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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구 Mar 27. 2019

8. 비밀 없는 우리 사이


귀농생활은 생각보다 아주 많이,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물론 서울에서도 늘 사람들과 부대끼고 살아가지만 퇴근 후 혼자만의 시간이 오면 ‘오늘의 인간관계 끝’ 이라는 느낌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어디 음식점이라도 가면 사장님은 동네주민인 것은 당연하고, 덤으로 같은 교회 집사님이거나 누구의 매형 아니면 작은 아버지일 때도 있다. 아주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는 인적 네트워크. 우리동네 카센터 사장님은 오래된 우리집 중형차를 수리하는데 실패했지만, 이렇다 할 컴플레인을 하기에는 관계가 애매하다. 부모님과 같은 교회 성가대 대원이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층간소음에 대적할 만한 시골의 소소한 분쟁은 바로 '측량소음'. 물론 처음 땅을 살 때에는 정확한 구역을 확인하고 사지만, 대대로 물려받는 경우도 있고 땅에 항상 금이 그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평소에는 그 경계가 모호할 때가 있다. 땅을 사고 팔 때나 아주 가끔이긴 하지만 토지의 경계 문제로 이웃간 의견충돌이 있을 경우에는 전문 측량사를 불러 해결하지만, 심각한 상황이 아닐 경우 대부분 적당히 넘어가곤 한다. 우리 땅 끄트머리 쯤에 이장님 나무 한 그루가 심어져 있는데, '금 넘었으니 열매 열리면 다 내 거'라고 할 수도 없고, 다음 달까지 정리하지 않으면 이장님의 소중한 나무를 뽑아 버리겠다고 내용증명을 보낼 수도 없는 노릇. 회사에서 항상 듣는 '적당히 융통성 있게'는 여기서도 통하는 말이다.


내가 집에 내려가게 되면 차 한 대를 더 대야 하니 미리 주차공간 확보를 위해 아빠가 본인 차를 길 옆쪽으로 빼 놓는데, 그것만 보고도 동네 분들은 이번 주말에 내가 내려올 거라는 걸 안다. 한 번은 외삼촌 가족이 귀여운 민트색 경차를 끌고 부모님 댁에 놀러 간 적이 있는데, 엄마는 차 뽑은 거냐고 축하한다는 전화를 그 날만 서너 통을 받았다. 사실 이웃 스케줄 파악에 가장 적합한 곳은 바로 우리집이다. 거실 통유리창이 제대로 나들목 뷰라서, 동네 분들 오고 가는 현황을 거실에 앉아 바로바로 체크 가능하다. 거실에서 날씨 감상하던 부모님도 갑자기 '누구 형님 댁 오늘 서울 가신다 하지 않았나? 밭에 계시네', '앞집 오토바이 고장났다더니 고쳤나봐 방금 지나갔어' 하며 사립탐정 급의 엄청난 관찰력을 선보인다. 혹시라도 대충 핑계를 대고 마을 행사를 빼먹는다던지 하는 모험은 애초에 시작하지 않는 게 좋다. 아무리 치밀한 거짓말도 어르신 탐정들이 모이면 반나절 내에 모두 밝혀지니까.


동네 대부분의 집에는 대문이 없고 낮 동안에는 현관도 반쯤 열려있을 때가 더 많다. 외출이래봤자 잠깐 밭에 일 하러 나가거나 옆집 혹은 뒷집에 가 있는 게 대부분이므로 어디 길게 여행이나 가지 않는 한 현관문을 잠글 일도 거의 없다. 우리집에도 대문은 없지만, 잔디밭에 강아지들을 풀어놓으면 자꾸 바깥으로 탈출 하려고 해서 마당 가장자리에 정강이 정도 오는 낮은 울타리를 쭉 세워둔 적이 있었다. 우리집에 종종 내려오시는 윗집 할머니가 ‘이건 나 오지 말라고 막아 둔겨?’ 하고 웃으며 말씀하셨는데, 장난처럼 말했지만 벽 없이 살던 분들에게는 이 낮은 펜스도 일종의 경계로 느껴질 수 있겠구나 싶었다. 참고로, 충청도 화법은 그 깊고 깊은 뜻이 절제되어 숨어있기 때문에 같이 웃으면서 넘어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는다. 그 즉시 서울말로 통역해서 이해한 뒤 실행에 옮겨야 한다. 우린 그 날 바로 울타리를 치웠다.


아마 혼자만의 고요한 사색의 시간을 갖는 전원 라이프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귀농생활이 처음 기대와는 조금 다를 수도 있다. 이 곳은 조용하지만 북적대고, 느리지만 빽빽하다. 부모님 집 거실에 벌러덩 누워 티비를 보다가 갑자기 홍시나 옥수수 같은 걸 갖고 들어오시는 동네 분들의 급 방문에 익숙해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지만, 외로울 틈 없이 분주하게 흘러가는 이 곳에서 부모님이 인생의 후반부를 보내는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어디 조금만 아파도 이것 저것 보양식을 가지고 오는 앞집 아주머니가 있고, 부모님이 길게 외출할 때면 대신 강아지들 밥을 챙겨주는 형님 댁이 있으니까. 완벽한 비밀이 보장된 주상복합에 사는 것보다 더 행복할 거라는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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