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 넷, 나의 두 번째 꿈에 관하여

시작

by 웬디

“쌤한테 필요할 것 같아서”

교내 연수가 끝난 자리에서 교감선생님께서 내게 무언가 건네셨다. 교사의 삶을 가꾸는 글쓰기 연수 신청 공문이었다. 오다 주웠다는 듯 무심히 던지신 말씀이셨건만, 그 공문을 가만 들여다보자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건지. 그렇게 서른넷 워킹맘의 고행은 시작되었다.


2010년도부터 운전을 했으니 운전을 시작한지는 꽤 되었지만 휴직 4년 동안 운전대를 놓았었다. 많으면 대여섯 번 정도 운전대를 잡았으려나. 천생 운전을 즐기는 사람이 아닌지라 복직 후에도 운전은 딱 출퇴근만 겨우 하는 중이었는데, 정말 큰일이 났다. 이미 신청해놓은 연수 장소가 전주라니. 막막했다. 그러나 매번 시간에 쫓기니 두려움을 마주할 새도 없이 차에 올라타자마자 악셀부터 밟는다. 연수 때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맡기고, 연수에서 돌아오면 친정으로 가서 아이들을 찾아 집으로 온다. 모든 일과를 마치면 9시쯤. 몇 주를 그렇게 보내며 생각하니, 연수 신청 전으로 시간을 돌린다면 내가 과연 다시 신청할까 싶다. 후회란 일이 이미 저질러진 후에 찾아오는 것이라 참 다행이다.


기억을 되짚어보니 교감선생님이 계신 자리에서 내 꿈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마 작년 수련활동 때인가보다. 여러 이야기 끝에 흘러가는 말처럼 했던 말인데, 교감선생님께서는 그 이야기를 기억하고 계셨나보다. 아무 일 없었다면 굳이 눈여겨보지 않았을 연수 공문이 신기하게도 내 손에 전해졌다.


나의 두 번째 꿈은 동시를 쓰는 것이다.

시 말고 동시를 쓰고 싶다. 더 정확히는 동시 속에서 소통하고 싶다. 동시라는 공간을 내가 잘 짓고, 그 안에 아이들을 하나하나 초대해서 나와 그 아이가 만났으면 좋겠다. 남들 눈 피해서 들어온 아이를 잘 숨겨주고,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귀만 쫑긋 열고 들어주고, 그 속에서는 우리 둘이만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싶다.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토록 소중한 나의 두 번째 꿈은 단지 꿈일 뿐이었다. 언젠가 그렇게 될 거라는 방향성만큼은 확실했지만, 조금의 진척도 없이 그저 상상 속에만 머물러 있었다.


대학 시절에 나는 시문학 동아리에서 시를 썼었다.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을 시의 형태로 쓰고 고치고 또 고치는 일의 반복이었다. 그즈음엔 ‘진짜 시인’들은 정말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작품을 완성하는 날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것 같다. 나에게 시간은 늘 충분하지 않았다. 사실 충분한 시간이 주어졌대도 그리 몰두하진 않았을 것 같기도 하다. 내 글이 마음에 꼭 든 적은 없었다.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작품을 내지 않으면 죄송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에 웬만한 데서 마무리해 시평에 참석하곤 했다. 그러면 많은 경우, 이 아이는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부터 논란이 되는 불편한 상황에 처하곤 했다. 나는 특정한 생각이나 상황에서부터 글을 시작했지만, 글을 읽는 사람은 나와 정반대로 글 속에서 나의 생각이나 경험을 발견해야하기 때문에 빚어진 참극이었다. 시에 서툰 사람이 시에 이야기를 담으려니 설명과 함축 사이에서 늘 길을 잃었다. 시평 때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아차 싶을 때가 많았다. 내 생각에서 빠져나와 타인의 시선으로 글을 보아야 하는데 그게 늘 어려웠다.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장면이나 생각이 글을 읽는 사람의 머릿속에도 똑같이 들어있다는 착각에 빠져 글을 쓸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심지어 나는 시라는 형식에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스무살을 갓 넘긴 학생이었고, 그 중에서도 매우 모범생의 길을 걸어온, 다소 유아적인 아이였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는 시는 어른의 것이었기 때문에 시 안에서 어른처럼 말하려고 노력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부자연스러웠을까. 네 살짜리 아이가 뾰족 구두를 신고 엄마 흉내를 내는 것 같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그렇게 몇 년을 흘러보냈다. 의무감에 시를 쓰고, 고치고, 시평하고, 자책하고, 그래서 우울해지는 사이클이 대학 4년 내내 아마 십 수번은 반복되었을 거다.


