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증명하지 않을 용기

'미움받을 용기'를 읽고

by 남강현

아들러의 심리학은 한 마디로 "00할 용기"로 정의할 수 있다.


책의 곳곳에서 저자는 "00할 용기"라는 표현을 통해 소위 말하는 '통념'의 허점을 찌르고, '상식'의 반전을 제시하며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으로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관점과 태도"를 정립할 것을 주장한다.


책을 읽고 느낀 점, 내 삶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 혹은 반박(?)하고 싶은 생각들에 대해 "00할 용기"라는 표현으로 몇 가지 정리해 본다.



1) 선글라스를 벗을 용기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면 된다. 그런데, 이거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내가 선글라스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자각했다면, 그걸 벗으면 된다.


다만 어려운 것은, 선글라스를 벗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내가 나만의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음을 '인정'하고 벗을 '결심'을 하기까지의 과정을 견디는 것이다.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걸 지금까지 세상 탓하며 잘(?) 살고 있었는데,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2) 타인을 '신뢰'할 용기


책에 따르면 행복의 3가지 조건은 자기수용, 타자신뢰, 타자공헌이다. 나는 자기수용까지는 그럭저럭 되는데, 타자신뢰와 타자공헌은 아직 좀 어려운 것 같다. 나를 드러내면 나와 결이 비슷한 사람과 서로를 발견하게 되고, 그렇게 코드가 비슷한 사람끼리 연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부족하다.


누군가 그런 일을 대신 하는 사람을 통해, 그 사람이 세운 진입 장벽을 넘고 나서 같은 길을 통과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필터링'을 거쳤다는 유대감을 갖게 된다. 인간관계에서 나만의 확고한 가치관으로 필터 역할을 하는 사람은 커뮤티니를 만들고 리더가 된다.


커뮤니티와 네트워크.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에 '관계'가 생존의 필수조건임을, 이제는 머리뿐만이 아닌 마음으로도 이해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부터 오랜 기간에 걸쳐 형성된 나의 'modo de vida(삶의 태도)'는 아무리 매운 자기계발서를 읽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필터를 거치지 않은 무작위, 불특정 다수에 대한 타자신뢰가 어려운 기저에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테고, 이는 곧 '용기'를 내지 못한다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필터'가 될 용기.


이 '필터'가 다른 말로는 브랜드, 혹은 퍼스널 브랜딩일텐데.


브랜딩이라는 것이, 내가 지향하는 가치관이 삶의 전반에 걸쳐 차고 흘러넘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인데, 지금의 나에게는 내면을 가득 채운다거나 삶의 방향성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분명한 무언가가 없을 뿐더러, 여전히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성향과 부단히 싸우는 중이다 보니, 이런 부분이 '타자신뢰' 혹은 '타자공헌'이라는 가치와 만나면 더욱 나를 움츠러들게 하는 것 같다.


책을 읽으면서 나에게 가장 힘든 과제라 여겨졌던 부분은 '자기에 대한 집착(self interest)'을 '사회적 관심(social interest)'로 바꾸는 것'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아들러의 정의 및 맥락과 좀 다르기는 하다. 나는 남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에 별 관심 없고, 남 눈치를 별로 보지 않는 편이며, 내가 세계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도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아들러에 따르면 타자공헌은 '자기 희생이 아니라, 나의 가치를 실감하기 위한 행위'라는데, '브랜딩 하고 싶은 페르소나(?)'가 없으니 그걸 찾는 게 먼저라는 생각에 나에게 집중해야 한다는 강박적인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타자공헌을 하다보면 그런 나를 발견하게 되거나 만들어 가게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싶은 생각도 들긴 한다.


그런데,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스스로 '덜 굶었구나..' 싶은 부분은 '나의 가치를 굳이 실감해야 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는 사실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타인으로 인한 '행복'이나 의 유의미한 '개선'을 느낀 경험이 손에 꼽게 적고, 오히려 타인과의 관계는 거리가 있을수록 '쾌적하다'고 느끼다보니 서로의 삶에 영향을 줄 정도로 개입하고 개입당하는 게 싫어서일 수도 있다.


즉, 나의 가치가 A라는 사람이나 커뮤니티를 통해 증명되었더라도 B라는 사람이나 커뮤니티에는 그만큼의 가치나 의미가 아닐 수 있고..결국, 나라는 사람에 대한 가치도 B가 받아들이기 나름아닌가 싶은거다. 내가 어디까지 얼마만큼 개입을 하더라도 말이다.


그냥 나는 본질적으로 '나는 나, 너는 너' 스탠스다..ㅠ (이런 부분에서만큼은 아들러의 '테제'가 아닌 '안티테제'를 아주 잘 수행해 왔다.)


나를 세상에 증명하지 않을 용기.

나를 브랜딩하지 않을 용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용기'는 정말 세상물정 모르고 굶어죽기 딱 좋은 철부지의 객기인 것일까..ㅠ



3) 고르디우스의 매듭

나에게는 '나를 드러내고 싶지 않은 성향'과 '자본주의 (호명) 사회에서 나를 팔아 나를 먹여살려야 하는 핵개인의 숙명' 간의 딜레마가 고르디우스의 매듭이다.


매듭을 풀지 않고 끊어낼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를 가지기 위해서 열등감 콤플렉스가 아닌 건전한 열등감이 필요한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