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가 되어 처음 경험한 놀라움은 교실이 참 시끄럽다는 것이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첫 1교시가 끝난 쉬는 시간에 나는 멍해졌다. 내가 앞으로 매일 이런 공간에서 지낼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그 후로 며칠 동안 소리를 낮추려는 시도도 나름 해보았던 것 같은데, 결국 나는 앞으로 이 정도 데시벨에 익숙해져야 하는구나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아마도 첫 2~3주 안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나는 내향인이고 집순이다. 발령을 받기 전 살아온 스물 세 해 동안 나의 공간은 늘 조용했다. 내 주변인들 역시 나와 비슷한 색채와 온도를 지녔었고, 그렇지 않은 지인들도 더러 있었지만 나와 대화할 때면 데시벨은 하향 평준화되었다. 또, 그 때는 몰랐지만 결혼하면서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나는 티비 소리도 무척 작게 켜놓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스물 세 해를 살다가 발령을 받고 보니 나는 시끌벅적한 교실에 서있었다. 심지어 초등 교사의 책상은 다른 곳도 아닌 바로 그 교실 안에 있었다. 아이들이 하교할 때까지는 꼼짝 없이 그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는 뜻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습지만 그 때 나는 내가 정말 이 공간에서 지낼 수 있을까를 고민했었다.
그 후로 십 여년. 그토록 충격적이었던 일은 이제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었다. 이제는 시끄러운 소리 중에서도 디폴트 값을 구별해낼 줄 안다. 시끄러운 소리라고 다 똑같은 게 아니라 그 스펙트럼은 꽤 다채로운데, 평상시의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가 변별된다. 십 여년 간 꾸준히 들어온 덕이다. 가끔 교실이 조용하면 무슨 일이 있나 싶고 이상하다. 지내보니 그것도 좋은 신호는 못 됐다.
나의 최적의 데시벨은 내 취향의 문제다. 교사로서의 업무는 사적인 취향과는 당연히 구별된다. 나는 아이들의 쉬는 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공부에 나름 취미가 있던 나도 쉬는 시간은 기다려졌다. 앞자리에 앉아 선생님 말씀에 빠져들어가던 애였지만 그런 나도 쉬는 시간이 있어야 숨통이 트였다. 아이들에게도 그럴 것을 알기에 쉬는 시간은 최대한 존중하려고 한다. 수업 내용이 다 안 끝났어도 종이 치면 가급적 거기서 마무리 짓는다. 아이들의 쉬는 시간은 소중하니까.
쉬는 시간은 떠들어도 대체로 그냥 둔다. 지나치게 큰 소리를 지르거나 일부러 훼방을 놓는 게 아니라면. 자리에 앉아서 주어진 과제를 해야 할 때가 많은 수업 시간에 행동형 아이들은 얼마나 좀이 쑤실까 싶어. 쉬는 시간에라도 좀 떠들며 충전을 해야 다시 앉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지내게 한다. 그러니 시끄러울 수밖에. 나 100명을 가져다 놓아도 나오지 않을 데시벨이 우리 반 20명으로 가뿐히 넘는다.
우리 반은 꾸준히 시끄럽다. 담임의 무능이라 치면 무능이겠지만 그렇게 여기지 않으려고 한다. 개인으로서의 나는 조용한 공간을 좋아하지만, 교사인 나는 딱히 조용한 교실을 선호하지도 않는다. 수업 시간에도 의미있는 역동은 반갑다. 서로 나누고 서로 배워야 제 맛이지. 시끌벅적한 공간에서 아이들을 가만 지켜보며 시끄러우면서 평화로운 것도 가능하지 않나, 선하면서 큰 목소리도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시끄러워도 된다. 다만 그 안에 평화와 배려가 깃들길 바란다. 부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