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의 반 타의 반이었던 재수로 미대입시를 무려 두 번이나 치르고 대학 입학과 동시에 입시 강사로 두 해를 보냈다. 강사로 일하면서 많은 학생들을 만났지만 그중 유독 나를 잘 따랐던 여학생이 있었다. 그녀는 유리멘탈에 그림 실력마저 우수하지 못해 애물단지가 따로 없었다. 전임 선생님에게 조금이라도 혼난 날엔 어김없이 나를 찾아와 울곤 했다. 그녀에게 말했다. 네 삶에 너무나도 중요한 순간인 점은 맞지만 그림에 쓰인 점수가 너의 삶에 대한 점수가 아닌 점은 기억하라고. 물론 그녀는 계속 울었지만 말이다.
지금의 입시에 대해 전혀 모르지만 그 당시 미대에 진학하기 위해 '사고의 전환', '발상과 표현'이라는 두 가지 과목이 있었다. 두 과목의 차이는 소묘가 있냐 없냐의 차이였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며 내내 강조했던 점은 동일하게 '조화로움'이었다. 하나만 미친 듯이 묘사해서 전체적인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학생 부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전체적인 완성도는 좋지만 디테일이 약해 변별력이 약한 학생 부류가 있었다. 그중 좋은 점수를 받는 그림은 단연 개체가 개체로써 분명한 역할을 하는 동시에 적절한 밀도를 가져 완성도를 높인 그림이었다. 포인트는 강조되고 배경은 포인트를 받쳐줘 첫 시선에 조화로움이 느껴지는 그림이 유독 좋은 점수를 받았다. 그 미묘한 간극과 조화를 이해하고 실행하는 것이 모든 학생에서 쉬이 가능했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무수한 과정을 이겨내고 대견히도 그녀는 서울권 대학에 진학했다. 그때의 인연으로 그녀는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매년 스승의 날이면 부끄럽게도 '쌤'이라는 호칭과 함께 연락을 해온다. 영국 유학 중인 그녀를 떠올리면 여전히 교복을 입고 내 앞에서 서글프게 울던 모습이 선한데 최근 연락에는 나이는 먹는데 언제 시집갈지 모르겠다며 어이없는 한탄을 하는 게 아닌가. 선생인 나도 안 간, 아니 못 간 시집을 말이다.
그렇게 조화로움을 강조했던 나의 강사 시절, 개체의 중요성을 연이어 강조하던 나의 가르침 안에는 이제야 깨달은 인생의 미덕이 있었다. 개인의 삶의 선명한 개체성과 그 방향성을 가지고 공동체에 포함되기도 분리되기도, 그래서 관계적 조화를 이루어내는 그 어렵고도 고단한 과정을 무려 10년도 더 된 시절 이미 통달했을지도 모른다니. 허허.
내가 생각하는 개체로써의 역할은 건강한 독립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생각한다. 늘 스스로를 잘 알아야 한다는 지겨운 문장을 글로 써내지만 그 초석은 자기 자신을 독립적으로 대하는 마음가짐에 있었다. 비록 지치고 무너지는 날이 있더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판단하고 책임질 수 있는 그 힘의 가치는 내게 언제나 중요한 부분이었다.
꽤 지난 일이지만 당시 유관부서였던 대리와 외근을 나갔던 날 그가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졌다는 말을 꺼냈다. 그는 평소 일에 대한 열정도 다분했고 말 수는 적었지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 생각해 왔었다. 아래 두 명의 동생을 둔 장남이었고 동생들을 알뜰살뜰 살피는 좋은 오빠이자 형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저 다정한 장남정도로 생각했는데 그와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는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마음이 생겨났다.
"어머니가 반대하셔서 헤어졌어요."
"뭔가 용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신 분이셨나 봐요?"
"사업하는 여자였어요."
이 대목에서 물음표를 띄웠다. 사업하는 여자가 왜?
"사업하는 여자가 왜요?"
"불안정한 일이라고 생각해서요."
"물론 월급쟁이보단 그렇겠지만 그 이유로 헤어지시기 힘드셨겠어요."
"아니요. 부모님 말이 납득이 가면 대부분 따르는 편이에요."
"많이 좋아하셨어도 부모님 의견이 납득이 가면 바로 헤어지실 수 있어요?"
"네."
