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좌표』(홍세화, 한겨레출판, 2014)
“연장은 고쳐 쓸 수 있지만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는 말을 무시하고 ○○○ 씨에게 끝까지 일말의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저 자신을, 통렬히 반성합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 중인 <SKY 캐슬>의 대사다. 어느 주부가 강압적이고 고지식한 남편을 향해 이혼장과 함께 보낸 ‘반성문’의 일부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러한 사실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의 좌표』(한겨레출판, 2014)의 저자 홍세화는 이렇게 답한다. 사람은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나?’라고 물을 줄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지만 후자는 “자기 생각을 바꿀 가능성이 없는, 지금 갖고 있는 생각을 믿는”(p.18)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 생각은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묻는다면 사람도 고쳐 쓸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쉽지 않다. 그렇게 질문할 줄 아는 교육을 우리는 받지 못했다.
학생들을 줄 세우는 한국의 제도 교육에서 ‘질문’은 달갑지 않은 것이다. 저자는 이를 ‘윤리적 범죄’라고 말한다. 시험문제를 보면 스스로 질문하고 생각하는 능력을 어떤 식으로 빼앗는지 알 수 있다. 가령 우리 학생들은 ‘사형제는 폐지되어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자신의 생각과 그 생각을 뒷받침하는 논리를 펼치는 답을 요구받지 않는다. 대신에 이런 시험 문제를 받는다. “다음 나라들 중에서 실질적으로 사형제가 폐지된 나라는? 1) 미국 2) 중국 3) 일본 4) 러시아 5) 한국”(pp.34~35)
대한민국의 만점은 100점이다. 이는 점수 폭이 넓어야 학생들을 줄 세우기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은 다르다. 10점 또는 높아야 20점이다. 그들의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고, 고등학교까지 합격/불합격 기준으로 절대평가만 한다. 따라서 합격한 학생은 그 시험 영역에 머물러 있을 이유가 없다. 합격 이후 그들은 독서, 연애, 여행, 자연과 벗할 수 있다. 우리 학생들은 88점, 99점, 심지어 100점을 받아도 공부를 계속 붙들고 있어야 한다. 1등을 하고도 그것을 지키기 위해 해방될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사교육비 지출은 투자로 인식된 지 오래다. “유엔 아동 권리위원회가 조기교육과 입시교육 때문에 아동과 청소년들의 인권이 침해되고 있다고 지적해도”(p.46) 변함이 없다. 현대판 신분제인 좋은 학벌을 얻기 위해서다. 서열화된 대학에서 받은 졸업장은 죽는 순간까지 그 효력을 발휘한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절은 끝났다. ‘고용 없는 성장’ 시대가 말해주듯 사회 상층 및 괜찮은 자리가 없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처들이는 부유층을 서민 출신이 따라잡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기 위해 논술이나 디베이트를 학습한다. 그런데 토론은 ‘공부’라는 영역에서만 가능하다. 자율적인 생각을 기른 들 사용할 곳이 없다. 다른 생각을 말하려는 순간, 부모는 다음 스케줄을 지시한다. “수평적 관계의 대화와 토론은 없다.”(p.70) 아이가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경우 부모는 화를 낸다.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서라는 말 뒤에는 투자금을 낭비하는 아이에 대한 화가 숨어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줄 시간도, 마음도 없다. 대한민국은 생각 반신불수의 세상이 되었다.
생각 반신불수의 사회에 우리의 의식이 지배되는 과정은 더욱 교묘하다. 일부 보수 언론이 장악한 케이블 방송이 그 예다. TV조선, 채널A, MBN과 같은 뉴스 전문 프로그램에서 여러 패널을 앉혀 놓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같은 뉴스를 반복한다. 같은 패널이 여러 채널에 등장하기도 한다. 하루 종일 그들이 다루는 의제와 의견을 듣다 보면 그 이슈가 가장 큰 문제로 다가온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이나 더 중요한 문제를 놓치게 만든다. 세뇌된 줄도 모르고 그들의 논리를 자신의 생각처럼 말씀하시는 주변 어르신들을 보며 저자의 주장에 끄덕이게 된다. 이보다 강력한 ‘뇌 새김’은 없다.
이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 중 하나인 ‘질서’는 어떤가. “자유의 반대말은 억압이다. 하지만 안보와 질서 이데올로기에 세뇌된 한국 사회 구성원들에게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무질서’나 ‘불안’이다. 노동자들의 파업 소식을 들은 사회 구성원들의 반응은 ‘왜 파업을 일으켰을까?’라는 물음이 아니다. ‘파업=무질서=불안’이라는 정해진 등식에 따라 ‘웬 파업이야!’라는 반대 의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파업에 대한 공권력의 억압에 자발적으로 동의한다.”(p.60) 학교 교육이나 사회 지배 계층으로부터 억압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우리는 저항할 수 있는 자율성에 대해 알지 못한다.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는 말이 쓸쓸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여기서 찾았다.
저자는 이 밖에도 여러 사회 문제를 지적한다. 왜 서민들이 사회 기득권층의 편에서 생각하는지, 국적 포기 논란 시 애국자들이 갑자기 양산되는지, “미국에게는 마냥 바치기를 하면서 굶주리는 북한에 대해서는 퍼주기라고 떠들어대는”(p.135)지에 대해서다. 여러 문제가 있지만 답은 하나다. 자기 생각이 없어서다. 내 생각이 어떻게 내 것이 되었는지 질문하라. 저자는 이 질문을 진전시키기 위해 우리가 받은 교육 경험에 맞게 친절하게 보기를 들어 보여준다. “1) 폭넓은 독서 2) 열린 자세의 토론 3) 직접 견문 4) 성찰”(p.23)
저자가 지적한 문제점이 현시점의 우리 사회를 비추는 것 같다. 이 책의 초판은 2009년이다. 이러한 문제를 안고 있다는 사실보다 더 두려운 것은 10년 동안 변화한 게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소용없는 제안인 줄 알지만 이 책을 '사회 구조 개선'을 위해서는 뒷짐 지고 자신의 입신양명을 위해서만 앞장서는 사회 지도층 및 모든 권력자께 권한다. ‘반성문’은 그들이 먼저 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