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6)
‘투사(鬪士, fighter)’가 되지 못하는 나의 ‘투사(投射, projection)’ 이야기. 『필경사 바틀비』 (허먼 멜빌, 문학동네, 2016)를 읽은 후, 한 줄 평이다. 필경사 바틀비의 ‘온순한 뻔뻔함’에 맞서 싸움을 선택하지 않는 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기대에 영향을 받아 바틀비를 지각하는 과정이 담긴 한편의 심리극이다.
소설의 나는 19세기를 사는 변호사다. 프린터가 없는 시대에 프린터 역할을 하는 4명의 필경사를 둔다. 그중 바틀비를 채용부터 내쫓는 (실은 변호사가 도망가기 까지) 과정, 그 이후의 이야기를 나의 시선에서 다룬다. 화자의 시각 안으로 독자를 가둔 소설은 바틀비에 대한 객관적 정보는 철저히 차단한다. 바틀비란 인물보다 화자의 시선에 주목하여 그를 따라 소설을 읽으면 우리가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타자를 인지하고 판단하게 되는지, 그러한 사고를 들여다보고 맞닥뜨리지 못해 초래하는 결과가 어떠한지 배우게 된다.
모든 것은 주관적이다. 그 대상을 보는 사람의 ‘눈’을 통과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나를 통해 보게 되므로 그것을 표현함에 있어 나의 시각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대상 자체라 인식한다. 이러한 메커니즘을 ‘투사’라 한다. 『마음 똑똑』(인물과 사상사, 2014)의 저자 박승숙은 ‘투사’에 대해 비교적 쉽게 설명한다. “‘투사(投射, projection)’란 심리학 용어로써 자신의 개인적인 흥미나 욕구, 기대 등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지각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자신의 대상을 그렇게 지각하게 만든다는 것을 모른 채 대상에 대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을 고스란히 그것의 특성이라고 여겨버린다. 그래서 어떨 때는 자신이 납득하기 어려운 사고, 감정, 만족할 수 없는 욕구 등을 타인에게 돌리기도 한다.”
화자의 ‘투사’를 통해 본 바틀비는 “창백하리만치 말쑥하고, 가련하지만치 점잖고, 구제불능으로 쓸쓸한 모습”(p.25)으로 “묵묵히, 창백하게, 기계적으로 필사”(p.27) 했으며, “이상하게 나의 성질을 누그러뜨릴 뿐 아니라, 놀랄 만큼 나의 마음을 움직이고 당혹스럽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p.33) 그래서 바틀비는 응당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으며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함에도 화자는 그가 원하는 것을 모두 받아준다. 심지어 그를 가엾은 친구로 만든다. 읽는 이도 쉽게 그를 동정하게 된다. 그러나 소설의 어디에도 그가 가엾을 만한 근거는 없다. 바틀리에게 경제력이나 가족, 친구와 같은 개인적인 얘기를 요구해도 단호히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화자가 바틀비의 외모나 행동을 통해 짐작한 ‘판단’이 동정심의 근거가 될 뿐이다.
화자는 자신이 바틀비에 대한 적개심을 해제한 것은 그의 “훌륭한 온순함”이라 표현했다. 그러나 자신의 의지대로 바틀비를 내쫓지 못하는 화자가 더 온순하게 보인다. 바틀비를 내쫓기 위해 “나가!”라고 호통치는 대신 다른 필경사들에게 바틀비의 태도가 온당한지 물어 그들의 동조를 구하는 방식은 세지 않다.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라고 당당히 말하는 바틀비에게 자신의 유일한 의견으로 낸 것이 고작 상례에 벗어난 것이라며, 상투적인 통념을 빌려온 것은 순진하며 궁색하기까지 하다. 바틀비의 모습은 곧 화자였다.
자신의 결정에 자비, 현명, 사려 깊은 행동규범은 있지만 화자 자신의 선택은 없다. 바틀비의 '안 하는 편을 선택하겠다.'는 의지와 대조를 이루는 화자가 자신에게 없는 모습을 동경하는 것 또한 ‘투사’의 일종이다. 그러한 모습이 화자의 눈에 목격된 것은 내면에 그러고 싶은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 하는 편을 선택’ 함으로 인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듯, 눈으로 알아차리기도 어렵고 표현되지 못하는 욕구 또한 화자의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하겠다는 당당함에 쉽게 어쩌지 못하는 화자의 모습에서 바틀비가 보이는 이유다.
이 소설은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것이라고 확신하여 ‘마녀 사냥’으로 억압하는 21세기의 대표적인 투사 대처법과는 다르지만 둘 다 문제가 있다는 점에선 같다. 자신을 ‘고원한 기질을 가진 사람’으로 상대적 우위를 두어 바틀비를 포용한다. 이는 화자가 바틀비가 자신의 말을 듣고 사무실을 나갔을 거란 기대가 무너지는 장면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짜증이 났지만 그 불가사의한 필경사가 나에게 행사하는, 내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그 놀라운 우위에 다시금 복종해서 천천히 계단을 내려가 거리로 나섰다. (…) 물리적으로 그를 떠밀어 내쫓는 짓은 할 수 없었다. 험한 욕을 하여 쫓아내는 짓도 하지 않을 것이다. 경찰을 부르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생각이다. 그렇지만 주검이나 다름없는 그가 나에 대해 승리감을 만끽하도록 내버려두는 것, 이것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p.66)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지평을 넓히기 위해 자신의 ‘급’을 올리는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품위를 지키기 위해 고원한 급을 자신도 모르게 선택하는 것이다. 물리적 분쟁을 피함으로써 자신을 우위에 두는 것은 고상하지만, 실제 복종을 당하는 자가 우위에 있는가는 생각해 볼 일이다. 나의 내면과 욕구를 들여다보고 타인에게서 본모습이 나의 일부일 수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이 우선되어야 ‘못마땅함’의 해결 방법에 있어 우위를 선점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바틀비라는 인물로 상징된 화자의 ‘못마땅함’은 화자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처형받지 못한다. 사무실을 떠나는 것으로 회피한 그것은 사회적 품위를 위해 교육받은 인식, 종교의 교리, 타자의 판단 등에 의해 '감옥 안의 바틀비'와 같이 조용히 소멸된다. 내 안의 ‘하지 않을 선택의 자유’는 끝내 열어보지도 못한 ‘사서(死書)’가 되어 소각되듯 세상의 일부로 자리하지 못한다. 내 선택에 의한 의지와 결정은 정당성을 갖지만 사회로부터 소멸된 것은 사회의 계획된 살인이고 비극이고 슬픈 결말이다. 사회와 끝내 어울리지 못하고 쓸쓸히 죽음을 맞이한 우리 안의 모든 ‘바틀비’를 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