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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치형 Mar 13. 2020

진짜 눈이 있는 곳으로

아들과 함께 떠난 대관령 여행

어릴 적 어른들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나 어릴 적에는 눈이 한번 오면 허리춤까지 쏟아지곤 했어.” 그랬던 내가 이제 아들에게 같은 말을 한다. “아빠 어릴 적에는 함박눈이 내리면 동네에서 눈썰매도 타고 그랬어.” 그럴 때마다 아이는 “진짜?”라고 하며 두 눈을 반짝거린다.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눈을 실제로 봤다는 아빠의 말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나 보다.


그런 아이에게 눈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작년에도 눈은 오지 않았다. 잠깐 왔던 것 같긴 한데 잘 기억나지 않는 걸 보니 그저 그랬나 보다. 아쉬운 대로 스키장에 몇 번 데리고 갔다. 하지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첩첩산중 온통 갈색빛인데 슬로프만 생뚱맞게 하얀 모습이 왠지 이상했다. 아이에게 거짓말하는 느낌이랄까. 그러던 중 동해에 폭설이 내렸다는 뉴스를 봤다. 검색해보니 대단했다. 어릴 적 동네에서 눈썰매 타던 때보다 훨씬 많이 내렸다. 아니, 어른들이 말씀하시던 그대로였다. 기회였다.



“아빠랑 눈 진짜 많이 오는 거 보고 올까?”     


넌지시 물어봤다.     


“아니. 스키장에서 많이 봤잖아.”     


뜨뜻미지근하다. 좋아할 줄 알았는데. 가짜 눈에서 며칠 놀아보니 생각보다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하긴 스키장에서는 눈사람은커녕 작은 눈 뭉치 만들기도 쉽지 않았다. 인공 눈은 겉으로만 폭신해 보일 뿐 만져보면 옛날 팥빙수에 들어가는 작은 얼음알갱이 같다. 어른이 두 손으로 꾹꾹 힘줘 눌러야만 서로 들러붙는 그런 얼음알갱이. 자기만 한 눈사람을 만들려다 막상 헛심만 잔뜩 빼고 짜증만 한가득 내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짜 눈 말고. 진짜 눈. 아빠만 한 눈사람도 만들 수 있대.”     


일부로 더 호들갑 떨며 말을 이었다.     


“지금 동해에 가면 전부 눈 세상이래. 눈이 너무 많이 와서 하루 종일 눈 치워도 힘들 정도래. 우리도 거기 가서 눈 속에 뛰어들어볼까? 엄청나게 큰 눈사람도 만들고?”


“갈래! 갈래!”


뒤돌아서서 장난감이나 만지작거리며 놀던 아이는 어느새 일어나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늘 높이 쭉 손을 뻗었다. 그만큼 큰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아주 신이 났다.



아이와 나는 짐을 쌌다. 스키장에 갈 때 입었던 옷을 다시 꺼냈다. 이번에는 진짜 눈을 가지고 놀 테니 더욱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고 일러줬다. 아이는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여벌 옷을 더 꺼내왔다. 내복도 두 개, 바지도 두 개, 팬티도 두 개, 양말도 두 개. 그리고 장갑도, 부츠도 두 개. 왜냐면 우리는 엄청나게, 엄청나게 많이 내린 진짜 눈을 가지고 놀 거니까.


추위를 싫어하는 엄마는 집에 남기로 했다. 아이가 몇 번 설득해 보았으나 단호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개학이 연기되면서 아내는 3주째 아이와 함께 집에 갇혀있다시피 했다. 지칠 법도 하다. 그런데 눈사람 만들려고 그 먼 곳까지 간다고? 절레절레. 생각만 해도 관절이 쑤시나 보다.


“아빠랑 간만에 좋은 시간 보내고 와.”


이 멋진 여행에 엄마가 함께하지 않는 것이 못내 아쉬운 아이. 반면 그 멋진 여행으로 조용해질 집 생각에 생기가 도는 아내. 혹시라도 아이의 마음이 바뀔까 싶어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서두르자. 이러다가 눈 다 녹겠어.”


두 시간 반을 달리니 저 멀리 대관령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대 이상의 풍경이 펼쳐졌다. 아이보다 내가 더 신이 났다. 이런 눈은 본 적이 없었다. 여기도 눈. 저기도 눈. 사방이 눈밭이었다. 정상까지 이어지는 비포장도로 양쪽에는 어른 키만 한 빙벽에 이어졌다. 가는 내내 흥분이 고조되었다. 북극 어디쯤인 것 같았다.


목적지에 도착해 풍력발전기 옆에 차를 세웠다. 문을 열고 나가니 바람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하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한달음에 눈밭으로 뛰어들었다. 얼고 녹기를 반복해서인지 눈은 제법 단단했다.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자 이내 발이 푹푹 빠지기 시작했다. 어떤 곳은 내 무릎이 들어갈 정도였다.


굳이 눈사람을 만들 필요도 없었다.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거대한 눈사람이 여기저기 서 있었다. 작은 이글루도 있었다. 아이는 뛰고 구르고 난리가 났다. 아무도 밟지 않은 곳에 첫 발자국을 이리저리 남기기도 하고, 발라당 누워 양팔과 다리를 휘적휘적하며 천사 모양을 만들기도 했다. 스키장의 가짜 눈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하늘과 맞닿은 곳이라 영하에 가까웠지만, 때마침 바람이 멈춰 춥지 않았다. 오히려 한낮의 태양과 눈에 반사되는 빛으로 따뜻했다.



세 시간 동안 쉼 없이 놀고 다시 차로 돌아왔다. 뒷자리를 눕히고 평평하게 했다. 그 위로 요가 매트를 깔자 근사한 침대가 마련됐다. 물 한 모금 시원하게 들이킨 후 휴게소에서 사 온 과자를 꺼냈다. 아이는 두 다리 쭉 펴고 누운 채로, 나는 운전석 등받이를 한껏 젖히고 비스듬히 누운 채로 간식을 먹었다. 선루프를 열자 시원한 바람이 들어왔다. 거대한 풍력발전기에 달린 날개가 ‘훙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오기 잘했다. 그치?”


“응, 아빠 말대로 세상이 온통 눈밭이야.”


“다음에 엄마랑 또 오자.”


“응!”                                   



안치형 / 브런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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