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그리고 딸
진부하겠지만 누군가 내게 사랑하느냐고 묻는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그러나 사랑이란 감정을 떠나 나이가 들수록 자주, 가만 생각해보게 되는 사람이 있다.
사람에도 결이 있다면 나와는 다른 결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을 내 나이 서른 즈음에 처음 하게 되었다. 단순하고 명쾌한 사실을 무려 삼십 년간을 모르고 살아온 것은 그 사람이 나에게 온 세상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을까. 대상으로 삼아 바라보는 대신 그 안에서 살아온 것 같다. 나는.
엄마는 헌신적인 사람이었다. 분명하고 뜨거운 사람이었다. 반면에 난 타고 난 에너지가 적어 늘 조용했고 무얼 하든 소소했다. 평화주의자인 나와 달리 엄마는 호불호가 분명했다. 싫은 감정을 티 내지 않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는 나와 달리 엄마는 싫은 감정을 속에만 감춰두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상 모든 사람과 두루두루 좋은 관계를 맺고 싶어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내 편을 확실히 챙기는 사람이었다. 이제 와 생각하면 정말 다른 두 사람이었다. 그렇지만, 그 땐 몰랐다. 아빠는 늘 바쁘셨고 내 아래로는 남동생만 둘이었으니 자라는 내내 나는 엄마와 단짝이었다. 엄마는 속상한 일이 있을 때면 내게 이야기했고 그럴 때마다 나는 그냥 엄마 자체가 되어 엄마를 힘들게 하는 것이 미웠다. 내가 대학을 지원해야 할 무렵 엄마는 내게 말씀하셨다. 멀리 가지 말고 엄마 옆에 있으면 좋겠다고. 나는 당연히 그랬다.
엄마는 농사짓는 부모님 아래서 태어났다고 했다.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아들 많은 집 외동딸이라서 할머니가 특히 애지중지 했더랬다. 비싼 브랜드 운동화는 못 사주셨지만, 신발을 사면 할머니가 예쁘게 수놓아 줬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조금 부러웠었다. 엄마는 정말 사랑 많이 받고 살았구나 싶어서. 공부도 곧잘 했다고 했다. 엄마는 선생님들에 대한 기억도 모두 좋았다. 그래서 엄마 몇 학년 때 선생님이, 엄마 몇 살 때 선생님이, 로 시작되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동생들 뒷바라지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에 진학하려고 했을 때 중학교 담임선생님께서 학비를 대줄테니 인문계 고등학교에 가자고 이야기하신 적도 있었더랬다. 엄마는 선생님들께도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였다. 고등학교 원서에 1지망부터 3지망까지 희망하는 학교를 써내야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여고에 가고 싶어했다. 그 당시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였으니 별일 없었다면 나도 그 학교를 1지망에 적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고를 적었다. 고등학교 희망 순위를 적어낸 날 우리 반 실장이 내가 적어 낸 종이를 도로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웬디야, 너 순서를 거꾸로 쓴 것 같다고.
엄마는 종종 어릴 적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여고에 가고 싶었다고 말했었다. ○○여고는 엄마가 학교 다닐 당시 명문여고였다.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들이 가는 학교. 엄마는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이었으므로 그 학교에 다님으로써 그것을 증명하고 싶지 않았을까. 그러나 가정 형편을 모른 척하고 그 길을 갈 수 있는 사람도 못됐을 것이다. 지금도 동생인 삼촌들을 마치 엄마처럼 돌보는데 나이가 어렸다고 다른 사람이진 않았을테니. 엄마는 억지로가 아니라 자신이 결정해서 다른 학교에 진학했다. 그리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종종 딸인 나에게 이야기했다. 정말 단지 그러기만 했었다.
딱 한 번 예외는 있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할 무렵 엄마는 내가 ○○여고에 가면 좋겠다고 얘기했다. 엄마의 이야기는 짧고 간결했다.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부연하고 싶은 것은, 고등학생이던 엄마가 고등학생의 학부모가 되는 사이 ○○여고에 대한 인식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는 내게 그리 특별한 의미가 아니었으니 문제될 건 없었다. 나는 ○○여고에 갔다.
