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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짝 Jun 05. 2019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돼.

과민성대장증후군 처방전.

"있잖아, 폴." 그녀가 말한다. "가끔씩은 긴장을 푸는 것도 괜찮아. 그건 죄악이 아니잖아."
"뭐가 죄악이 아니야?"

"행복한 거." 그녀가 내 손을 잡으며 말한다. "그건 죄악이 아니야."

- 앤드루 포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아술> 중 -


최근 신경이 온통 한 군데에 쏠려 있었다. 좋은 회사에서 제안받은 좋은 조건의 포지션. 말 그대로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만 같은 기회였다. 동시에 생각이 많아졌다.


지금 구축한 라이프스타일이 딱 마음에 드는 참인데 다시 출퇴근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래도 장기적으로 더욱 탄탄하게 지금의 라이프스타일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게 큰 스케일의 프로젝트를 해내야 할 텐데,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랬다가 또 몸이 닳는 느낌에 잠기면 어떡하지?

미래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는 이유로 현재를 얼마만큼 버티게 할 수 있지?


같은 것들이 의식의 수면 위로 퐁퐁 튀어올랐다. 부풀었다가 터지고, 생겼다가 사라지고를 반복하면서.

캐주얼한 미팅에서부터 상무님 면접까지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전원 오프 버튼을 의식적으로 누르고 있는데도, 머리는 생각을 끄는 방법 자체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생각의 갈래가 머릿속을 쉬지도 않고 돌아다녔다.


꼬박 일주일을 그러고 있으니, 어김없이 찾아왔다.




이름하야 '과민성대장증후군'. 그래. 대장님이 제대로 열 받으신 거다.

소화가 잘 안 되는 것부터 시작해서 식욕도 뚝 떨어지고, 가스로 팽창된 배 구석구석이 쿡쿡 쑤셨다.

가끔 안 되겠다 싶어 약국에 갈 때면 약사님들이 요즘 많이들 그래요- 하는 그 증상.


이번에는 발발 원인으로 추정되는 스트레스의 종점이 비교적 명확했기 때문에, 조금 있으면 괜찮겠지 싶었다.

무엇보다 제주행 비행기를 타고 다시 제주로 가니까. 가서 푹 쉬어야지.


그런데 웬걸. 한 번 탄력 받은 통증은 쉬이 줄어들 기미가 안보였다.

비행기를 타러 가는 길에 아무래도 약을 타 와야겠다 싶어 공항 안에 있는 약국에 들렀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지니신, 시골 의원 이미지에 가까운 약사님이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물으셨다.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에요. 들을 만한 약이 있을까요?


"아이고. 신경 많이 쓸 일 있었어?

지금 아가씨가 겪는 그런 건 병원 가도 아무것도 못 해줘. 해줄 게 없어.

왜 눈도 피로하면 빨갛게 충혈되지? 지금 위랑 장이랑 다 그런 거야.

그리고 그거 역류성 식도염이랑 같이 와. 위도 같이 경직되거든?

자. 이거 한 번 먹어봐. 아침저녁으로 3일 동안."


약사님 말을 듣고 있으니, 갑자기 묻고 싶었다. 물론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하겠지 생각하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왜 생기는 거예요, 과민성대장증후군은?


"너무 열심히 살아서.

너무 잘하려고 해서 그래."


띵했다. 대체 이 말을 들은 게 몇 번째인가.

명상센터에서 만났던 숱한 사람들, 이전에 다니던 회사 대표님, 회사 대표님이 소개해주셔서 알게 된 카이로프랙틱 시술사님도 똑같은 말을 했었다. 지난 1년은 나름 최대한 열심히 안 산 것 같은데, 아직도 열심인가. 아니 열심히 안 사는 것조차 열심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니, 약사님은 내 눈을 보며 지긋이 말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돼.

어려운 이야기인데, 명심해. 이게 요즘 현대인의 가장 큰 문제거든.

너무 밖만 보고 경쟁하느라 자기 안의 평화를 못 지켜.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그런 거 대수롭지 않게 여겨서 방치하지 말고, 지금부터 바로 고쳐야 돼.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 거야. 그게 안 되면 안 돼."


약사님이 챙겨주신 약봉투를 손에 들고 제주로 오는 길 내내 어딘가 마음이 숙연했다.

요즘의 나는 어쩐지 나 자신에게 한동안 엄청 사랑해줬잖아 이 정도면 충분하잖아 같은 말 따위를 뻔뻔스럽게 내뱉는 재수 없는 사람처럼 굴고 있었다.

어제 사랑받았어도 오늘 또 사랑받고 싶은 게 마음인데.


그래도 제주행 비행기는 변환기 역할을 착실히 해주었다.

비행기 문을 나서 후덥지근하고 바닷냄새가 살짝 섞인 제주의 공기가 숨으로 들어오는 순간,

온 세포가 힘을 푸는 게 느껴졌다. 한껏 나른해질 준비가 되었다.  


사랑하는 이와 손잡고 동네 산책을 다녀오고,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소설책 한 권을 뚝딱하고,

올해 첫 바다수영을 개시했다. 바다는 끼야아란ㅇ락 소리가 튀어나올 만큼 차가웠다. 뾰족뾰족 가시를 세워대던 온몸의 신경이 화들짝 놀라서 이제 이상하게 안 굴게!! 살려줘!!! 외치는 느낌.

그렇게 꼬박 하루 만에 다시 나 자신과 말이 통한다. 통증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잦아들고.


요물 같은 곳이다.

내 몸과 마음은 제주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2019년 6월 5일 자. 제주의 낮과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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