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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ylvia Apr 06. 2021

나의 부캐 탄생기

미스 문의 만우절 쇼

교실에  들어선 어느 날 아침, 공기가 이상했다. 봄 공기는 상큼했지만 아이들 분위기는 시큼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별일 아니겠지 하며 아침 조회를 위해 다 같이 일어났다. ‘O Canada’ 국가가 끝나고 보통 때처럼 앉으라고 하니 묵묵히 시위하는 듯 서 있는 아이들. 당황했다. 코로나 때문에 마스크를 끼고 있으니 아이들의 표정을 읽기가 몇 배는 힘들어져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단체로 이렇게 화낼 일이 뭐가 있는 거지? 아침에 있는 수학 테스트가 이렇게 시위를 할 만큼 스트레스받을 일인가? 혹시 내가 무슨 잘못을 했나 싶어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10분이 일주일 같았던 아침 조회가 끝나니 그제야 아이들은 약속을 한 것처럼 일제히 앉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아이들에게 물었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누가 설명해줄래? 너네 수학 테스트 때문에 그러는 거야??” 


묵묵부답. 


다시 한번 물었지만 돌아온 건 서먹서먹한 침묵뿐이었다. 화가 슬슬 올라왔다. 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나를 철저히 무시하는 건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어지러운 마음을 겨우 다스리며 수업을 시작하려고 칠판으로 갔다. 하루 일과를 쓰려고 하니 그제야 내 눈에 들어온 오늘 날짜. 4월 1일. 아, 오늘 만우절이구나. 그럼 이게 만우절 장난이라는 거야? 당황했던 마음이 순식간에 황당으로 바뀌었다.


“너네 지금 이걸 만우절 장난이라고 한 거니? 이게 장난처럼 느껴져?” 


차라리 처음 물어봤을 때 “선생님~April Fools!”라고 말했으면 장난이라고 받아 들었을 텐데 끝까지 장난 같지 않은 장난으로 나를 골탕 먹이려고 했다니 웃음보다는 뚜껑이 먼저 열릴 판이었다. 이건 선을 넘은 거 아닌가. 학생들도 내가 화가 났다는 것을 느꼈는지 어느덧 교실에는 북극 바람이 휘휘 불어왔다. 아이들을 혼내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우리 모두 코로나 때문에 힘들잖아. 이거는 한바탕 거~하게 망친 장난이었다고 치자. 


우여곡절 끝에 아침 수업은 끝났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기분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만우절 조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애들한테 확실히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퍼뜩 떠오른 아이디어를 휘리릭 정리하고 머리에서 시뮬레이션을 돌려봤다. 내 계획이 먹힐지 확신이 서지는 않았지만 일단 한번 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시작된 오후 수업. 학생들에게 오늘 할 일을 다 끝내면 스토리 타임이 있을 거라고 말했다. 가끔 남는 자투리 시간에 책을 읽어주거나 내 개인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는데, 학생들이 좋아하는 시간이다. 과제를 안 해도 되니깐. 이 말에 눅눅하게 피곤해 있던 아이들의 눈에서 빛이 났다. 대부분 학생들은 스토리를 듣겠다는 집념 아래 보통 때 보다 더 집중해서 할 일을 끝냈다. (앞으로 종종 이 시간을 미끼 삼아야겠다.) 스토리 타임이 되었고 마스크 너머로 학생들의 반짝이는 표정이 느껴졌다. 머릿속에서 세팅을 마치고 근엄한 표정으로 만발의 준비를 한 뒤, 만우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점심시간에 오후 수업을 준비하던 중이었어. 갑자기 문자 메세지 벨이 울리는 거야. 남편이겠지 하고 체크를 했는데 오마이, 세상에… 말도 안 돼. 내 쌍둥이 동생인 거 있지.” 


“네? 선생님 쌍둥이였어요?!?!” 


헉! 하고 놀란 학생들의 숨소리가 교실을 가득 메웠다.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몇몇 학생들 조차 몸을 꼿꼿이 일으켜 세우고 다음 이야기를 기다렸다. 후훗. 넘어왔군. 만우절 스토리가 먹혔다는 생각에 시종일관 진지한 얼굴을 유지한 채 스토리를 계속 이어나갔다. 


