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제1절. 정체성의 미로

정체성, 미로, 온라인 자아, 메타정체성

by 사유의 풍경

2.1. 미로의 입구에서:

정체성이 문제가 된 이유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이 이렇게 대답하기 어려워진 적이 있었던가?

불과 반세기 전만 해도 사람들은 주저 없이 답했다.

나는 농부입니다,
나는 교사입니다,
나는 김 씨 집 장남입니다.

직업이 곧 정체성이었고,

출생지가 곧 소속이었으며,

가족 관계가 곧 사회적 위치였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같은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잠시 멈칫한다.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음... 회사에서는 마케터인데,

유튜브에서는 크리에이터고,

인스타그램에서는... 그냥 일상을 공유하는 사람?

아, 그리고 주말에는 등산 동호회 회원이기도 하고..."


하나의 답 대신 여러 개의 답이 나온다.

그리고 그 답들이 서로 연결되는지,

진짜 '나'는 그 중 어느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



2.1.1. 과거의 안정된 자아 구조

(1) 전통사회: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정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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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한 농민은 아침에 일어나 자신이 누구인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김 씨 집안의 차남이자,

안동의 농부였으며,

유교적 질서 안의 한 구성원이었다.


이 정체성은 출생과 동시에 주어졌고,

평생 변하지 않았다.

전통사회의 정체성 구조:
혈연 + 지연 + 직업 = 평생 불변의 정체성

이러한 구조는 개인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이미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선택의 자유라는

대가를 치르고 얻은 안정이었다.


(2) 근대사회: 선택으로 만들어가는 정체성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산업혁명과 계몽주의 이후,

서구 사회는 새로운 정체성 모델을 제시했다.

개인의 자유의지에 기반한 자아 구성이었다.


존 로크는 『인간 지성론』에서 개인을

"경험을 통해 스스로를 구성해 가는 존재"라고

정의했다¹.


더 이상 출생이 운명을 결정하지 않았다.

교육을 받고, 직업을 선택하고, 배우자를 만나고,

가치관을 형성해 가는 것이

모두 개인의 몫이 되었다.

근대사회의 정체성 구조:
개인의 선택 + 노력 + 성취 = 자기 결정적 정체성

19세기와 20세기 초,

이러한 모델은 비교적 잘 작동했다.


사람들은

"나는 의사가 되겠다", "나는 예술가로 살겠다"

결심하고, 그 결심에 따라 일관된 삶을 살 수 있었다.


정체성은 여전히 단일하고 안정적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


(3) 현대사회: 정체성의 불확실성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급변했다.

디지털 혁명은 단순히 기술적 변화에 그치지 않고,

인간의 정체성 구조 자체를 흔들어놓았다.


우리는 이제 여러 개의 플랫폼에서 서로 다른 자아를 동시에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자아들은 때로 서로 모순되기도 한다.


-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분할

LinkedIn의 나: 전문적이고 성취 지향적

Instagram의 나: 감각적이고 미적 지향적

Twitter의 나: 비판적이고 의견이 강함

Facebook의 나: 관계 중심적이고 사교적

실제의 나: ???



2.1.2. 디지털 시대의 정체성 혼란

(1) 플랫폼별 자아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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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인은 디지털 배우가 되었다.

하나의 무대(플랫폼)에서 다른 무대로 옮겨갈 때마다

다른 역할을 연기해야 한다.


예를 들어, 한 직장인의 하루를 따라가 보자:


- 오전 9시 - 슬랙(Slack)

"안녕하세요! 오늘 회의 자료 준비 완료했습니다.

검토 부탁드려요!"

→ 협조적이고 성실한 직장인의 모습


- 오후 12시 - 인스타그램

브런치 사진과 함께: "오늘의 소확행 ☕️ #일상 #감성"

→ 여유롭고 감각적인 라이프스타일 큐레이터의 모습


- 오후 6시 - 페이스북

"아이가 첫걸음마를 했어요! 너무 감동적이네요 ❤️"

→ 사랑 넘치는 부모의 모습


- 오후 10시 - 트위터

"정치인들 정말 답이 없다.

이래서 이 나라가 발전 안 하는 거임"

→ 날카로운 사회 비평가의 모습


이 사람의 진짜 정체성은 무엇인가?

네 개의 모습이 모두 가짜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사람은 실제로 성실한 직장인이면서,

감각적인 면이 있고, 가족을 사랑하며,

사회 문제에 관심도 있다.


문제는 이 네 개의 자아가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각각의 플랫폼에서 그는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2) 알고리즘이 결정하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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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 문제는 이 플랫폼별 자아들이

우리 의지와 무관하게 형성된다는 점이다.


추천 알고리즘의 정체성 개입:

YouTube 추천 시스템의 영향

1단계: 운동 영상 몇 개 시청

2단계: 알고리즘이 더 많은 운동 영상 추천

3단계: 운동에 관한 광고들이 타겟팅됨

4단계: "나는 운동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인식 형성

결과: 실제로는 가끔 운동 영상을 본 것뿐인데,

'운동 좋아하는 사람'이 정체성의 일부가 됨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Facebook의 "추억 보기" 기능도 마찬가지다.

알고리즘이 선별한 과거 사진들을 보여주면서

"당신은 이런 사람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 선별된 기억들을 통해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선택한 것이다.

