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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lly Yang May 22. 2024

본업으로 복귀 - 잡지 기고

월간 국립극장 5월호 - 세계무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투란도트“

정말 오랜만에 본업으로 돌아온 것처럼 잡지에 기사를 썼다. 음악 전문가는 아니라서 쓰는데 생각보다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

월간 국립극장 5월호 - 세계무대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투란도트"


푸치니의 세계, 메트가 연출하는 미(美)에 빠지다 


은은한 조명이 분수대 앞을 비추고 어둠이 완전히 내리지 않은 메트 오페라 극장 앞에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오늘 밤을 풍성하고 우아하게 채워줄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를 만나는 기대로 가득하다. 별이 떨어질 것 같은 홀의 천장을 지나 황금색 커튼이 드리워진 무대 아래 지휘자의 등장에 맞춰 박수가 터지면 베일에 감춰진 무대의 막이 적당한 흥분을 만족시키며 서서히 올라간다.   

자코모 푸치니(1858-1924)는 12개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중 단 세 편만 그의 모국어인 이탈리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투란도트는 중국의 풍경 속에서 펼쳐진다. 푸치니의 마지막 오페라이자 미완성 작품인 투란도트의 3막 후반부는 그가 생전에 작업했던 것을 바탕으로 동료 작곡가 프랑코 알피아노가 마무리했다. 메트 오페라의 투란도트는 ‘아이다’와 더불어 웅장한 무대장치와 강렬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제피렐리 프로덕션의 상징적인 작품이다. 이탈리아 영화감독 프랑코 제피렐리(Franco Zeffirelli)는 영화와 텔레비전은 물론, 오페라에서 탁월한 연출과 화려하고 섬세한 무대 디자인으로도 유명하다.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의 링컨센터 첫 프로덕션 연출자이기도 한 그는 세계 오페라 극장에서 입지적인 인물로 통한다. 

제피렐리 프로덕션이 진가를 발휘하는 순간은 2막에서 절정을 다한다. 무대만으로도 관객들의 환호성과 박수갈채가 쏟아지는데 앉은 자세를 고쳐 앉을 만큼 시선을 잡아끄는 화려한 연출 때문이다. 35분의 1막이 끝난 후, 공연 시간보다 조금 더 긴 40분의 인터미션(Intermission)이 있다. 전체 공연이 3시간 20분이기 때문에 관객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의상과 무대를 바꾸려면 꼭 필요한 시간이다. 약간의 지루함이 무색해질 만큼 어둠을 밝히는 조명이 켜지자 웅장하고 눈부신 무대에 매료되어 홀린 듯이 2막 속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처음 메트 오페라를 접했을 때 두 가지 면에서 놀랐다. 첫 번째는 상상 이상의 규모이고, 두 번째가 오케스트라의 실력이다. 오페라 극장은 일반 콘서트홀과 달라서 연주자들이 무대 위가 아닌 무대 밑의 피트 안에서 소리를 내야 하므로 객석까지 전달되는 과정에서 드라이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메트 오케스트라는 이러한 장소의 한계점을 실력으로 극복해 낸다. 연주자 개개인이 월등한 실력을 갖추고 있음은 물론이고, 일 년 공연 횟수가 약 240회 정도로 다른 극장과는 비교 불가능하므로 연주자들이 곡에 대한 해석이 뛰어난 점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단 한 번의 리허설 없이도 당장 연주할 수 있는 단체로 탁월한 실력을 인정받은 메트 오케스트라의 오디션은 블라인드로 진행되기 때문에 철저히 실력만으로 선발된다. 그래서 오케스트라 경험이 전혀 없는 젊은 연주자들도 경력보다는 실력으로 선발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들과 함께 실시간으로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며 음악을 만들어가는 역할은 우크라이나 출신의 젊은 여성 지휘자, 옥사나 리니우(Oksana Lyniv)가 뉴욕 데뷔로 지휘봉을 잡았다. 


투란도트, 서사를 노래하는 사람들에게 빠지다  


투란도트는 중국의 아름다운 공주 투란도트의 마음을 얻기 위한 칼라프 왕자의 목숨을 건 수수께끼 풀이로 이어지는 사랑 이야기이다. 3막이 시작되면 이 곡의 하이라이트이자 관객들에게 끊이지 않는 박수를 받은 테너 백석종이 부른 ‘Nessun Dorma(공주는 잠 못 이루고)’가 물감을 흩뿌리듯 무대를 색칠한다. 그의 목소리는 공간을 꽉 채울 만큼 장악력이 있었으며, 동시에 아름다웠다. 사랑을 찾아가는 이야기와 승리에 대한 결의는 소리의 강약을 절묘하게 왔다 갔다 하는 곡예사가 되어 관객들의 백색 도화지에 신비로운 화폭으로 그려지기 충분했다.