“응, 너희들한테 말은 안 했지만 사실 나 쌍둥이야. 내가 쌍둥이 여동생에 대해서 얘기를 잘 안 한 이유는 우리 사이가 별로 안 좋거든. 걔랑 말 안 한 지 한 3년 되었나? 나랑 너무 많이 싸워서 걔는 아예 다른 나라로 가서 살아. 지금은 파리에서 살고 있어.” 


아직도 내 얘기에 의심을 품은 몇몇 학생들이 동생의 이름을 물었다. 


“소피. 소피 문. 우리 어렸을 때는 걔는 춤을 추고 나는 랩을 하고.. 정말 어마 무시한 자매였지. 사람들이 우리가 크면 분명 한 건 한다고 했었어. 커가면서 점점 사이가 멀어져 슬펐지만 어떡하겠니. 우리 둘은 서로의 적 인걸. 사이가 나빠질 대로 나빠져서 오랫동안 연락을 안 하고 지냈는데 얘가 오늘 갑자기 문자를 보낸 거야. 이제 화해하자면서. 그런 의미에서 나를 웃기고 싶다며 자기가 춤춘 영상을 보내줬는데 세상에 마상에, 이 영상이 웃겨도 너무 웃긴 거 있지. 그래서 너희들한테 보여줘도 되냐고 물어봤더니 그렇게 하래. 어차피 자기가 볼 애들도 아니라 상관 안 한다면서. 어떤 영상인지 한번 봐 볼래?”


이야기를 마치니 대체 내 쌍둥이 동생이 누구냐며 빨리 보여달라고 재촉한다. 내 계획에 넘어왔다는 뿌듯한 생각에 웃음이 났지만 최대한 정색하고 (이럴 때 마스크가 유용하다) 나의 만우절 프로젝트 영상을 보여줬다. 몇 개월 전 이날치 밴드의 ‘범 내려온다' 노래에 맞춰 혼자서 신나게 춤을 춘 영상이었다. 검은 스크린이 없어지고 선글라스를 끼고 모자를 쓴 내가 어깨를 들썩이는 것을 보자 학생들의 함성이 터졌다. 


“오 마이 갓~~~ 이거 선생님이잖아요!!” 


“아니거든? 이거 소피야. 잘 봐봐.” 


몇몇 학생들은 아직도 진짜 소피인가? 하며 갸우뚱했다. ‘미스 문이랑 되게 닮았네’ 하는 표정을 짓는데 웃겨서 혼났다. 끝까지 참으려 했지만 오징어처럼 흐느적거리는 내 춤사위를 보고 있자니 결국 웃음이 터져서 April Fools!라고 외칠 수밖에 없었다. 폭소가 폭죽처럼 우후죽순 터졌다. 


사람을 낚으려면 이렇게 낚는 거란다, 아그들아~! 


언제 또 만날지 모를 나의 소피~ 


학생들을 웃기고 나니 새삼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내 스토리에 맞춰 변하는 아이들의 표정을 읽는 것도 재미있었고 마지막 한방에 빵~ 터졌던 리액션을 보는 것도 즐거웠다. 집에 와서 저녁을 먹으며 남편에게 스펙터클 했던 내 만우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스탠드업 코미디언들이 실제로 이런 식으로 자기의 쇼를 만들어 간다며 내년에는 스토리 구성을 좀 더 탄탄하게 준비해 보라고 격려했다. 그 말을 듣고 있는데 불현듯, 한 깨달음이 뇌리에 박히는 것이었다. 


밥 먹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내 입에선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자기야.. 오늘 내 어릴 적 꿈이 실현된 것 같아! 




초등학교 시절 내 꿈은 줄곧 선생님이었다. 한 때 선생님이었던 엄마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여 선생님들의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매료되었다. 그들처럼 멋진 선생님이 되어 예쁜 구두를 신고 학교를 누비고(?) 싶다는 로망은 초등학교 내내 변치 않았었다. 하지만 6학년이 되어서 내 꿈은 갑자기 코미디언으로 바뀌었다. 엥? 장난이냐고 물을 수도 있지만 나름 진지하고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내성적이던 내가 갑자기 코미디언이 되고 싶었던 것은 그 당시 인기 있었던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6학년으로 올라가면서 5학년 2학기 임시 담임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다. 짧지만 깊은 인상을 남겨주신 선생님. 기간제 선생님이라 다른 학교로 발령이 나셔서 아쉽게도 그 이후로 볼 수 없었다. 의뢰를 하면 척척 찾아주는 프로그램을 보고 있자니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것이다. 선생님을 찾으려면 이 프로에 나가야겠구나.