참 순종적인 딸이다. 말하면 다 이루어졌을 거다. 엄마 아빠는 억압적이지 않았고 오히려 허용적이었지만 나는 그랬다. 엄마 아빠는 내가 뭐든 해보길 바랐던 것 같지만, 야속하게도 나는 늘 집에서 책 읽고 티비 보고 그림 그리는 게 다인 아이었다. 동생은 나와 달랐다. 하고 싶은 게 많았고 활동적이었고 에너지가 넘쳤다. 여기저기 사고를 치고 다니면 고작 두 살 많은 누나였던 내가 사과하고 수습하며 다녔다. 내가 성인이 되고 어느 날 엄마가 내게 말했다. 엄마한테는 그냥 달라고 해. 주면 안 돼요? 라고 묻지 말고. 용돈을 탈 때 네 동생은 나 만원만 줘 라고 말하는데 너는 늘 나 만원만 주면 안 돼요? 라고 하더라, 라고. 사소해서 쉬운 일 같지만, 여전히 나는 엄마 오늘 우리 애들 8시까지만 좀 봐줄 수 있어요? 라고 묻는다. 동생과 달리.
나에겐 여섯 살과 세 살, 두 명의 딸이 있다. 엄마가 되고 내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나는 첫째로 자라온 나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첫째가 짠하다. 첫째가 겪는 감정이 그 때의 나와 같지 않기를, 엄마처럼 그 아이를 대하지 않기를 경계하며 살아간다.
엄마는 약자 우선주의자다. 하늘이 두 쪽 나도 누나는 동생을 돌봐야 하는 거니 가고 싶지 않은 학교에 자진해서 갔고, 운동 경기를 볼 때에도 지고 있는 팀이 이겨야 한다는 게 엄마의 원칙이다. 처음엔 분명 같이 탐탁지 않아했던 사람이나 일도 다른 사람들이 비난하면 슬며시 껴안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그게 싫었다. 엄마가 상식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닌 건 아닌 거라고. 그러나, 엄마의 사고 안에는 그런 엄마만의 논리가 있었다.
그래서 첫째인 나는 어릴 적에 슬펐던 것 같다. 어릴 적 기억을 떠올리면, 동생과 다툰 후 이유도 맥락도 생각나지 않는 그 기억의 끝에 엄마가 어린 동생을 안고 다독이고 그보다 조금 컸을 뿐인 어린 내가 스스로 들썩이는 어깨를 잠재웠던 슬픈 기억이 난다. 동생과 둘이 집을 나설 때면 네가 누나니까 동생을 잘 돌봐야한다는 당부를 항상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의 사고 안에서 누나는 동생에게 양보해야 하는 존재였고, 동생을 울리는 건 곧 나쁜 누나라는 증거였다. 나는 나쁜 사람이 되기 싫었으므로, 처음엔 슬펐어도 점차 착한 누나가 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 슬픈 기억이 없다. 다만 어린 동생도 엄마의 생각을 읽었는지 엄마 몰래 나를 놀려먹곤 했다. 인과관계를 증명할 순 없지만, 내가 신기할 만큼 순종적인 딸로 자연스레 귀결된 이유 중 하나는 이 책임과 애정의 상대성을 태생적으로 내가 극복할 수 없다는 본능적인 깨달음 아니었을까.
그런데 그보다 정말 무서운 것은, 나의 두 아이가 다투고 그 끝에 울음 소리가 들릴 때 둘째 아이에게 먼저 손 내미는 나를 내가 볼 때였다. 내 기억에 유난히 남아있는, 그래서 엄마가 어쩌면 그럴 수 있지 생각했던 그 기억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며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는 깨달음은 다소 충격이었다. 이 아이도 아직 어린데, 더 어린 동생을 돌보기에 엄마가 힘드니 네가 이만큼은 좀 해줬으면 좋겠다는-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바람이 내 안에도 있는 것을 보았다. 30년의 시간을 사이에 두고 이리도 달라질 수 있다니.
나는 여전히 첫째가 짠하다. 앞으로도 오래 짠할 것 같다. 내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더니 한 지인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첫 아이가 하나도 안 짠해. 내가 하도 그렇게 자라서 첫째한테는 다르게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내가 아쉬웠던 걸 다 해줬어. 그래서 이제 하나도 안 짠해. 부러웠다. 그리고 길이 보였다. 다르게 살아내야만 하는 거라고.
모든 것엔 양면이 있듯 첫째로 살아온 내 경험도 엄마가 되니 두고두고 고맙다. 경계하며 살게 해줘서.
2019년 어느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