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테리어와 스페인어의 공통점

by 남강현

인테리어로 커리어 경로를 바꾸기로 하면서, 남들보다는 오히려 스스로의 편견을 넘어서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내가 이래도 돼?'라는 심리적 장벽은 생각보다 너무 크고, 단단하고, 높았다. (오히려 타인은 관심없음) 그 때부터 커리어 경로가 급격하게 바뀐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적극적인 공감과 인정을 통해 스스로를 수용해 왔던 것 같다.


다이내믹한 커리어 반전의 역사를 지닌 사람들을 볼 때마다 위로(?)를 받기도 하고 스스로 합리화(?)한다는 느낌이 들 때면, 아직 스페인어로 통번역대학원씩이나 나와서 전공을 제대로 못 살린 게 스스로 완전히 용서(?)되진 않았나 싶기도 하다. 아니면 너무 많이 사랑했어서 아직도 아쉬움이 남거나.


그런데, 이건 진짜 변명도 핑계도 나중으로 미루는 말도 아니고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렇게 젊은 시절을 쏟아부었던 스페인어 덕분에 뭔가 믿는 구석이 하나는 있다는 것이다. 노후에 몸쓰는 일을 못하게 되었을 때에도 재미나게 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 하나는 이미 확보해 둔 것 같은 기분.


지금도 막강한 생성형 AI 도구들 덕분에 대량 문서 작업 과정의 효율성이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가고 있다. 그래서 30년 후의 책 번역는 누가 어떻게 해줄지 모르겠지만, 막연하게나마 책상 앞에 앉아 이 단어는, 이 맥락은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말을 어떻게 만들어낼까..를 즐겁게 고민하고 있는 내 모습, 혹은 햇살 가득한 조용한 서재에서 커피와 다과를 곁들이며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는 분위기 좋은 스페인어 노래의 가사를 음미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다.


내 행복한 노후의 배경이 되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바로 인테리어와 스페인어인 것이다.






인테리어와 스페인어는 겉으로 보기에는 공통점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때나 전공은 스페인어인데 지금 하는 일은 인테리어라고 하면 따라오는 다소 의외라는 반응들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의외로 '남들 보기에 튀지 않는 삶의 이력'에 민감한 모양이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는 모든 것을 나만의 기준으로 새로 연결하는 시대, '있는데 발견하지 못한' 접접을 찾는 시대가 아니라, '내가 기존에 없던 접점을 새로 만들 수 있는' 시대니까.


좋아하는 두 가지로 삶을 풍요롭게 행복하게 살기 위해 인테리어와 스페인어의 연결 고리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 수 있을까..를 항상 생각하려고 한다.


일례로, 인테리어와 스페인어는 겉으로 보기에 전혀 상관없는 두 개의 점인 것 같아도, 본질적인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진입장벽은 낮은데, 공부할수록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외국어는 저마다 특성이 있는데, 초반에 배우기 어렵지만 처음에만 좀 고생하고 나면 이후에 배우기 수월한 언어가 있고 반대로 처음에는 배우기 어렵지 않으나 깊이 들어갈수록 어려워지는 언어가 있다. 스페인어는 후자에 해당한다. 여행용, 간단한 회화용으로만 배우면 무척 신나고 즐겁고 매력적인 언어다. (사전 중 발음기호가 없는 외국어 사전은 아마 스페인어가 유일할 것이다. 그만큼 발음하기가 쉽다.)


영어와 유사한 단어도 많은데다, 강세 표시, 특수 문자 종류, 문법 등 여러가지 면에서 스페인어와 유사한 다른 로망스 어들과 비교해도 배우기 수월한 편이다. 하지만, 배우는 수준이 올라갈수록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많은 철학적인(?) 시제 등 문법 구조와 스페인어권의 문화적 사회적 가치관 등이 깊이 베어있는 언어습관 등으로 인해 많이 어려워진다.


인테리어도 마찬가지다.


일반적으로 인테리어는 '방이나 집과 같은 공간을 예쁘게 꾸미는 행위, 혹은 도배, 장판, 페인트 등의 마감재를 바꾸는 행위' 정도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이 정도의 인테리어만 해도 결코 쉽지는 않다. 하지만, 일반인이 전문가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비교적 쉽게 해낼 수 있는 행위이다.


그렇게, 홈데코나 소소한 마감재 변경으로 시작해서 공간의 분위기가 확 달라지고, 단순히 '예뻐졌다'는 느낌을 넘어 그 공간에서의 공간 경험의 질이 상승한다는 것을 경험하고 나면 인테리어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그러다보면, 단순한 마감재 변경에서부터,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전기와 설비 등 마감재 시공 이전에 완료되어야 하는 어려운 부분의 시공 디테일, 나아가서는 공간의 동선, 용도 등에 따른 공간 기획을 하기 위해 돌아보아야 할 나와 가족, (상가라면 타겟 고객층, 공간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브랜딩 컨셉 등) 점점 공간과 나에게 대한 근본적이고 본질적 문제까지로 고민의 범위가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인테리어는 단순한 공간 디자인이 아닌 삶을 디자인하는 문제이다.






어쩌면, 인테리어와 스페인어에만 국한된 공통점이 아닐 수도 있다. 삶의 모든 요소는 내가 원하든 원치 않든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내 삶을 디자인한다. 어떤 요소가 되었든 내 삶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내가 인테리어, 공간과 관련하여 좋아하는 표현이 있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되 누추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뜻인데, 공간이 추구할 수 있는 궁극의 가치를 나타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검이불루 화이불치는 삶에도 적용하고 싶은 가치로, 공간에 대한 예민하지만 포용적인 감각과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넓혀주고 해상도를 올려줄 외국어 중 하나인 스페인어를 통해 삶을 딱 '검이불루 화이불치'로 가꿔나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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