페이스북 알고리즘은

참여도가 높은(좋아요, 댓글이 많은) 게시물을

우선적으로 추억으로 선별한다².


결과적으로 우리는

알고리즘이 재구성한 버전의 자신을

진짜 자신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2.1.3. 기술이 만든 정체성 분할

(1) 온라인 자아 vs 오프라인 자아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온라인에서의 나:

신중하게 선별된 순간들만 공유

필터와 편집을 통해 보정된 모습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큐레이션 된 정체성


오프라인에서의 나:

예측하지 못한 순간들의 연속

보정되지 않은 날것의 모습

타인의 시선과 무관한 자연스러운 정체성


문제는 이 두 정체성 사이의 괴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심리학자 셰리 터클(Sherry Turkle)은

『혼자 있는 함께』에서 현대인들이

"온라인 자아를 더 진짜라고 느끼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고 지적했다³.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왜냐하면:

온라인에서는 충분히 생각할 시간이 있다

수정과 편집이 가능하다

원하는 모습으로 표현할 수 있다


반면 오프라인에서는:

즉석에서 반응해야 한다

실수와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난다

통제할 수 없는 상황들이 많다


그 결과 사람들은

오프라인에서의 내가 가짜이고,
온라인에서의 내가 진짜

라고 느끼기 시작한다.


(2) 시간별 자아의 파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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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나: 뉴스 앱으로 시사 정보를 접하며 형성되는 시민적 자아

점심의 나: 맛집 앱으로 식당을 찾으며 드러나는 소비자적 자아
저녁의 나: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며 몰입하는 관객적 자아

밤의 나: 명상 앱으로 마음을 정리하는 내성적 자아


각각의 앱과 플랫폼이

우리에게 서로 다른 정체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요구에 맞춰

서로 다른 모드로 전환한다.


문제는 이 전환이 너무 빈번하고 급격해서,

우리가 전체적인 일관성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2.1.4.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복잡성

(1) 과거의 단순함 vs 현재의 복잡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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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나는 누구인가?" → "나는 ○○이다" (단일한 답)

현재: "나는 누구인가?" → "상황에 따라 다른데..." (복수의 답)

이 변화가 반드시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면적이고 복합적인 정체성은

오히려 인간의 풍부함을 나타낼 수 있다.


문제는 이 다양한 면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마치 하나의 거울이 여러 조각으로 깨져서,

각 조각마다 다른 모습을 비추는 상황과 같다.


(2) 메타-정체성의 부재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메타-정체성이란?

여러 개의 정체성 조각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상위 차원의 자기 이해


예: "나는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지만,

근본적으로는 ○○○한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이다"


현대인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 메타-정체성이다.

플랫폼별로, 상황별로 다른 자아를 연기하지만,

그 연기들을 관통하는 일관된 서사가 없다.


내가 왜 이렇게 행동하는가?
이 모든 모습들이 어떻게 연결되는가?
결국 진짜 나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이 없다.



2.1.5. 미로 은유의 적절성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정체성의 현재 상황을 미로에 비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미로의 특성과 현대 정체성의 유사점

길은 있지만 방향을 모른다

정체성의 조각들은 있지만 전체적 방향성이 없다

여러 갈래길이 있지만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른다

여러 자아 옵션이 있지만 어느 것이 진짜인지 모른다

출구가 있을 것 같지만 찾기 어렵다

통합된 정체성이 가능할 것 같지만 방법을 모른다

같은 곳을 맴돌고 있는 느낌

플랫폼을 오가며 비슷한 정체성 혼란을 반복한다

(2) 미로 탈출의 희망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중요한 것은 미로에는 반드시 출구가 있다는 점이다.

현재의 정체성 혼란이 해결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지도가 필요하다.

전통사회의 고정된 정체성도,

근대사회의 단일한 자아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디지털 시대에 맞는 새로운 정체성 모델이다.

그리고 그 모델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먼저 현재 무엇이 어떻게 해체되고 있는지를 정확히 진단해야 한다.

© 장하(章廈). CC BY 4.0. 출처 표기 필수

다음 절에서는 이 해체 과정을

감각 자아부터 구체적으로 분석해 보겠다.

기술이 우리의 "나는 여기 있다"는 가장

기본적인 자각마저 어떻게 흔들어놓았는지 살펴보자.



생각해 보기


자기 점검 질문들

1. 지금 이 순간,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2. 당신의 SNS 프로필들을 모두 나열해 보세요.

각각에서 보여주는 '나'는 어떻게 다른가요?


3. 온라인에서의 당신과 오프라인에서의 당신 중

어느 쪽이 더 '진짜' 같다고 느끼시나요? 그 이유는?


4. 최근 한 달간 알고리즘이 추천해 준 콘텐츠들을 통해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이 있나요?


참고문헌

¹ Locke, J. (1689). An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 Thomas Bassett. 현대 번역: Nidditch, P. H. (Ed.). (1975). Oxford University Press.

² Bucher, T. (2012). Want to be on the top? Algorithmic power and the threat of invisibility on Facebook. New Media & Society, 14(7), 1164-1180.

³ Turkle, S. (2011). Alone Together: Why We Expect More from Technology and Less from Each Other.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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