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실천의 위력
'B Rossette의 날카로운 바이올린 선율이 온몸의 전율로 바뀌는 순간'
2003년 MBC에서 방영한 의학드라마 '하얀 거탑'에 대한 총괄적인 느낌이다. 일본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메디컬 드라마는 당시 주인공이었던 '장준혁' 역할을 맡은 김명민이라는 걸출한 배우를 발굴했을 뿐 아니라 여러 조연들의 개성 있는 연기로 인해 많은 대중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걸로 기억된다. 또한 15년이 지난 2018년에 리마스터 버전이 재방영될 만큼 시대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스토리나 배경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여전히 메디컬 드라마 중 걸작으로 꼽힌다.
이전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주로 선악 구조가 명확하면서 권선징악으로 끝나는 뻔한 이야기였다면, 하얀거탑의 스토리 구조는 직장인들이라면 흔히 공감할 수 있는 야망남들의 이야기이다. 이전 드라마들은 주로 남녀 간의 러브스토리가 주된 스토리였던 반면에, 하얀거탑에서는 학연-지연에서 시작되는 사내 줄타기 및 첨예한 갈등과 대립, 그리고 다채로운 경쟁 관계가 메인 스토리이다. 일단, 주인공부터 선악이 불분명하면서 입체적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실력 있고 야망 있는 외과의사지만 어찌 보면 차가울 수도 있는 입체적인 주인공으로 묘사된다. 이외에도 다른 많은 조연들이 모두 주변에 흔히 볼 수 있을법한 유형의 입체적 인물들이라 직장인들 사이에서 크게 인기를 끌었던 듯하다. 극 중 장준혁 과장은 후반부로 갈수록 과장 자리에 대한 탐욕과 동시에 점점 나빠지는 건강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연민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큰 스토리라인이 중간중간 전환되면서 드라마가 이어지는 내내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첫 번째로 주목한 인물은 부원장 역할을 맡은 우용균 (김창완)이다. 그전에 가수로 알고 있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중간 관리자 역할을 매우 잘 소화해 내었다. 극 중 우용균은 한국 사회에서 직장 다니다 보면 정말 한 번쯤은 마주칠 것 같은, 그런 분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상사와 치고 올라오는 부하 직원 사이에서 넌지시 말을 에둘러하는 그런 화법과 함께 우용균의 한쪽 치켜든 눈썹과 비스듬히 쳐다보는 시선으로 대본에 없는 부분까지 적확하게 표현해 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조연들의 연기가 뒷받침되었기에 과장직을 두고 다투는 메인 스토리에 더욱 집중할 수 있지 않았나 싶다.
두 번째로 내가 주목한 인물은 장준혁의 보조 인물로 그려진 홍상일이다. 그는 평소 차분한 성격으로 장 과장의 보조를 맞춘다. 그는 많은 부분은 아니지만 존스홉킨스 출신인 노민국 (차인표) 과의 수술 배틀 과정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록 수술 실력은 장준혁에 비해 부족한 걸로 설정되어 있고 극 중 역할이 제한적이지만, 장준혁이 투병 후 자연스럽게 이인자로 올라서면서 마지막에 과장직을 인수받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과정이 드라마의 주제는 아니지만 우리네 인생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있음을 종종 느낀다. 꼭 무엇을 잘해서 그 자리에 있다기보다는 그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있게 되는 경우다. 뭔가 대단한 각오를 갖고 시도를 하기보다는 작은 습관이 그 사람됨을 만든다. 꼭 대단한 프로젝트를 가져야만 결실을 맺기보단 일상의 작은 실천이 모여 큰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가 또한 그렇다. 이런 작은 실천 (혹은 습관)은 겉보기에는 두드러져 보이지 않지만 그만큼 부담이 없기 때문에 꾸준히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고 방향만 옳다면 시간이 좀 더 걸릴지라도 결국 목표지점에 도달하고야 만다. 드라마 내내 보이는 극적인 에피소드를 통해서 장준혁이 과장직이라는 목표를 이룬데 반해, 홍상일은 그냥 그를 이인자로서 무난히 보좌하면서 결국 과장직에 부드럽게 안착한다. 살다 보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은 반면, 기대하지도 않은 목표가 어느새 성큼 다가오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는 효율성에만 급급한 나머지 방향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았는지 되물을 수밖에 없다. 제대로 된 방향 혹은 자신의 가치관과 부합하는 목표 설정만 이루어졌다면 부담 없는 선에서 오래만 유지한다면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다.
대단한 글을 쓰기는 어렵다. 어렵다 보니 큰 마음먹고 쓰려하고, 그러다 보니 머뭇거려진다. 글쓰기도 부담이 없이 작은 실천이 되어야 오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방향이 정해진 만큼 매주 하나씩이라도 작지만 꾸준한 습관이 되도록 스스로를 다잡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