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495. 렌트프리 'Rent-Free'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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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후배와 대화 중 흥미로운 신조어 하나를 접하게 되었다.

'렌트프리(Rent Free)'

렌트프리? 고백하기 부끄럽지만, 처음 들었을 땐 '무슨 부동산 용어인가?' 생각했더랬다.

후배 녀석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멤도는 상황(생각 또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렌트프리'는 'Living rent-free in my head.(내 머릿속에서 공짜로 살고 있다)'는 영어 표현에서 유래한 단어다. 무슨 의미일까 싶어 사전을 뒤져보니 'She lives rent-free in my head!(그녀가 계속 생각나!)'라는 활용 문장이 있어, 그제서야 그 느낌과 의미를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 단어의 의미를 알게 된 후로는 유튜브나 틱톡에서 #rentfree 라는 해시테그가 유독 눈에 자주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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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나 장면, 말 한마디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머릿속 한 켠에 무단 입주해서는 집세도 안 내고 눌러앉아 있는 상태라니.. 만약 그 대상이 사람이나 사건이 아닌 특정 브랜드라면 어떨까?

브랜드 기획자 입장에선 상상만 해도 꿈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생각해보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기획들은 모두 소비자의 머릿속에 '렌트프리'로 입주한 것들이다.

굳이 브랜드 로고를 내세우지 않더라도,

특정 브랜드의 컬러나 디자인만으로 해당 브랜드임을 알아챌 때,

어떤 광고의 멜로디가 전혀 관계없는 상황에서 불쑥 불쑥 떠오를 때,

마트 진열대 앞에서 딱히 이유를 설명할 수 없지만, 손이 자꾸 특정 제품으로 향할 때,

이 모든 것들이 '렌트프리'의 결과물이다.

브랜드가 소비자의 머릿속에 공짜로 눌러앉아 있는 상태야말로,
모든 브랜드 기획자가 궁극적으로 노리는 목적지가 아닐까?

그렇다면 어떤 것들이 우리 머릿속에 렌트프리로 입주하는 데 성공할까?

크게 3가지 범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첫째,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건드린 것들

사람의 뇌는 미완성된 것을 더 오래 기억하는 특징이 있다고 한다. 심리학에서 이것을 '자이가르닉 효과(Zeigarnik Effect)'라고 부른다. 완결된 일보다 미완성된 일이 더 강하게 기억에 남는다는 이론이다.

장편드라마가 매회 극적인 상황에서 끝이 나는 것.

맞춘 시험 문제보다 틀린 시험 문제가 계속 뇌리에 남는 것.

이루어지지 못한 첫사랑이 오래도록 기억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자이가르닉 효과의 결과물이다.

광고든, 상품이든, 콘텐츠든 무언가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끝을 남겨두는 것.

그 '열린 결말'이야말로 소비자의 머릿속에 해당 브랜드가 멤돌게 만드는 훌륭한 장치이자 렌트프리의 씨앗이된다.


둘째, 예상을 벗어난 것들

우리의 뇌는 예측 능력이 뛰어난 기계다. 무의식중에 늘 다음에 올 것을 예측하고, 예측이 맞으면 빠르게 잊어 버린다. 하지만 예측이 빗나가는 순간, 뇌는 갑자기 깨어난다. '어, 이게 아닌데?'라는 그 당혹감이 기억을 붙잡는 장치가 된다.

기획자로서 나는 이것을 '예측의 배반'이라고 부른다.

포인트는 소비자가 어느 정도 예상하는 방향으로 가다가, 마지막 순간에 예상을 살짝 비트는 것이다.

처음부터 얼토당토 않은 색다른 시도는 오히려 소비자의 거부감만 키울 확률이 크다. 완전한 낯섦은 거부감을 만들지만, 익숙함 위에 얹힌 작은 배반은 렌트프리의 강력한 연료가 된다.


셋째, 나의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것들

광고를 보다가, 상품 설명을 읽다가, 브랜드의 슬로건을 접하다가 '이거 나 얘기 아니야?'라는 순간이 있다.