대학 4학년 때 우리 과 교수님이 시화전에서 내 시를 보셨다고 말을 건네셨다. 동시를 쓰면 좋겠다고 하셨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이 순간이 너무 아깝다. 딱 3년만 일찍 그 교수님을 만났다면 좋았을텐데. 안타깝게도 동시를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대학을 졸업했다.


졸업하니 그 후로는 내게 글을 써야 하는 의무가 전혀 없었다. 안 쓰면 마음 불편해지던 자리도 완벽히 사라졌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그토록 좋아했던 글쓰기가 내 삶에서 완벽히 사라져버렸다. 마술 같았다. 연애할 때와 결혼 초기 썼던 손편지, 아이를 키우며 끄적인 육아일기, 생활감 가득 나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만 드문드문 할 뿐이었다. 대신, 그 빈자리를 대신하려는 듯 마음과 생각은 간절해졌다.


나는 4년간 육아휴직을 했다. 길다면 꽤 긴 시간 동안 학교를 떠나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떠나있던 그 시간은 오히려 학교와 아이들에 대해 가장 많이, 또 깊이 생각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 대한 생각은 이상하게도 그 아이들 각자의 상처로 귀결되었다.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 하고 싶었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나름대로 노력해보았지만, 결국엔 ‘그것 보세요. 선생님도 똑같아요.’라는 결론을 준 것 같아 사무치게 미안한 아이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고 싶었다. 결국 긴 시간을 돌아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중에서도 아이들이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쉬운 글, 잘 읽히는 글, 누구라도 읽을 수 있는 글을 쓰고 싶었다. 마음이 여기까지 오니 ‘그냥’ 말고 ‘잘’ 쓰고 싶어졌다. 동시라는 공간을 내가 잘 지어놓고, 아이들을 기다리고 싶어졌다. 혼자 슬퍼하고 혼자 아파해서 잘 관찰해야만 알 수 있는 그 아이들을 일대일로 초대해서 만나고 싶어졌다. 남들 눈 피해서 들어온 아이를 잘 숨겨주고,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으면 귀만 쫑긋 열고 들어주고, 그 속에서는 우리 둘이만 속닥속닥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어릴 적 나는 무척 내성적인 아이였다. 그래서 밖에 나가 놀기보다는 어딘가에 앉아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을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과학 선생님이셨는데 내가 쓰는 글을 좋아해주셨다. 선생님께서는 당신의 책을 빌려주시며 천천히 읽고 달라셨지만 늦게 돌려드리기엔 차마 죄송스러워 시간 나는 대로 벼락같이 읽고 갖다 드렸는데, 뜻밖에도 선생님은 또 다른 책을 빌려주셨다. 그리고 그 일은 일 년 넘도록 반복되었다. 선생님을 통해 접하는 책의 분야가 차츰 넓어지자 그동안 관심 밖이었던 시집에까지 관심이 미쳤다. 사춘기 시절 흔들리는 나의 마음을 깊게 심어주고 나 자신과 마주하게 한 것이 모두 시였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마지막으로 정호승님의 시 한편을 옮기며 글을 맺는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무슨 뜻인지 알았을까 하고 웃음도 나지만, 열여섯 살의 나를 품어주고 시인의 심장 소리로 나를 토닥여 준 시였다. 이 시 한편이 나를 감싸주던 온기와 그 온기에 싸여 따스하게 통과했던 나의 시간을 기억하기에 이제 나는 아이들을 만나러 나의 동시를 들고 가고 싶다.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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