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바꾸는 칭찬의 힘
한 때 미술을 좋아했다. 화가처럼 출중한 실력은 없어서 종종 무엇인지 모르겠는 난해한 것을 그리기도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이 과정을 즐겼다. 무언가를 창작하는 시간은 늘 즐거운 시간이다. 그렇게 매번 기대하고 기다리던 미술시간이었는데 고등학교 올라와서는 피하고 싶은 과목이 되었다. 미술 선생님의 날카로운 지적이 날아온 것이다. 이걸 그림이라고 그렸냐는 선생님의 따가운 눈초리는 나를 주눅 들게 하기에 충분했다. 나도 미술 실력이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 과정이 재미있어서 수업을 계속 받아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보잘것없는 나의 노력으로 선생님을 만족시킬 수는 없었다. 몇 번의 좌절을 맛 본 이후로 나는 미술과 담을 쌓고 그와 관련된 창작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어차피 잘하지도 못할 거 괜히 쓸데없는 미술 따위에 시간 낭비하지 말자며 거듭 다짐했다. 취미로라도 그림 그리는 일은 없을 거라고.
실력이 없는 나를 탓하지만 칭찬 한번 안 해줬던 선생님이 조금은 원망스럽다. 잘했다는 말 한마디가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드는 것도 아닌데 그 선생님은 왜 그렇게 객관적인 ‘미' 에만 집중을 했을까. 선생님이 아무리 칭찬을 한다 해도 내가 미술의 길을 갈 것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선생님의 사소한 지적이 미술과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게 어찌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지만 그만큼 말의 힘은 실로 대단한 것이다.
칭찬과 격려의 부재가 가지고 오는 여파를 고스란히 맞고 있는 학생들을 볼 때면 안타깝다. 얼마 전 비유에 대한 수업을 진행하고 있을 때였다. 학생들에게 그날 배운 방법을 써서 날씨를 묘사해보라는 과제를 내주었다. 아침에 폭우가 한바탕 내렸던지라 대부분 학생들은 어디서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비에 대한 표현을 썼다. ‘It's raining buckets. It’s raining cats and dogs.’와 같은 그럭저럭 한 글들을 보고 있는데 한 아이의 문장이 눈에 확 띄었다. 그 아이의 글은 이렇게 시작했다: ‘자욱한 안개가 낀 아침이었다. 소녀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우울한 거리를 걸었다. 무겁게 내려앉은 그녀의 어깨가 그날 아침의 일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미스터리 소설의 인트로라고 해도 무색할 만큼 흡입력 있게 잘 쓴 문단이었다. 보석을 찾은 것 마냥 호들갑을 떨면서 이렇게 대단한 글을 어떻게 10분 만에 쓸 수 있냐며 발표하라고 제안하니 학생은 쑥스러운지 나보고 대신 읽으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낭독이 끝남과 동시에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함께 칭찬의 세레나데가 울려 퍼졌다. 굉장한 작가가 나왔다며 칭찬을 해주니 머쓱해하던 학생은 이내 시큰둥하게 이런 말을 던졌다.
“선생님이 그런 말 해주면 뭐해요. 우리 엄마는 상관도 안 하고 잘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요.”
그러자 반 곳곳에서 동의의 함성이 터지기 시작했다.
“맞아, 맞아~! 부모님은 다 똑같아. 우리 엄마 아빠도 딱 그렇게 얘기한다니까! 내가 뭘 해도 칭찬을 안 해.”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른들이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건 똑같은 건가. 부모에게 인정받지 못해 자기 실력을 비하하는 학생을 보고 있자니 비슷한 경험을 한 과거의 내가 떠올랐다.
대학생 시절, 내가 봉사했던 부서에서 교회 학예회 및 콘서트를 연 적이 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나의 손을 거쳐가지 않은 곳이 없었기에 끝나고 나서 그 뿌듯한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셨던 분들 모두가 한결같이 잘했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끊임없는 찬사에 취해 이 정도 실력이라면 연출 쪽으로 가봐도 좋겠단 생각이 들 정도였다. 잔뜩 부푼 마음으로 부모님께 쪼르르 달려가 의견을 물었다. 분명 칭찬을 해주실 거라고 기대했건만, 내 예상과는 달리 나에게 날아온 건 강철 같은 차가운 말이었다.
