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344. 최가온 'Gaon Choi'

'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by 사마리아인

0213.



2월도 중순으로 접어들며, 추위가 한 풀 꺽인 느낌이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에선 밀라노-코르티나 동계올림픽이 한창이다. 이른 아침부터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대한민국의 첫 금메달 소식이다. 사상 처음으로 공중파 3사에서 중계하지 않는 올림픽이라 그런지 예년에 비해 올림픽 열기를 체감하기 쉽지 않지만, 어찌되었건 금메달 소식은 반갑다. 언제나처럼 '쇼트트랙'을 예상했는데 의외의 종목인 스노우보드. 심지어 '하프파이프'란다.

하프파이프(Half-pipe)는 거대한 파이프를 반(Half)으로 자른 것처럼 생긴 U자형 슬로프에서 스노보드나 스키를 타고 벽을 오가며 공중 회전과 점프 등 묘기를 선보이는 종목을 말한다.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의 선진국을 중심으로 젊은층이 열광하는 익스트림 스포츠계에서도 최고의 인기종목 중 하나다. 개인적으로 1세대 스노우보더들. 숀 화이트, 대니 카스, 켈리 클락, 제이크 버튼, 트래비스 라이스 같은 1세대 보더들을 동경하며 자란 국내 스노우보더 1세대로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올림픽 메달의 경중을 따질수야 없지만, 특정 종목의 경우 올림픽 1, 2, 3위의 의미를 넘어서는 경우도 있다. 미국 NBA 드림팀이 출전했던 '농구'라던가, 자타공인 최고의 인기 종목 '축구', 육상의 꽃이라 불리는 '100미터' 등이 대표적이다. 동계올림픽 역시 마찬가지다. NFL 슈퍼스타들이 출전하는 '아이스하키', 스포츠와 예술이 결합된 '피겨스케이팅' 그리고 익스트림 스포츠의 정점에 있는 스노우보드. 그 중에서도 '하프파이프' 종목이 갖는 인기와 위상은 남다르다. 그런 종목에서 대한민국이, 그것도 당당히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니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조금 부끄럽지만 개인적인 얘기를 좀 하자면, 나는 대한민국 스노우보드 1세대다. 스노우보드를 구하기도 쉽지 않던 1990년대. 어렵게 구한 장비에다가 알록달록 힙합 패션으로 치장한 채 스키장에 등장하면 '이상한 녀석들이네?'라는 스키어들의 따가운 시선을 온몸으로 받으며 슬로프에 올라야 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난다.(실제로 당시엔 공식적으로 스노우보더들의 출입금지를 선언했던 스키장들도 있었다)

하프파이프는 스케이트보드, BMX 등은 서구권의 익스트림 스포츠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종목이다. 때문에 다른 어떤 종목보다 젊고 역동적인 이미지로 그 팬층 역시 미주, 유럽을 중심으로 매우 두텁고 또 젊다. 숀 화이트, 클로이 김과 같은 선수들은 사실 올림픽을 넘어 전세계적 스타다. 그런 종목에서 대한민국의 작디 작은 꼬마아가씨가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말 그대로 세계적인 스타의 탄생이다. 아마 최가온 선수는 이미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유명인사일런지도 모른다.

20년 전 스노우보드가 처음으로 올림픽에 등장했던 나가노 올림픽에서 훨훨 날아다니던 해외 프로선수들을 보며, 10년 전 소치올림픽에서는 그 틈에서 당당히 경쟁하던 일본 선수들을 보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헌데 이제는 더 이상 그들을 부러워하기만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최가온 선수에게 개인적으론 절이라도 하고픈 심경이다.


올림픽의 인기가 예전같지 않다는 기사들이 많다. 이유는 미디어 환경 변화, 세대 교체, 경제발전에 따른 생활방식의 변화 등 구조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서도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문화인식 수준 또한 높아지며, 개개인의 명확해진 취향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문화가 한 몫 했으리라 짐작한다.

굳이 이런 올림픽이 아니라도 볼거리가 너무 많아졌을 뿐 아니라, 개개인의 생각이나 취향들도 다양해졌단 얘기다. 반대로 이번 '공중파 3사의 올림픽중계 포기'라는 초유의 사태도 단순히 독점권을 가진 한 방송사만 탓할 문제로 볼 것이 아니라 구조적 한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소위 메달밭이라 여겨졌던 전통적인 엘리트 체육 종목들이 점점 부진하고, 생각치도 않던 다양한 종목들에서 심심치 않게 메달이 나오는 걸 보면 이 역시도 대한민국 사회가 점점 다양해지고, 한편으론 성숙해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그런면에서 다양한 종목에서 선전을 펼치고 있는 평창키즈들의 선전이 반가울 수 밖에..


눈이 덮인 슬로프 위에 한 선수가 섰다.

수많은 시선이 모여들었고, 숨죽인 정적 속에서 그녀는 천천히 출발했다.

그리고 마침내, 금메달의 순간.

그날 가장 높은 곳에 선 사람은 태극기를 가슴에 단 '최가온'이었다.


우리는 종종 결과만을 기억한다. 금빛 메달, 환한 미소, 그리고 '최고(最高)'라는 단어들 말이다.
하지만 정작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시간들이 있었는지 깨닫지 못한다.

사실 최고가 된 사람의 삶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특별한 비밀 같은 건 없다.

대부분의 날들을 지독할 만큼 평범하게 버텨낸 보이지 않는 시간들이 있었을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넘어지고 또 넘어졌을 것이다.

아래서 보면 별 것 아닌 듯 보이지만, 돌처럼 딱딱한 하프파이프 슬로프에서 한번이라도 넘어져 본 사람은 안다. 그 얼음처럼 딱딱한 빙벽(氷壁)이 주는 공포(恐怖)를..

분명 가려린 그녀도 몸보다 마음이 먼저 흔들린 날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까지인가?'라며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시 보드를 들고 묵묵히 슬로프로 향했을 것이다.

우리는 '최고'를 하나의 사건처럼 바라보는 우를 범하곤 한다.
하지만 '최고'는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기하고 싶던 하루에 이어진 한 번의 연습,

남들이 쉬는 날에도 반복했던 기본 동작들,
스스로의 기준을 낮추지 않았던 수많은 선택들이 모여

'최고'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잘했다'가 아니라
'수고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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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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