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었다.
인간의 존엄이 극한적으로 박탈당하는 상황에서도 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책으로 오랫동안 스포당해 왔는데, 내게는 다른 부분들이 더 크게 다가왔다.
내가 오랫동안 회피해왔고, 최대한 계속 회피하고 싶었던 삶의 pain point들을 정곡으로 찔렸다고 해야할까.
자유의지와 책임감 vs 익명성과 자유의지 상실
로고테라피에 따르면, 인간 존재의 본질은 "책임감"을 통해 정의될 수 있다.
누군가 나를 모성이 강한 엄마라고 표현하면 거부감이 드는 반면, 책임감이 강한 엄마라고 표현하면 그나마 수용하기 쉬울 정도로 책임감이라는 단어에 동의해왔기에, 책을 읽으면서 어찌나 공감했는지 모른다.
모성을 떠나서도 인간으로 내가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가면서 저지르는(?) 모든 일에 대해 얼마나, 어떻게 책임지느냐가 인간으로서의 완성도(?)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믿는다.
그만큼 책임감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나에게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동의어였는데..
다만, 그 책임감이 나 스스로의 구원에만 적용되는 것이었지, 상대방, 더 나아가 세상에 대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내가 태어나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까지 부정적인 건 아니지만, 인구가 이미 포화상태인 지구상에서 '의미'를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말과 행동이 지구의 물리적 & 정신적 오염에 일조한다는 생각 때문에 세상과 무언가를 주고받는 행위를 최소화하고 싶었다.
어차피 먼지 한 줌에도 지나지 않는 존재인 걸 머리와 마음으로 넘칠 정도로 알고 있지만, 할 수만 있다면 최소한의 존재감으로 존재하다 사라지고 싶었다.
오랜시간 동안 나의 정체성이었던 이런 삶에 대한 태도가, 코로나 이후 자본주의 빨간 약을 먹고 폭등한 자산 시장에 불나방처럼 뛰어들어 겪게 된 시행착오를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탑재해야 하는 태도와 완전 상충된다.
머리로는 생산자가 되어 나를 드러내고 나를 팔아야 한다고 나를 몰아가지만(?), 아직도 여전히 마지막 방어기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부끄럽지만, 그동안 내가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았던 데에는 세상에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지만, '시선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책임지지 않을 자유'의 달콤함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데, 자존감을 위해 책임을 지자니 나를 드러내야 하고, 나를 드러내지 않으려니(=최종 책임을 지지 않으려니) 주체성과 자유 의지가 훼손되었다.
- 나를 드러내지 않되 책임도 지지않는 옵션
- 나를 드러내고 책임도 내가 지는 옵션
선택과 그에 따른 책임은 나의 몫인건데, 자기계발 씬에서 몇 년을 굴러먹었으면 인생 후반부를 생각한다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해야 하는 게 옳다. 아마, 책임지는 만큼 자유도 많이 누릴 수 있을거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나를 드러내기 싫은 나'와 싸우고 있다.
이렇게 찌질한 나의 모습을 드러내는 이유는 나의 한계, 단점, 밑바닥을 아예 인정해버리고 나면, 더 이상 그게 한계, 단점, 밑바닥이 아니게 되는 경험을 여러 번 했기 때문이다.
책에서도 "고통스러운 감정은 우리가 그것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묘사하는 바로 그 순간 고통이기를 멈춘다"고 말한다.
나에게는 드러내기 싫은 나를 드러내고 사회적 존재로서 나의 사회적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는 선택을 하는 것이 내가 컴포트존을 탈피하고자 한다면 피할 수 없는 시련이자 고통일 수 있다.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이다.
또한, 지금 불편하고 어려운 선택을 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옳은 선택이다.
내가 뿌린 모든 씨앗에 대한 책임은 내가 진다.
즉, 빅터 프랭클이 말하는 '책임감'은 '자기결정권'의 동의어이고, 로고테라피에서의 '의미'는 '회복탄력성'과 동의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