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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지 못해도 괜찮아 by 미친 PD 이석재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

by 그리다 살랑

어차피 이기지 못할 거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결과만 바라면 속물이고 과정을 중시해야 내실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 책을 덮으며 다시 생각한다.


이기지 못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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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은 최선을 다해 열망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한 자에게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브런치에서 '미친 pd'라는 다소 격정적인 이름을 발견했다. 어디에 얼마나 미치셨을지(?) 호기심이 일었다. 클릭하고 들어가니 스포츠와 숨은 이야기들에 대해 술술 풀어내시는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다. 또 다른 글 제목에 '디디에 드록바'란 이름이 낯익었다. 많이 들어봤는데 누구더라. '전쟁을 멈추게 한 진짜 슈퍼스타'. 내가 축구는 몰라도 이 사람의 이름은 알고 있는 이유가 있었구나. 또 다른 글은 '아스널과 토트넘은 왜 원수가 되었을까'였다. 손흥민과 이강인 덕에 새벽마다 축구를 보게 된 후로 이런 배경이야기가 정말이지 궁금했다.


그분의 글이 책으로 나왔다. 영화와 결합한 스포츠 이야기를 담은 「영화로 만나는 우리들의 슈퍼스타」가 그것이다. 각 챕터마다 꿈을 꾸고 꿈을 이루기 위한 - 이루던, 이루지 못하던 - 한 인간의 고군분투와 뒷이야기를 수려한 글솜씨로 알려준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는 앙드레 말로의 말로 시작하는 <슈퍼스타 감사용>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다. 스포츠 영화란 모름지기 위기와 좌절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는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마련인데 이 영화는 '드라마틱한 패배'로 끝이 난다고 한다. (나는 영화를 보지 못했다.)


우리의 꿈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다시 우리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게 처절한 패배를 당하고도 어머니는 마루에서 다시 그의 유니폼을 다림질하고 가족들은 전력분석에 사용하기 위해 피 같은 월급을 모아 비디오 플레이어를 산다. 그게 우리네 인생이다. (중략) 그들 중에 승리한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다시 일어나 승리를 위해 달리는 영화 <슈퍼스타 감사용>은 해피엔딩이다. p 99-100


패배 후 다시 일상을 살아가는 감사용의 인생을 작가는 해피엔딩이라 말한다. 내 삶에도 이룬 것 없어 보이는 패배한 것만 같은 시간이 오래 있었다. 가정환경 탓, 내 탓을 하며 무기력하게 수동적인 시간이었다. 그런데 패배자 같던 그 시간을 견디고 지나온 내가 이제는 대견하기도 하다. 이룬 게 없다 하지만 결혼했고 아들도 둘 낳고 그토록 바라던 해가 들어오는 아파트에 산다. 로망이었던 제주&유럽여행도 다녀왔다. 못 이룬 거 빼고는 다 이뤘다. 늘 뭔가 예술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브런치에 글을 쓰고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며 좋아하는 그림책을 맘껏 꺼내 본다(주로 도서관에서). 영화감독이 감사용의 인생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이게 인생이야"라고 등 두드려 준다면 작가는 이 영화를 통해, 패배했어도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살아가는 우리 삶이 해피엔딩 그 자체라고 말해준다.


오랫동안 꿈을 그리는 사람은 마침내 그 꿈을 닮아간다고 했다. 어린 시절부터 열망하던 내가 뛰놀고 싶은 푸른 들판이 글과 그림임을 알게 되어 행복한 요즘이다. 아직 못 이룬 꿈이 있기에 일상을 다시 살아간다. 저 멀리 보이는 건 아득한 산등성이뿐이지만 꿈이라는 하늘에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김득구와 마라도나의 이야기는 슬펐다. 간절히 원한다고 모두가 가질 수 없고, 모든 걸 가지고도 다 잃은 듯 살 수 있다. 주어진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큰 꿈만을 바랐던 나에게 김득구의 영화 <챔피언> 속 관장님의 말이 마음에 들어온다.


"이긴다는 게 꼭 승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챔피언이다." p 168


내가 패배자 의식에 휩싸였던 건 눈에 보이는 결과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건강이 안 받쳐주고 환경이 안 받쳐준다며 포기했고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 건지 방법을 모른다고 널브러져 있었다. 나는 왜 이 모양이냐며 애꿎은 하나님만 원망했다. 그런데 <우리 생에 최고의 순간> 영화 이야기에서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핸드볼 대표팀을 통해 패배도 그 어떤 승리보다 감동을 줄 수 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p 185


나는 감동을 줘야 했다, 나 자신에게. 감동은 최선을 다할 때 줄 수 있다, 결과가 비록 패배일지라도. 감사용도, 핸드볼 대표팀도 패배했지만 승리했다.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흑거미 레프 야신의 이야기에선 정치와 스포츠의 관련성을 알려 주어 더욱 재밌었다. 정치종교스포츠는 뗼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인 듯 싶다. 뛰어난 골키퍼들을 거미손이라 부르게 된 것도 레프 야신 때문이란다. 작가님은 이런 배경들을 모두 알고 보시니 얼마나 세상이 더 풍성하고 재밌으실까. 혹부리 영감처럼 이야기가 술술 나오는 혹을 달고 계실 것만 같았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나는 작가님이 추진하신 급번개모임에 가겠다고 하고 말았다. 수원에서 종로까지 퇴근시간대에 말이다. 비록 부산에서 올라오신 분 때문에 수원은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미친 pd님에겐 이름이 있었다(당연하다). 게다가 실제 현직 PD 셨다! 그냥 필명인 줄 알았는데. 아무리 본인에게 친근함을 품고 온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생판 처음 보는, 브런치 상에서만 알던 사람들이다. 어색하기 짝이 없을 그 시간 그 공간을 그분 하나 믿고 모인 미친 모임! 작가님은 역시나 이야기보따리라는 혹을 달고 계셨고(?) 그래서 어떤 주제 어떤 이야기 어떤 사람과도 수려하고 편안하게 대화를 이끄셨다. 글 쓰고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살기 위한 내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해 밥을 해놓고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맡기고 나온 평일 저녁이었다. 모임을 먼저 빠져나오며 청계천을 건너 집으로 돌아가는 광역버스에 올라탔다. 상기된 볼로 좌석에 앉으며 나는 중얼거렸다.


어색했지만 괜찮아.

용기 내어 와 보길 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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