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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Aug 24. 2021

어쩌다, 공연기자

안될게 뭐 있어


“제가 이번 인사에서 꼭 문화부에 가야할 이유는….”


아침부터 노트북 작업표시줄 위로 MSN 메신저 알림이 쏟아진다. 각 부서 동료기자들이 보낸 메시지. 요는 새로 취임한 편집국장이 편집국 새 판을 짜기 위해 소원수리를 받는다는 것. 때 아닌 인사소식에 가슴이 요동친다. 드디어 지긋지긋한 정치부 탈출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억지로 먹는 폭탄주도 싫었고, 정치 분야는 도통 재미가 없었다. 



그런데 대체 어느 부서를 지원한단 말인가. 사회부는 이미 첫 부서로 경험했으니 패스. 산업부도 구미가 당기지만 이미 선배들이 포진해있어 접근 불가. 국제부는…. 영어 울렁증이 있어서 자격 미달. 체육부 역시 남자 기자들로만 구성돼 있어 왠지 금녀의 구역 같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를…. 고민 끝에 용기를 내어 감히 ‘문화부’는 어떨까라는 도전의식을 끄집어냈다.
 

한때 시쳇말로 ‘빠순이’로 불리며 팬질도 해봤고, 2박 3일 날 새며 드라마 몰아보기 ‘정주행’쯤은 거뜬히 해내는 인간이 바로 나 아닌가. 야심에 찬 계획을 주변 친한 선배들에게 고백하니 돌아온 답은 한결같았다.


“야, 문화부 대기번호 200번까지 있대. 꿈 깨”


다들 안 된다 하니 괜한 오기가 생겼다. 자취방서 대학교 4학년 시절 입사지원서를 쓰던 절박한 심정으로 ‘본 기자가 문화부를 가야할 이유’ ‘문화부에 가서 타지와 차별화된 각종 기획 기사 등을 쏟아내겠다는 포부’ 등을 써내려갔다. 무려 A4 용지 5장 분량. 항목별 키워드는 글자크기를 24포인트로 키운 뒤 색깔도 넣었다. 편집국장에게 이메일로 소원수리를 접수했다. 내가 쏜 화살은 이미 날아갔다. 화살을 어느 과녁에 꽂아주느냐는 편집국장의 몫일 뿐. 


몇 주 뒤, 사내 인트라넷 망에 인사가 떴다.

<명> 문화부 김아무개 기자.


“꿈은 이뤄진다”는 2002년 월드컵 캐치프라이즈, 바로 이럴 때 써먹으라는 걸까. 자축을 시작하기도 전 눈앞에 노트북 화면에선 MSN 메시지 알림이 번쩍번쩍 반짝였다.  



“야, 너 뭐야. 대체 어떻게 선배들 제치고 문화부에 간 거야.”
“비결요? 글쎄요…. 선배 저 사실 국장한테 소원수리 5장 썼어요.”
“야 소원수리는 원래 세줄 아냐? 이거 진짜 또라이네 또라이야”



훗날 편집국장이 인사 후일담을 전해주며 이런 말을 남겼다. "저 새끼 무슨 소원수리를 다섯 장이나 썼어. 문화부 안보내주면 죽겠다고 덤빌 것 같더라고.” 비록 또라이 소리를 들었지만, 목표한 바를 이뤄 기뻤다. 


문화부 발령 첫날, 카리스마 넘치기로 유명했던 문화부장 앞에 섰다. 문화부 내엔 출판, 방송, 가요, 미디어, 연극, 뮤지컬, 클래식, 국악, 학술, 문화재 등 다양한 출입처가 존재한다. 부장이 내게 준 출입처는 ‘연극, 뮤지컬, 국악 1진. 그리고 방송-가요 2진’. 방송과 가요는 1진 선배가 있다 쳐도 연극-뮤지컬-국악 이른바 ‘공연’이라 불리는 출입처는 오롯이 나의 몫이었다. “평소 공연 좀 봤느냐”는 부장의 질문에 용감하게 답했다. “앞으로 열심히 보겠습니다.”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문화적 소양으로 따질 때 편집국 기자 중 완벽한 ‘흙수저’였다. 고향은 강원도 태백, 일명 ‘태백커’. 초중고 학창시절을 모두 태백에서 보냈고, 대학입학을 기회로 서울에 입성한 자가 바로 나였다. TV 프로그램 외엔 미술전, 연극, 뮤지컬, 발레 등 우아한 문화생활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자가 된 뒤에도 사회부 경찰기자, 정치부 외교안보기자, 정당기자를 거친지라 ‘문화’와는 더더욱 낯선 존재였다. 그나마 접했던 뮤지컬은 대학교 1학년 시절 당시 남자친구가 MBC 라디오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 선물로 받은 티켓으로 관람한 ‘페퍼민트’가 유일했다.


 왠지 모를 자신감이 가슴속에 존재했다. 돌이켜보면 ‘무식하니 용감하다’는 말이 제격이다. 공연 1막과 2막 사이 ‘인터미션’이란 휴식시간이 있다는 것도 공연기자가 된 뒤 처음 알았다. 고백컨대 ‘공연무식자’였다. 하지만 모든 게 생소하면서도 좋았다. 모르는 게 많다보니 일단 ‘양’으로 승부했다. ‘결혼 안한 혼자 사는 솔로 여기자’라는 충분조건 덕분에 퇴근 후엔 무조건 공연장으로 향했다. 


참 묘했다. 일로 보는 공연이지만, 배우들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가슴이 뛰었고, 엉키고 엉킨 실타래 같던 감정들도 하나둘 풀렸다. 어떨 땐 주인공 대사, 상황, 감정에 이입돼 객석에 앉아 하염없이 러닝타임 내내 울고 나온 적도 있었다. 


그렇게 소원수리 5장으로 시작된 ‘공연’과의 인연은 기자로서, 한 인간으로서 삶의 방향을 많이 바꿔놓았다. 직장인들에게 ‘이혼’과 버금가는 스트레스를 안겨준다는 ‘이직’ 역시 공연 덕분에 가능했다. 2년간의 문화부 생활을 뒤로하고 사회부 경찰청을 출입한 뒤 서울시청을 거쳐 산업부 부동산 기자로 일할 때였다. 


“OO일보 문화부에서 경력기자를 뽑는데 관심 있니?”

OO일보라…. 첫 직장인 △△신문과는 청계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마주보고 있는 곳이었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이직의 마음을 굳힌 건 다름 아닌 ‘문화부’라는 부서 때문이었다. “어쩌면…. 다시 내가 공연기자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 하나로 소원수리를 쓰던 그때의 절박함을 상기시키며 입사지원서를 써내려갔다. 그리고 세 번의 면접을 거쳐 이직에 성공했다. 이 모든 게 다 소원수리 5장으로 시작된 인연 ‘공연’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배웠다. "안될게 뭐 있어? 부딪혀 보는거지." 아님 말고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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