나와 상관없던 이야기가 갑자기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소비자는 그 브랜드를 '나를 아는 존재'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를 아는 존재는 쉽게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이 렌트프리의 힘을 현장에서 뼈저리게 체감한 순간이 있었다.

한번은 오랜 공을 들인 상품의 론칭 행사가 있었다.

상품도 좋았고, 준비도 철저했기에 나름 자신 있었다.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돌아온 반응은 예상보다 조용했다.

'좋은 상품이네요.'

'완성도가 높네요.'

긍정적인 평가가 줄을 이었지만 칭찬이었지만 묘하게 가슴에 남는 것이 없는 칭찬이었다.

며칠 후 다른 경쟁 브랜드에서 비슷한 상품을 론칭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우리 제품이 기능도 더 좋았고, 완성도도 우리가 높았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는 몇날 몇일을 고심하며 두 상품 모두를 세심히 들여다보았고, 끝내 경쟁 브랜드 방송 컨셉에는 해결되지 않은 감정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완벽하게 다듬어진 우리 상품과 달리, 어딘가 살짝 날것의 감각이 남아있었던 것이다. 살짝 부족한 정보나 구성은 소비자로 하여금 오히려 '나머지를 채우고 싶다'는 욕구를 유발한다. 즉, 자이가르닉 효과에서 말하는 약간의 '긴장감'과 '종결 욕구'다.

오히려 지나친 완성도가 소비자의 '렌트프리'를 막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설은 이후 꽤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남았다.

'너무 완벽하게 다듬어진 것은 소비자의 머릿속에 들어갈 틈이 없다.'

마치 너무 완벽하게 정돈된 공간에는 오래 머물고 싶지 않은 것처럼.

너무 완벽한 사람 곁에서는 왠지 긴장이 풀리지 않는 것처럼.

렌트프리는 완벽함이 아닌 여백에서 시작된다.

소비자가 스스로 채워 넣을 수 있는 그 작은 빈틈.

설명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

다 보여주지 않아도 상상하게 만드는 것,

다 말하지 않아도 '내 얘기'처럼 들리는 것,

그 여백이 소비자를 브랜드의 머릿속으로, 아니 브랜드를 소비자의 머릿속으로 끌어들이는 진짜 통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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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설명 과잉'이다.

홈쇼핑의 러닝타임은 통상적으로 1시간이다.

15초 혹은 30초짜리 짧은 광고로도 오롯이 상품을 홍보하는데, 1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하나의 상품을 설명한다고 하면 정말 쉽겠구나 생각할 수 있다. 물론 1시간이란 시간은 상품의 장점을 모두 나열하고, 기능을 빠짐없이 설명하고, 타깃 고객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한 번에 다 쏟아붓는 것이 가능한 시간이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 접근하면 '백전백패'다.

소비자의 뇌는 모든 것이 설명된 것을 기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이미 궁금증이 다 해소되었으니까. 다 알고 있으니까. 반면 무언가 완전히 설명되지 않은 것, 스스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 다음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 앞에서 소비자의 뇌는 멈추고, 되돌아오려 하고, 오히려 기억하려 한다.

기획자의 일은 모든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가 스스로 채우고 싶어지는 여백을 설계하는 것임을 잊어선 안될 것이다.


오늘도 지금 어딘가의 기획서에 상품의 특장점들이 빼곡하게 적히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 동료 기획자들에게 한 가지 제안하고 싶다.

그 기획서를 다 쓰고 난 후, 딱 한 가지만 지워보는 건 어떨까요? 라고..

'가장 하고 싶었던 말 하나.'

'가장 자랑하고 싶었던 것 하나'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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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빈자리가 어쩌면 소비자의 머릿속에 렌트프리로 들어가는 가장 좁고 강력한 통로가 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이다.




'사람들은 당신이 한 말을 잊는다. 당신이 한 행동도 잊는다.

하지만 당신이 느끼게 해준 감정은 절대 잊지 않는다.'

- 마야 안젤루(Maya Angelo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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