인터넷이 뭔지도 몰랐던 시절, 프로그램 리포터가 의뢰인의 어렸을 적 동네와 학교를 발로 뛰어 찾아간다. 여기저기 수소문하며 그의 옛 스승이나 첫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은 언제나 흥미진진했다. 언젠가 우리 학교도 나오지 않을까 내심 기대를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을 보며 내가 우리 학교 첫 주자로 저 프로에 나가야겠다는 야심 찬 꿈을 꾸기도 했다. 


의뢰인이 찾던 사람이 티비에 나오면 또 얼마나 드라마틱하던지. 그리웠던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이 프로를 대표하는 웅장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기나긴 세월이 흐른 후 마침내 상봉하는 두 사람. 변한 게 없다며 격한 포옹을 할 때면 어린 나도 덩달아 울음이 났다. 그리고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어른이 된 나와 선생님이 만나는 감격의 순간! 아무리 생각해도 멋진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훔치며 다짐한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이 프로에 나가서 그 선생님을 찾고 말리라. 


그렇게 나의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기' 시크릿 미션은 시작되었다. 일단 유명한 사람이 되어야 했다. 일개 평범한 선생님으로 티비에 나갈 수는 없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꿈을 바꿨다. 티비에 나오는 유명한 사람들을 자세히 지켜보니 배우나 가수, 아니면 코미디언이 대부분이었다. 어렸어도 지극히 객관적이게 주제 파악을 잘했던 터라 의외로 쉽게 가야 할 길을 정할 수 있었다. 형편없는 노래 실력으로 가수는 못하겠고, 이 얼굴로 배우는 못 돼도 코미디언은 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릎을 탁! 쳤다. ‘그래, 결심했어. 훌륭한 코미디언이 되어서 5학년 때 선생님을 찾는 거야!’ 


참으로 6학년스러운 발상이 아닐 수 없지만 그때 난 꽤나 진지했다. 줄곧 선생님이라고 썼던 장래희망 칸에 처음으로 ‘코미디언’이라고 적었다. 그것을 본 담임 선생님의 동공 지진이 머리 뒤통수에서도 느껴졌다. 존재감 없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내가 코미디언이 된다고 하니 선생님은 그게 무슨 직업인지 아냐고 몇 번을 물어보시며 적잖이 당황해하셨다. (나름 심각하다고 생각하셨는지 우리 엄마에게 전화를 하셔서 내 미래를 의논하시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나의 야심 찬 코미디언 되기 미션은 우리 가족의 이민과 함께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없고 영어도 제대로 못하는데 코미디언은 무슨 코미디언. 지나가던 개가 웃을 판이었다. 여기에 살면서 코미디언이 되어 <TV는 사랑을 싣고>에 나가는 것은 길가다가 번개에 맞을 확률보다 낮았다. 영영 다시 못 만날 것 같은 어릴 적 꿈이었는데.. 뜻밖의 만우절 이야기를 통해 실현되었다. 나의 새로운 부캐 '소피'와 함께 말이다. 글을 쓰며 보니 어렸을 때 원했던 꿈 2개를 다 이룬 셈이 되었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다. 


나름 만족스러웠던 ‘미스 문의 만우절 쇼’를 끝내고 나니 새로운 꿈이 생긴다.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코미디언을 넣어 코미디언-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바람. (별 희한한 생각도 다 한다.) 요새는 글을 꾸준히 쓰고 있으니 글 쓰는 사람도 붙이고 싶다. 코미디언이자 글 쓰는 사람이자 선생님이기도 한 나. 소피, 실비아, 그리고 미스 문이라는 어설픈 쓰리콤보가 교실이라는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모습을 그려본다. 킥킥 웃음이 나지만 꿈은 크게 갖는 거라 했다. 


이 것이 나를 어디로 이끌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때 잠깐 꾸었던 코미디언의 꿈처럼 기억의 구석으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코로나로 한창 난리법석이었던 2021년 만우절, 켜켜이 묵혀놓았던 20년도 더 된 꿈이 소소하게나마 이루어지지 않았나. 먼 훗날 내가 알 수 없는 때에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이 꿈은 이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인생은 참으로 알 수 없으니까.  


누가 아는가. 

정말로 언젠가는 초등학교 5학년 임시 담임 선생님을 만나게 될지도. 







글에 나오는 '범 내려온다' 영상을 보고 싶다면 여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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