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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주 Nov 23. 2024

좀 더 나은 사람

그래도 시간아 빨리 가라

작은 영어 학원에서 일한 지 벌써 12년째다.

하루 한 시간 아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는 일상이지만 그간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그중 나를 자라게 만든 제자들이 몇 있다.

아이들과 처음 만난 때는 그들이 6살 때였다.

아기 같던 아이들이 초등학생이 되었고 더 이상 우리 학원 시스템 아래 있을 수 없게 된 때는  그들이 14살 되던 해였다.

무려 8년이라는 세월을 함께 보냈고 나무처럼 쑥쑥 커가며 나와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자란 아이들과 헤어져야 하는 과정은 눈물 없이는 힘들었다.

사교육을 하는 곳이니 선택은 언제나 학부모들의 몫이기에 전원 하는 아이들을 허다하게 본다.

하지만 오랜 기간 믿어 주신 학부모님과 아이들에 대한 고마움은 늘 가슴 한편에 담아 두고 살고 있다.


분명  아이들은 얼마 안 가 길거리에서 나를 만난다 쳐도 어색해할 것이다. 지금 쯤이면 나를 일도 생각 안 할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이를 먹으면 나를 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마지막 수업이 있던 날

작은 종강 이벤트를 하며

나는 이 녀석들을 위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리라 다짐했다. 작고 귀엽기만 한 아이들이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나를 믿고 따라와 줬으니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뭔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되어 보자 하는 다짐에 이르렀다. 제자들이 나를 키운 셈이었다.



얼마 전

숙제를 며칠째 안 해 온 A에게 남아서 숙제를 하라고 했다. A는 내가 본인에게 남아서 숙제를 하고 가라고 한 반강제적 요청에 불쾌감을 감추지 못했다. 결국 들고 있던 빨간색 볼펜으로 본인의 책을 찢고 말았다.

나는 사실 화가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A 역시 그간 만난 다양한 아이들 중 하나이고 얼마 전에도 비슷한 일로 A의 엄마와 통화한 적이 있기에 화라는 감정에 도달했다기보다는 일 하는 과정 중 생겨난 이벤트쯤으로 생각했다. 내성이 생긴 거라고나 할까?

이 일로  A의 엄마와 다시 통화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잘 키워 보고자 노력을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게 자식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차분한 A의 엄마도 아이의 불쾌감을 표현 방법이 도를 넘어가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얼마 전 비슷한 일로 A의 엄마와 통화 후 다음날 A가 내게 와서 사과하는 일도 있었다.


이런 경우 오은영 박사님이라면 아이 내면의 문제를 찾고자 부모를 겨냥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양육의 방식은 천차만별이다. 환경과 아이의 특성에 맞게 아이를 잘 기르고자 어느 부모 할 것이 없이 노력한다. 하지만 아이는 타고 난 대로 자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개똥 같은 환경에서도 잘만 크는 아이가 있는 반면 반대의 경우도 허다하게 본다.

상처 투성이인 주변 환경에서도 아픔을 잘 숨기고 크는 아이가 있는 반면 상처를 속절없이 드러내며 알아주기를 바라는 경우 역시 본다.

아이는 알 수 없다.


얼마 전 아들이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공부를 못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엄마는 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더러 늘 극단적으로 안 좋은 것만 얘기한다고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건 인정하지만 공부를 왜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게 아이의 말이었다.

공부를 해 보기라도 하고 저런 말을 하면 힘들어서 그렇구나 이해를 해 줄 만도 하지만 그 역시 아니었다.

나는 가슴이 답답했다.

왜냐하면 내 자식이 이런 말을 하는 아이로 자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침에 눈을 뜨면 내가 죽기 직전의 노인이 되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이란 게 좋을 때는 한 없이 좋다가 한 순간에 사람을 낭떠러지로 밀어 버리는 재주가 있다.


부모라도 본인의 아이를 다 알지 못한다.

아이는 생긴 대로 태어나 생겨먹은 대로 사는 존재라는 생각도 해 보았다.


나는 그날 분노에 책을 찢은 A의 엄마에게 끝내 전화를 하지 않았다. A의 엄마 역시 아이를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음이 미루어 짐작이 되었기에 전과 비슷한 일로 통화하는 것을 피했다.

대신 나는 A를 좀 더 품어 보기로 했다.

그러다 이 시기가 지나면 A 역시 좀 나은 사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들이 하는 다양한 쌉소리 역시 좀 더 나은 어른이 되기 위한 과정일 것이다.

그렇게 믿어 보자.


그래도 시간아 빨리 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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