거기선 왜 그렇게 밖에 못했냐.
찬물도 이런 찬물이 있을 수 없다. 북극에서 막 퍼온 얼음물도 이 정도로 차갑진 않을 것이다. 부풀었던 풍선이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푸쉬이...불과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구름 위를 걷고 있었는데 아빠의 강타로 내 기분은 땅끝까지 곤두박질했고 축제 분위기를 완전히 망쳐준 아빠에게 화가 났다. 왜 하필 이때 이런 비판을 하는 걸까. 빈말이라도 잘했다는 소리가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닌데. 몇 분 전까지만 해도 귓전에서 울렸던 다른 사람들의 칭찬은 저 세상 소리가 되어 우주의 먼지처럼 사라져 버렸다. 대학생이나 된 어른이었는데도 여전히 부모님의 인정이 가장 중요했는지 어느새 눈에는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끝까지 참고 싶었지만 눈 앞은 흐려지고 코는 훌쩍이고, 내 자존심은 온데간데없이 증발하고.. 먹고 있던 쌀국수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었다. 눈물을 감추려 애꿎은 바질과 고수를 더 담아 봤지만 오히려 그 향이 눈물샘을 더 자극했다. 결국 울먹거리며 아빠에게 나지막이 말할 수밖에 없었다.
“왜 항상 잘한 건 말 안 하고 못한 것만 지적하세요…”
미세하지만 느낄 수 있었다. 아빠의 동공 지진을. 예상치 못했던 내 말에 냉랭해진 분위기를 만회하느라 멋쩍게 웃으시며 그런 걸 굳이 말로 해야 아냐고 되물으셨다. 칭찬보다는 이런 객관적인 비판이 다음을 준비할 때 더 도움이 되지 않냐는 말을 덧붙이셨는데, 어머나, 이런 당황스러운 말이 어디 있나.
아부지!
이렇게 축하하는 분위기에선 칭찬을 해야 하는 거라고요!
다음을 준비할 때 필요한 객관적인 비판? 그게 무슨 말이에요.
칭찬 없는 비판은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걸 진정 모르신다는 말씀입니까!
이 날 이 후로 아빠는 비판을 현저히 줄이셨지만 아직도 칭찬에는 인색하시다. 매번 그런 걸 말로 해야 아냐고 물으신다. (당연하죠!)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서른이 훌쩍 넘은 다 큰 어른이 되었지만 칭찬과 격려는 언제나 들어도 좋다.
말 한마디가 사람의 인격 형성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것이 부모와 같이 우리 삶에 중요한 인물이라면 그 영향은 몇 배로 늘어난다. 환자를 죽이거나 살릴 수 있는 메스처럼 말 또한 그만큼의 힘이 있다. 긍정의 말을 들은 식물에게서 난 꽃이 부정의 말을 들은 식물의 꽃보다 더 크고 아름답다는 실험 결과도 있지 않은가. 작은 식물도 말에 이렇게나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하물며 식물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복잡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우리들은 오죽할까. 우리가 긍정의 말을 듣고 자란다면 얼마나 아름다운 꽃을 피울지 상상해 보라.
