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IN Aug 12. 2019

한여름의 판타지아 (2015)

한여름에 만난 우연

    장건재 감독의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를 봤다. 덥고 습한 해가 쨍한 여름의 일본을 만나는 영화, 한여름이니까 꺼냈다. 언젠가의 한여름에 다녀왔던 후쿠오카 - 나가사키 여행이 많이 생각났다.


나라 국제영화제와 함께 장건재가 만든 영화. 가와세 나오미가 제작했다. 영화는 일본에서 촬영되어야 하며, 불꽃놀이 장면이 나와야 한다는 조건부가 있었다고.


    정말 좋아하는 김새벽 배우와 이와세 료가 나온다. 김새벽 배우님은 정말 좋아하는 배우 중 한 명. 특유의 차분하고 단단함이 너무 좋다. <벌새>에서만큼이나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의 캐릭터도 좋다. 언제 어느 영화에서 만나도 좋은 새벽 배우님의 얼굴과 목소리.


    영화는 두 개의 챕터로 나눠진다. 첫 번째 챕터는 '첫사랑 요시코'다. 흑백으로 진행된다. 특이한 점은 음악이 하나도 깔리지 않는다. 한여름의 매미소리만 가득한 채 인물들의 대화가 흘러간다.


세 사람이 서로에 대해, 혹은 마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이 얼굴 저 얼굴을 번갈아 비추는 게 아니라 한 인물의 얼굴만 진득하게 보여주는 점이 너무 좋았다.

인물들은 일 때문에 만났지만 어느새 서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는데, 이 흐름이 너무 좋았다. 특히나 유스케 상의 '로맨스가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하며 지나간 인연을 떠올리는 화면 가득한 얼굴 좋았다.


    영화 첫 장면에서 카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주민들)의 이야기가 깔린 후 마을 구석구석을 함께 걸으며 유스케가 해주는 이야기를 계산 없이 듣는다. '사람'이 제일 중요하고 '사람'이 중심이 되는 이야기들, 배려 가득한 신들이 좋았다.


    두 인물이 유스케와 헤어지고 나눈 대화 장면도 좋다. 음악도 카메라의 움직임도 없이 그들을 가만히 지켜보는 점이 좋다. 이야기와 표정에만 집중하게 된다.


이 흑백의 챕터 1은 고조라는 마을의 50년대를 돌아보는 이야기로 흘러간다. 일본어가 계속해서 나오지만 주인공 미정이 통역가 역할이다 보니 자막이 나오지 않는다는 점도 재밌다.


    주인공인 두 인물은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고조를 돌아보면서 옛날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실은 마을의 구성원들인 '인물' 개개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천천히 그들의 독백을 들어준다. 천천히 각각의 인물을 지켜봐 주는 게 좋았다. 그들은 가만히 들여다본다.


    영화는 색감과 음악을 더한 채 챕터 2 '벚꽃 우물'로 넘어간다. 꼭 과거에서 현재로 넘어오는 느낌이다. 앞 이야기에서 이 오래된 마을에 들어왔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사실은 챕터 1과는 다른 인물들이다.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하고 보다가 알고 보니 더 이상 통역가인 미정의 이야기가 아니라 배우 혜정의 이야기라는 걸 우리는 깨닫는다. 나라로부터 전차를 타고 고조에 여행 온 미정, 아니 혜정의 이야기. 같은 배경에 다른 인물, 직업도 다르다. 유스케 상도 더 이상 유스케가 아니다.


    그녀는 혼자 있을 시간이 많이 필요했는데, 우연히 한 인연을 만나게 된다. 아무것도 없는 곳을 찾는 시간, 그는 자신이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거듭 묻지만 사실 시끄럽고 방해가 되어도 나쁘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그래도 결국 그녀는 혼자 떠난다. 그가 부담은 안주돼 계속해서 잘 부탁한다고 정중하게 구는 점이 좋았다. 언어도 다르고 만난 적도 없지만 말이 흐르듯 통하는 두 사람.


    앞 파트에서 등장했던 공간이 새로운 곳으로 다시 나온다. 이곳에 사는 '현재'의 인물이 과거의 인물 (돌아가신 할머니)  을 대신 얘기한다. 챕터 1의 이야기와 어느 것이 진짜고 먼저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두 사람의 인연뿐 아니라 내내 판타지 한가운데 들어와 있는 기분.


두 사람은 계속해서 서로에 대해 이야기한다. 혜정은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그녀가 바라는 행복은 오래 사는 것보다도 사는 동안에만큼은 행복한 것. 꿈의 노예보다도 현재가 행복할 것.


    챕터 1에 나왔던 학교를 찾아간 두 사람. 과거와 미래가 마치 이어지는 점들이 곳곳에 나온다.

 

    두 사람은 마지막으로 술 한 잔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데, 내일부터는 더 이상 찾을 수 없을 거라는 말을 한다. 한국으로 돌아가기 때문인데. 그의, 더 같이 있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직설적인 다정함이 좋았다.


두 사람은 이어질 듯 이어지지 않는다. 일단 혜정에게는 한국의 남자친구가 있기도 하고. 둘은 헤어진다. 언젠가 한국에 가면 안내해달라는 기약 없는 약속을 하며. 종이가 없어 손에 번호를 적어주는 혜정을 지긋이 바라보는 시선이 좋았다. 가만히, 조건 없는 마음. 그들은 키스하고 그렇게 헤어지게 된다.


    진짜 한 여름밤의 판타지 같은 이야기다. 그들은 비록 같이 불꽃놀이를 보러 가진 못하고 선을 그었지만. 그 마을에서 며칠간 두 사람의 시간은 충분히 영화 같았으니까.


여름을 가장 잘 담아낸 영화 중 하나 아닐까. 덥다-라는 말이 입에서 계속해서 나오면서도, 땀이 줄줄 흐르면서도 여름을 사랑하는 사람은 여름을 포기하기 어렵다. 그런 사람에게 너무 아름다운 영화인 거고.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 좋았다. 차분하고 명확한.   

    

    다만 하나 걸리는 점은 챕터 2의 경우에는 즉흥적으로 찍게 되었다고 들었다. 감독이 김새벽 배우님의 연기가 너무 좋아 또 나오길 원했고. 대본도 그때그때 나오고 정말 즉흥적으로 신들이 구성되어서 편집하며 새로이 만든 정도라고 했는데, 마지막의 키스신은 감독과 이와세 료만 얘기되었던 거라는 게 좀 걸렸다. 가능하다면 키스하세요라는 디렉션이었지만 새벽 배우에게는 당황스러웠을 터. 아무리 자연스럽고 우연한 모습을 담고 싶었다 해도 아쉬운 점.

어찌 되었든 그 점을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제목도 좋고 다 좋다. 행복에 대한 이야기하며, 한여름의 꿈같은 이야기였다. 잊고 살다가 내년 여름이 되면 또 만나자.


작가의 이전글 미드소마 (Midsommar, 201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