아찔했다. 내 삶에 나타나는 남자들 중 그와 같은 남자는 없길 바라는 순간이었다.
"그렇군요. 충분히 대화해 보고 그 불안을 해결할 방법도 있지 않았을까요?"
"되려 상처받을까 봐서 마음이 사라졌다고 거짓말했어요. 사업 때문이라 하면 상처받을까 봐."
한숨이 나도 모르게 새어 나왔다. 차라리 사업 때문이라 말하는 게 그를 정리하는데 훨씬 더 나았으리라 장담한다. 그의 프로필사진이 가족사진으로 오래 유지되던 부분도 사실 내내 신기했었다. 본인이 꾸린 가정이 아닌 원가족 단체 사진을 프로필사진으로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기에 그저 화목한 가족인가 보다 정도로 생각했는데 가족에 대한 사랑이 다소 애착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대화 깊숙이 '가족'외에 '본인'은 없다는 점이 놀라웠다. 부모의 의견은 늘 내가 보지 못한 것들 보게하고 깊은 의미를 내포하기도 하기에 분명 새겨들을 필요는 있다. 그러나 내 삶은 나의 것이다. 내가 만들어가야 하고 내가 선택하고 책임져야 한다. 누구에 의해서, 누구를 위해서가 되면 삶은 방향성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의 삶을 모두 알 수 없기에 쉽사리 비난할 수 없지만 나는 부디 그가 머지않은 시기에 원가족에서부터 독립된 개체가 되길 바랐다. 이러한 독립은 공간의 독립으로 시작해 정신적 독립까지 이어진다. 나는 그래서 가족과 함께 지내는 친구들에게 자취를 권유한다. 나 역시 부모님의 전원생활로 강제 자취(?)를 시작하게 되었지만 내 삶에 자취 생활이 없았다면 지금보다 나약하고 주체적이지 못했을 것 같단 생각을 자주 한다. 오롯하게 홀로 있는 공간 속에서 나의 감정을 들여다보는 연습과 사소한 생활 습관 하나하나 적나라하게 알게되는 시간 그리고 내 삶에 주어진 작고 큰 선택들 앞에서 기꺼이 나답게 선택해 가는 그 순간들이 더해져 진정한 내가 되어감을 느꼈다. 적어도 내 사랑과 이별에 '엄마가-', '아빠가-'가 붙지 않았으니 말이다.
자취이야기를 하니 자연스레 지금 살고 있는 집을 계약하던 날이 생각난다. 딸내미가 처음으로 혼자 살 집을 보는데 부모님은 관심조차 없었다. 씩씩대며 혼자 집을 보러 다니다 괜찮은 집을 발견하고 가계약을 하려 마음먹었던 순간 엄마가 생각났다. 당장 전화를 걸어 엄마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엄마. 나 괜찮은 집을 봐서 계약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으면 한번 와서 볼래요?"
"엄마 지금 아빠랑 교외로 드라이브 나왔는데?"
"딸이 살 집인데 부모가 안 궁금하는 게 맞아?"
"너 살집인데 네가 마음에 들면 된 거지!"
우리 딸을 믿는다는 엄마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고 가계약을 했다. 당차게 사인도 하고 계약금이긴 하지만 적지 않은 돈을 송금하자 갑자기 어른으로 등극한 기분이 들었다. 강하게 컸다고 볼멘소리를 하지만 그렇게 키워준 부모님께 요즘은 오히려 감사하다. 무심의 내면에는 믿음과 성장하길 바라는 응원이 담겨있었다 믿으며.
여러 가지 추억들을 소환해 장황히도 썼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은 독립적인 개체로 살아가자는 말이다. 아무리 사랑한다 해도 가족은 독립적인 개체가 모여 하나의 공동체가 된 것뿐이다. 앞서 말한 그림 속 개체로써의 역할이 각자 잘 배분되어야 비로소 조화로운 결과물로 좋은 점수를 받듯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
당신과 내가 각자의 색을 가지고 만나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는 것. 비록 관계를 점수로 표기할 수는 없지만 좋은 관계로 이어가기 위해선 따로, 또 같이의 조화가 필요하다. 삶의 완성도를 위해서 말이다. 나또한 여전히 노력중에 있다. 늘 좋은 개체로써 살아갈 순 없겠지만 나다운 개체가 되기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