그렇다면 무조건 칭찬만이 답일까? 과한 칭찬은 오히려 헛된 꿈을 쫒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스탠퍼드 대학 심리학 교수 캐럴 드웩 (Carol Dweck)은 Fixed Mindset (고정 마인드셋)과 Growth Mindset (성장 마인드셋)에 대한 연구 발표를 통해 이 질문에 적절한 답을 내놓았다. 그녀가 지은 ‘성장 마인드셋’이라는 개념은 교육에 획기적인 생각의 전환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칭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녀는 이 두 가지 마인드셋을 이렇게 설명했다. ‘고정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재능과 실력은 타고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려운 문제를 맞닥트리면 ‘나는 타고난 재능이 없으니 어차피 안될 거야’라고 말한다. 실력 없는 자기 탓을 하며 문제를 풀기도 전에 쉽게 포기해 버리고 갈등을 일으키는 상황은 전적으로 피하려고 한다. 반면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재능은 연습을 통해 새롭게 습득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라고 묻고 주어진 문제를 풀 궁리를 한다. 갈등은 피할 것이 아니라 해결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진 사람은 좋은 결과를 얻는 것보다 배움의 과정을 즐기는 것이 더 값진 일이다. 그들에게 삶이란 골치 아픈 숙제가 도처에 깔려있는 곳이 아닌, 도전해서 헤쳐나가야 할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는 곳이 된다. 공통적으로 삶에서 성공한 사람이나 아티스트들이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성장 마인드셋을 가지기 위해서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한다. 이 두려움은 실수했을 때 받은 따뜻한 격려로 완화될 수 있다. 실수나 잘못했을 때의 지적은 고정 마인드셋을 더 강화시킬 뿐이다. 그러니 그녀는 아이들을 상대하는 부모와 선생에게 ‘결과만 칭찬하지 말고 도전에 응했던 과정을 칭찬하라’고 당부한다.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곳에 도달하기까지 겪은 작은 성공과 실패까지도 칭찬하고 껴안아 줘야 한다는 것이다. 실패는 질책받아야 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북돋아야 하는 것이다. 배우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실수를 즐길 수 있게끔 도와줘야 효과적인 학습을 할 수 있다. 배우는 방법을 배우는 과정. Learn how to learn. 이 것은 아이가 삶을 더 주체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만든다.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조금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고 실패를 하더라도 훌훌 털고 일어날 수 있는 내면의 힘이 생기게 된다.
실제로 결과보다 노력했던 과정을 칭찬해 주었을 때 고정 마인드셋을 가지고 있던 학생이 성장 마인드셋으로 서서히 바뀐 것을 보기도 했다. 노력에 대한 작은 칭찬에 반응해서 더 좋은 결과를 얻은 학생을 보면 나도 덩달아 신나서 더 칭찬을 하게 된다. 일종의 칭찬의 선순환이 시작되는 것이다. 긍정의 사이클 속에서 일 년 사이에 놀라운 발전을 했던 학생에게 졸업식 때 Most Improved Award를 수여하기도 했다. 이 상을 받은 학생을 자랑스러워하던 부모님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하다.
열 번의 비판보다 한 번의 칭찬이 훨씬 더 효율적이다. 그것이 노력에 대한 칭찬이라면 효과는 배가 된다. 아이들이 고정형의 사람이 될지, 성장형의 사람이 될지는 그들을 돌봐주는 사람들의 말에 달렸다. 그러니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좀 더 잘하라는 채찍질이 아니라 잘하고 있다는 따뜻한 격려의 한마디가 아닐까. ‘잘했어.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은 없잖아. 실패란 없어. 배움이 있을 뿐이야’라는 말.
다른 사람을 쉽게 비판하고 실수를 거침없이 지적하는 사람들은 혹시 칭찬을 못 받고 자라온 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칭찬의 따스함을 받아보지 못해 어떤 말로 격려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닐까.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잘한다고 하지 않는가. 칭찬도 받아본 사람이 잘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이 드니 칭찬보단 날카로운 지적을 중요시 여겼던 아빠가 이해된다. 서운한 마음도 이젠 없다. 오히려 퍽퍽한 경쟁사회와 사막 같은 이민사회에서 ‘욕먹지만 안 으면 다행’이라는 마인드로 살아왔던 아빠의 삶에 측은해진다.
좀 더 칭찬에 관대 해지는 문화를 그려본다. 실수하고 넘어질 때마다 왜 그랬냐는 질책보단 수고했다는 말이 더 자연스러운 사회.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요시하는 사회.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고래들이 신나게 춤을 출 수 있을까. 저 넓은 바다로 떠나는 고래들이 칭찬에 힘입어 좀 더 자유롭게 더 멀리멀리 헤엄쳐 나가는 아름다운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