬히 관찰한다.
'빨갛다. 알록달록하다. 매끈매끈하다 평평하다 울퉁불퉁하다...'
색뿐 아니라 재료, 질감, 표면까지 살핀다. 우리는 이미 무의식적으로 이런 정보들을 통해 대상에 대한 인상을 느낀다. 그 감각을 조금만 날카롭게 캐치해도 많은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제목에는 작가의 의도가 가장 압축적으로 담겨 있다. 그 순간부터 우리는 작가의 세계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게 된다.
물론 가끔은 <무제>라던가, 해석할 수 없는 외계어 같은 제목도 있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전시장 한가운데에 거대한 문어가 자리 잡고 있다. 크기만 보면 압도적이지만, 둥근 눈과 어딘가 귀여운 표정 때문에 가까이 다가가 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장난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다리를 보고 있자면 전시장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기세도 느껴진다. 강렬한 색채는 공간에 열기를 불어넣고 있다.
이들의 콜라보는 가방 디자인에서 시작되었지만, 이제는 하나의 세계관이 되었다.
무라카미는 <자기 다리를 먹는 문어>라는 작품을 선보여 왔다. 스스로를 삼키면서 살아가는 존재의 모순을 담은 작품이다. 이번 문어 역시 그 세계를 품고 있다. 겉으론 귀엽고 화려하지만, 그 안에는 ‘스스로 순환하며 소모되는 세계’라는 주제가 숨어 있다.
그리고 그의 시그니처 작품인 <웃는 꽃>. 멀리서 보면 그저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이다. 하지만 이 해맑은 얼굴이 실제로 눈앞에 수백 개가 앞에 줄지어 있다면 섬뜩함과 위화감이 느껴질 것이다. 밝음과 불안이 동시에 피어나는 기묘한 순간이다. 무라카미는 이 꽃을 전쟁 이후 일본 사회가 만들어낸 ‘행복의 얼굴’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쟁의 트라우마, 빠른 경제 성장, 소비문화가 뒤섞이던 시대에 만들어진 인공적 밝음, 그 속에 눌린 불안이 스며 있다.
그는 이 웃는 꽃을 예술, 패션, 굿즈 등 모든 영역으로 확장해 왔다. 예술의 ‘순수성’보다 예술의 유통과 소비 자체를 예술 행위로 본다는 선언이다. 무라카미의 예술은 의미를 알기 전엔 눈이 즐겁고, 알고 나면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이번에도 그 매력을 다시 확인했다.
� Murakami Takashi X Louis Vuitton, 2025
거대한 돌탑이 서 있다. 높이가 약 3미터쯤 되어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고개를 들어 올려다봐야 한다. 자연의 돌에 비비드한 색이 입혀져 있으니 장엄하기보다는 오히려 유쾌한 기운이 더 강하게 다가온다. 표면을 보면 울퉁불퉁한 돌의 질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위적인 색들이 시공간을 비현실적으로 만들어주는 듯하다.
‘산’이라는 것은 인간이 넘볼 수 없는 대자연의 상징인데, 그가 돌을 하나씩 쌓아 만든 이 인공의 산은 2016년 라스베가스 사막에서 처음 공개된 뒤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돌을 쌓는 일은 인류가 오래전부터 해온 행위다. 토템, 기념비, 경계 표식, 무덤까지— 돌무더기는 늘 삶과 죽음, 기억과 길 찾기 사이를 오갔다. 론디노네는 이 오래된 행위를 현대적으로 다시 풀어낸다. 수천 년 압력 속에서 만들어진 돌을 인간이 다시 하나씩 쌓아 올린다는 것. 그 과정은 자연과 맞서면서도 결국 자연의 일부가 되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은유하는 듯하다.
균형 잡힌 돌무더기는 묘한 안정감을 주고, 작품 앞에 서 있는 관람자에게 작은 명상의 순간도 건넨다. 이 돌탑을 전시장이 아닌 광활한 자연 속에서 보았다면 전혀 다른 울림을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실내의 소란 속에서도 묵묵하게 서있는 돌 주변은 여전히 혼잡한 모순적인 상황 또한 인상적이었다. 조용함과 혼잡함이 동시에 존재하는 요즘의 세상과 닮아 있었다.
