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퇴근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살짝 Jul 10. 2021

Day 6|살아있는데 살아있고 싶어

[FREE WORKERS 프리워커스, 모빌스 그룹]

실험한다는 것은 자신에게 틀릴 수 있는
자유를 준다는 의미다.
- 시어도어 다이먼, <배우는 법을 배우기> 중 -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는 눈에 띄는 장점이 많다.


일단 연봉이 상당히 세다. 직급 승진 텀이 2~3년으로 굉장히 빠르고 상승폭도 커서 맨 앞자리 수가 두 개씩 바뀐다. 능력치가 짱짱하고 성장 욕구가 강한 사람들이 많아 규모가 큰 조직임에도 에너지가 강한 편이다. 해외 어디를 가도 경력으로 인정받을 글로벌 네임밸류가 있다. '글로벌 컨설팅펌인 척 하지만 이곳은 한국에 있는 한국 기업일 뿐이다' 자조할 때가 많긴 해도 일반 대기업 혹은 공기업과 비교하면 경악스러울만치 자유로운 부분도 분명 있다.


기본적으로 단체 행동이랄까 집단 규칙 따위가 거의 없다. 근무시간도 출퇴근 카드 찍기 같은 시스템에 의해 집계되는 게 아니라 개인이 자율적으로 입력하고, 법인카드도 인당 1개씩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비용도 개인이 각자 IT시스템 상에서 정산한다. (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팀 막내가 팀 법인카드 영수증을 관리하고 주기적으로 결재를 받아야 했다. 심지어 영수증이 종이영수증이어서 그걸 일일이 풀로 붙이고....ㅎ) 같은 팀의 직속 상사가 점심을 먹자고 할 때도 개개인의 스케줄에 따라 최소 며칠 전에 미리 약속을 하고 먹는다.


화요일에는 늦잠 자는 바람에 급하게 오전 반차를 썼는데 1시간 일찍 나왔다고 1시간 일찍 퇴근시켜주시기도 했다. 물론 바쁘지 않을 때여서 가능한 일이긴 하지만 이런 부분에서 눈치 주는 게 정말 1도 없다. 업무강도가 센 편이다 보니 세세한 근태 영역에서 상당히 너그럽다. 기본적으로 자기 일만 잘하면 딱히 건드리지 않는 분위기.


업무적으로 큰 압박이나 스트레스는 없지만 세세한 언행이나 옷차림 같은 걸로 끊임없이 눈치 봐야 하고, 9시가 정시출근이면 8시 반에는 와 있어야지? 하는 상식이 팽배한 곳과는 정반대의 DNA가 흐르는 것일 테다.

아.. 이런 회사는 커피 끊고 외식 끊고 라면만 먹고사는 한이 있더라도 다닐 수 없다. DNA가 크게 어긋난 곳에 있으면 몸과 마음 중에 하나는 무조건 탈이 난다. 혹은 둘 다 나거나.

 

그런 면에서 지금 회사는 내가 다닐 수 있는 종류의 회사인 건 분명하다. 장점이 많은 회사인 것도 맞다. 안다.

그런데 이상하게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다.

(연애에 비유하자면 : 돈도 많고, 외모도 훤칠하고, 쓸데없는 집착이나 잔소리도 전혀 안 하고, 합리적인 데다가 매너 있고 자기 관리도 철저한데.. 그러니까 흠잡을 만한 구석이 없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안 가는 남자 친구랑 갸웃거리면서 연애하는 느낌. 와- 너무 잘 표현한 것 같아서 살짝 소름.)




분명 살아있는데 살아 있는 기분이 안 든다. 눈에 띄게 생기가 사라졌다. 과하게 타고나서 흘러넘치기만하던 감수성과 다정함이 확연히 메말라간다.

혼자만의 기분 탓인가 했는데, 최근에 친구들을 만나면 하나같이 똑같은 말들을 한다.

너 묘하게 영혼이 없어졌다. 다크서클이 원래 이렇게 심했나? 왜 이렇게 생기를 잃었어?


지금 회사의 특성상 심적 압박감이 심해서 생긴 문제인지, 아님 회사에 다니는 회사원의 숙명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냥 나이가  탓인지는 모르겠다.

다들 이렇게 감흥 없이 팍팍한 맛의 날들에 그럭저럭 적응해가며 나이 들고 있는데, 나만 그게 잘 안 되는 건가.


회사 때문에 인생이 재미없어졌어!라고 말하는 남탓쟁이가 되고 싶지 않아서 사이드 프로젝트도 하고 활기찬 사생활을 보내는 걸로 밸런스를 맞춰오고 있었는데, 이제 임계점에 다다른 것도 같다.

월화수목금 대부분의 시간에서 블랙홀처럼 생기가 빨려 들어가고 있으니 남은 게 없어지는 거다.