다양한 오페라에서 주요 역할을 맡으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러시아 출신의 소프라노, 엘레나 판크라토바(Elena Pankratova)가 2월부터 6월까지 투란도트 역을 맡아 백석종과 함께 12번의 무대에 오른다. 4월에는 미국의 소프라노 크리스틴 게르케(Christine Goerke)가 투란도트 공주가 되며 프랑스와 이탈리아 국적의 테너, 로베르토 알라냐(Roberto Alagna)가 크리스틴의 상대역으로 4월의 왕자로 메트에 섰다. 칼라프를 사랑했던 희생의 아이콘 리우 역은 로베르토의 실제 부인이기도 한 알렉산드라 쿠루자크(Aleksandra Kurzak)가 맡았다. 투란도트와 칼라프의 사이에서 긴장감을 만들고 감정을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이다. 그녀의 목소리와 연기는 완벽하게 리우와 일치했으며 관객의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또한 바리톤 강주원은 빼놓을 수 없는 조연으로 감초 역할을 하는 핑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해 냈다. 2막 초반에 고향의 그리움을 담아 부른 아리아 ‘Ho una cas nell’Honan’는 뉴욕타임스 리뷰에 “꿈결과도 같은 그리움”을 담아냈다는 호평을 받으며 그의 진가를 보여주었다.  

엄청난 규모와 스케일을 자랑하는 메트 극장은 가수들에게 영광의 자리지만 무덤과도 같다고 할 만큼 노래하기 쉽지 않은 곳이다. 외국의 유명 극장은 약 2천석 내외의 수준이지만 메트 오페라는 3천8백 석의 규모이기 때문이다. 이는 유럽에서 활동하는 일부 유명 가수들이 메트 무대에 선 이후 다시 초청받지 못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극장의 맨 앞줄부터 꼭대기 층까지 앉아 있는 4천 여명의 청중들에게 동일한 성량과 감동을 전달하는 것은 유명 가수라고 해서 가능한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뉴욕의 팬들은 투란도트에서 각자의 개성 있는 소리가 묻히지 않으면서 다른 배우들과 하모니를 이루어 내는 가수들에게 기립 박수를 보낼 수밖에 없다.    


메트의 주인공 백석종, 전 세계 무대가 그의 매력에 빠지다  


2023년 9월 25일 뉴욕타임스는 ‘우회한 끝에 메트에 도착한 가수(A Singer Arrives at the Met, After a Detour)’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실었다. 바리톤에서 테너가 된 무명 가수가 런던에서 데뷔를 마치고 ‘나부코’에서 이스마엘레로 뉴욕 무대에 선다는 기대감을 피력했다. 지난 2월, ‘투란도트’의 첫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자, 뉴욕타임스는 작품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 역할을 맡은 백석종은 반짝이는 목소리로 배역의 자존심을 드러냈다고 평가하며 아름다운 중음과 다양한 음색으로 기존의 칼라프에게 없었던 우아함과 깊이를 더했다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메트 오페라가 다른 나라 오페라와 다른 점에 대해서 프로덕션 규모가 그 어느 극장보다 웅장하고 뛰어나며 A, B 캐스팅이 없이 각 역마다 최고의 가수들이 캐스팅된다고 말했다. 또한 트란토드에서 리우 역할을 맡았던 알렉산드라 쿠루자크는 이전에도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 호흡을 맞춰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탄탄한 보컬과 뛰어난 연기를 하는 가수라서 상대를 안심하게 해주는 매우 든든한 배우라고 평했다. 

“제가 가장 좋아하고 존경하는 가수 중 메조소프라노, 엘리나 가란차(Elīna Garanča)는 연기, 노래, 카리스마, 태도, 일에 임하는 자세 그 모든 것이 오페라 가수로 완벽합니다. 같은 무대에 서서 바라보면, 저는 그 덕분에 벌써 주인공이 됩니다.”라고 말하며 가수들과의 호흡과 케미가 오페라에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은 폭풍처럼 울리는 관객의 박수 소리를 들을 때다. 또한 극장에서 수십 년간 노래한 합창 단원들의 조언과 칭찬을 받을 때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그에게는 방랑자 같은 노마드(nomad)의 삶이지만, 전 세계 무대는 바리톤에서 테너로 성공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백석종에게 러브콜을 보내고 있다. 


글 양승혜 2010년 미주한국일보 소설 당선으로 등단했다. 뉴욕의 지역 매거진과 방송 기자로 활동했으며 다양한 글을 쓰고 있다. 

사진 제공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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