회색 돌 위에 인공적인 원색을 입히면서 ‘자연의 질감’ 위에 ‘인간의 선택’을 덧입힌다. 그 순간 돌은 자연물도, 완전한 인공물도 아닌 어딘가에 걸쳐 있는 애매한 존재가 된다.
� Ugo Rondinone, <Mountains>, 2025
돌탑 맞은편 벽에는 강렬한 동심원이 걸려 있다. 원색들이 여러 겹의 원을 이루며 바깥으로 번져나가고 있다. 그 앞에 서는 순간 시선이 자연스럽게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외계어 같은 이 단어는 [츠바이운트츠반치히스터 데쩸버], 독일어로 12월 22일이란 뜻이다. 우고 론디노네의 연작 중 하나.
그는 하루의 기분과 상태를 색으로 기록한다. 색채 조합으로 원을 그리며 마치 일기장 한 줄을 남기듯 작품을 만든다. 하루 동안의 빛과 감정이 원 안에서 천천히 번져 나가는 셈이다.
� Ugo Rondinone, <Zweiundzwanzigster Dezember>, 2023
노란 유리구슬들이 원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가까이 다가가는 순간 전혀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구슬 하나하나가 작은 렌즈처럼 작동해 주변 풍경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반사한다. 빛이 스칠 때마다 작품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세계를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구슬마다 다른 렌즈가 되어 동시에 여러 시선을 만들어낸다.
거울을 겹겹이 배치하거나, 빛과 색을 분해하는 장치를 활용해 ‘하나의 세계를 여러 방식으로 바라보는 경험’을 만들어내는 작가이다. 관람자가 어디에 서 있느냐, 어떤 속도로 움직이느냐에 따라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세상이 얼마나 다르게 보일 수 있는가를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하는 작업이다.
� Olafur Eliasson, <Pluralistic Vision>, 2025
이번 작품도 유리구슬이 연결된 조각이다. 부드러운 곡선이 이어지며 마치 궤도를 그리는 듯한 형태를 만들고 있다. 색 역시 한 방향으로 흐르듯 변화한다. 무색에서 연분홍으로, 다시 자주색으로 깊어지는 그라데이션이 작품에 은근한 운동감을 더해준다. 주변 공간과 관람자의 모습을 반사하며 자연스럽게 시선을 움직이도록 유도한다. 정지된 조각이지만, 계속해서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유리와 구슬 소재로 잘 알려진 그는 이 재료를 통해 자연의 순환, 변화하는 생태계, 그리고 우주적 질서를 탐구해 왔다. 제목이 암시하듯, 이번 작품은 별자리에서 영감을 받았다. 양자리는 ‘새로운 시작, 용기, 리더십’의 에너지를 상징한다. 작품의 곡선과 색의 흐름 속에서 그 생동하는 기운이 은근히 번져 나오는 듯하다.
� Jean-Michel Othoniel, <Aries>, 2024
규칙적인 줄무늬 패턴과 기하학적인 형태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알록달록한 원색이 더해지면서, 거울에 비친 주변 공간이 작품과 겹쳐져 이질적인 화면을 만들어낸다.
형태 그 자체에 집중한 연구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어떠한 줄거리도 서사도 없다. 줄무늬 하나만 기억해도 충분하다.
파리 시내에서도 그의 설치작업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고전적인 건축물 사이에 등장하는 줄무늬 기둥은 처음에는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그 불일치가 오히려 공간을 새롭게 바라보게 만든다.
그의 줄무늬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다.
차양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줄무늬 폭이었기 때문이다. 특정 개인이나 사조에 속하지 않는, 완전히 중립적인 형태를 찾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너무 익숙해져 무심히 지나치는 공간을 다시 보게 만드는 역할에 주목한다.
� Daniel Buren, <Du Cercle au Carré>, 2025
하얀 대리석 판 한가운데에 작은 못 하나가 툭 박혀 있다. 딱딱한 대리석은 믿기 어렵게도 천처럼 주름을 이루고 있다. 재료가 가진 물성이 완전히 뒤집힌 장면이다. 무언가 강한 힘이 작용한 것일까, 혹은 의도적으로 반전된 힘을 보여주는 걸까.