하고 생각할 때쯤. 국내에서 가장 핫한 브랜드이자 사람들인 모빌스 그룹이 낸 책, [FREE WORKERS 프리워커스]를 읽었다.

노동절 웤샵도 다녀왔다.

모빌스 그룹이 헤매면서 자리 잡아가는 이야기들 속에 내가 현재 일에서 느끼는 갈증이자 니즈를 역으로 발견할 수 있었다.


생기라고 뭉뚱그린 말속에는 크게 세 가지의 니즈가 있었다.




#1. ‘나’여도 괜찮은 그룹을 만나 함께하고 싶다.

모춘이 브랜드 제작기에서 주연이라면 소호는 PD이고, 대오가 누브랜딩 시리즈의 주연이라면 모춘은 조연이 되기도 한다. 훈택 역시 자기 콘텐츠에서 주연이었다가 라이브 방송을 할 때는 엔지니어링을 총괄하는 PD가 되기도 한다. 지우도 어느 날은 라이브 방송 작가, 어느 날은 누브랜딩 시리즈 조연출이다. (…) 각자 맡은 역할은 때에 따라 변하고, 우리는 그에 맞춰 일한다. 중요한 기준은 ‘각자가 고유의 개성을 뿜어낼 것’, 동시에 ‘전체의 밸런스를 이룰 것’. 이 기준에만 부합한다면 어떤 역할을 하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 (…) 각자 잘하는 분야에서 개성을 발휘하되, 전체의 맥락을 살피기 위해 노력한다. 이게 우리가 생각하는 ‘그룹사운드처럼 일하는 것’이다.


#2. 제대로 머리를 맞대고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호흡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합주의 모습도 이런 것이다. 누군가에게 맞추려 애쓰지 않고 서로의 개성을 존중하며 각자가 가장 잘하는 악기를 연주하고, 그 자체로 조화로운 합주를 이루는 것. 우리는 더 이상 ‘클라이언트’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상대방이 일을 의뢰하고 우리가 그 일을 수행하는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함께 합주를 하는 ‘파트너’라고 생각하려 한다. 이런 합주를 해보고 싶은 사람들이 우리를 더 찾아와 줬으면 한다. 악기를 연주할 준비가 된 사심 가득한 담당자가 있다면 언제든 환영이다.


#3. 그 무엇보다.. 좀 재밌게 일하고 싶다. 재밌는 거 하고 싶다. 그것도 격하게.

우리가 일을 벌이는 기준은 이성보다 이상, 전략보다 재미다. 계획을 세워봤을 때 전략적으로 성공할 것 같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이거 하면 재미있겠는데’ 하는 감정이 드는 일을 한다. 오랜 시간을 들여 일을 꾸민 적이 없고 대부분 즉흥적으로 달려든다. 음악으로 치면 즉흥 연주와 같다. 어떤 사람이 피아노 연주를 시작하면 그 가락에 맞춰 색소폰을 불고 드럼이 리듬을 맞춘다. 순서나 리듬이 바뀌는 것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변주된 가락이 재미있는 음악을 만든다.


그러니까 나의 모습을 지키면서, 내가 나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들을 마음껏 펼치면서 일하고 싶다.


사실 이렇게 일하는 가장 빠른 길은 이런 회사를 찾는 게 아니라 직접 회사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 모빌스 그룹이 그랬듯이.

혹은 다시 프리랜서 상태로 돌아가되 에이전시 같은 형태의 조직에 속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다.


막상 이 니즈를 실현시키고 나면 또 다른 갈증에 허덕일지도 모르지.

그런데 이젠 외로워서 하는 연애, 연애를 위한 연애는 지긋지긋하다.

마찬가지로 돈을 안 받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하는 것, 나랑은 아무 상관없다고 느껴지는 회사에서 하루 종일 기능하려 힘을 쏟는 것도 고된 일이다. 누군가에겐 배부른 소리처럼 느껴질지라도 어쩔 수 없다.


나는 내 편이 되어 실험의 자유를 내게 줄 작정이다. 대학교 휴학하고 짱 박힌 지리산 명상센터, 퇴사하고 1년간 제주살이, 인터뷰집 시리즈 독립출판처럼 뜬금없는 삶의 이력은 늘어가겠지만, 죽기 전에는 꼭 이렇게 말할거다. 아- 즐겁게 놀다갑니다.

지금 당장 일이 잘 안 풀리고 꽉 막힌 벽에 둘러싸여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기억할지는 오롯이 자신의 몫이다. 처음 시작한 이야기를 멈추거나 바꾼다 해도, 두 번 세 번 돌아가도 상관없다. 우리에겐 얼마든지 실험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세상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직 자신에게 귀 기울여 보기를, 저마다의 자유를 찾아 나서 보기를 바란다.

[FREE WORKERS 프리워커스, 모빌스 그룹]
매거진의 이전글 Day 5|몸과 마음은 하나니까, 마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