그는 “예술은 너무 진지해졌다”라고 말하며 유머와 풍자, 허무함을 작품 곳곳에 숨겨두는 작가다. 제목을 알고 다시 보니 우아하고 매끈한 대리석을 투박하고 녹슨 못이 질투한 것처럼도 보인다. 못이 대리석을 강하게 밀어 넣자 그 표면이 주름지며 비명을 지른 듯한 모습이다.
� Maurizio Cattelan, <Envy>, 2025
푸른빛의 붓자국이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지만 그 붓질은 정적이라기보다, 어딘가 자유롭게 흘러가는 움직임을 품고 있다.
작가가 붓을 드는 순간을 상상해 본다. 큰 붓에 물감을 묻히고, 한 번 숨을 깊게 들이쉰 뒤 캔버스에 조심스레 붓끝을 얹는 장면.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되돌림이 없다. 머뭇거림 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단호한 선. 한 번의 결정, 한 번의 호흡, 한 번의 힘으로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움직임이다. 작가가 누구인지 바로 아는 떠올린 이들도 있을 것이다.
제목을 알고 다시 바라보면 푸른 붓자국들이 바람이 스쳐 지나간 흔적처럼 보인다.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잠시 붓을 통해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남겨진 듯한 순간이다.
� Lee Ufan, <East winds>, 1985
이번에도 여러 겹으로 덧칠된 푸른 붓자국이지만, 앞서 이번에는 훨씬 두텁고 꾸덕한 질감이 느껴진다. 물감을 아낌없이 사용한 흔적이 그대로 드러난다.
‘결합’, ‘맞닿음’이란 뜻이다. 제목을 더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작가는 마대천의 뒷면에 물감을 바른다. 그리고 그 물감을 앞면으로 밀어 올려 올 사이사이로 스며 나오게 한다. 50년 넘게 이어온 그의 대표적인 기법이다. 이때 물감을 밀어 올리는 작가의 힘과 그 힘을 받아 물감을 투과시키는 마대천의 물성이 맞닥뜨린다. 재료가 서로 얽히며 이미지로 드러나는 순간이 바로 작가가 말하는 ‘Conjunction’이다.
이우환 화백의 작품과 나란히 놓여 있으니 두 사람이 다루는 ‘힘’의 성격이 자연스럽게 비교된다.
� Ha Chong-Hyun, <Conjunction 19-96>, 2019
그랑팔레 맞은편 쁘띠팔레에도 대형 설치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멀리서 보이던 건 쓰러져 가는 기린 한 마리였다. 목은 관절마다 꺾여 있었고, 눈·코·입·털 결까지 놀라울 정도로 사실적으로 재현되어 있다. 기린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가 다시 천천히 일어나기를 반복한다. 그 앞에서 사람들은 가만히 서서 그 과정을 바라볼 뿐이었다. 점점 무너져가는 생태계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기만 하는 우리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모두 알고 있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문제란 뜻이다. 독일 작가 '율리우스 폰 비스마르크(Julius von Bismarck)'는 우리가 외면해 온 ‘불편한 진실’을 시각적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기린 옆에는 청동 기마상이 함께 설치되어 있다. 이 기마상 역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는 동작을 반복한다. 서양에서 기마상은 강한 권력과 위엄을 상징한다. 하지만 여기에서는 그 영웅의 이미지마저 불안정하고,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존재로 보인다. 인간이 세워온 영웅 서사, 그리고 우리가 믿어온 세계의 질서가 사실은 얼마나 흔들리기 쉬운 것인지 조용히 말하고 있다.
� Julius von Bismarck, <The Elephant in the Room>, 2023
이렇게 굵직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첫걸음은 해석보다도 먼저, 눈앞에 있는 것을 천천히 읽어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문장을 한 줄씩 따라가듯, 형태와 색, 재료를 차분히 관찰하는 순간에서 감상은 시작된다. 그렇게 시간을 들이다 보면 어느 순간 제목이 궁금해지고, 작가의 세계 안으로 한 발짝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현대미술은 결국 그 작은 호기심 자체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