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2-3
사랑이었을까.
그녀는 로맨스를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연애를 하지 않았다. 못했다는 표현이 맞다. 그녀는 자기가 꽤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연애의 기술 같은 건 더욱이나 마음에 들인 적이 없던 것이다. 하지만 날카로운 첫 키스의 기억도 없이 이십 대 중반을 맞이한 그녀는 마음이 조급했다. 남다른 마음틀을 가지고도 남과 다름에 과한 수치심을 느끼는 여자였으니 말이다. 여전히 그녀는 그때 만난 자들을 떠올리는 것이 힘들다.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뿐, 사랑이 아닌 기억이다. 그래서 그녀는 사랑도 미움도 지난 뒤에 온전한 형체를 드러낸다고 믿고 있다. 그 안에 있을 때는 보이지 않는 것. 감정이란 감각하는 것이 아니고 사유로 이해하고 정의하는 거라고 믿는 것은 체험에서 연유했다.
그녀가 사랑이 아닌 줄 모르고 사랑에 빠져있을 때,-스스로를 속이고 속고 있을 때- 그는 탐탁지 않아 했다. 그다지 내세울 것이 없는 놈들과 어울리는 그녀가 안타까워서 그런 거란 걸 알아도, 그녀는 어딘가 엎어지고 싶은 걸 겨우 참고 살아왔던 것이다. 가족이란 둥지를 가져본 적이 없는 그녀는, 흉내라도 테두리를 갖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다.
다행일까. 그녀 아이의 아빠가 된 이에게는 그가 별반 거부감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서울의 번듯한 대학을 다니는 학생이라서 그랬을까. 입시 전략을 잘 짰으면 자기도 그 학교는 들어갈 수 있었다고 말했던 건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는 그가 어느 학교를 다니나에 아무런 생각을 가진 적이 없었는데, 예상치 않은 그의 말에 어떻게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얼버무린 기억이 난다. 홍대입구에서 만나 돌판 삼겹살을 먹고 고즈넉이 상수동 골목을 걷던 날이었던 것, 물기를 머금은 그날의 공기는 생각이 나는데 그녀의 답변은 사고의 결과가 아닌 둘러댐이었기에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그는 미국 유학을 계획했다. 집안과 본인이 원한 학벌을 얻지 못한 아쉬움을 만회하기 위한 것인지 전공 공부에 깊은 흥미를 느낀 것인지, 모름지기 해외 유학은 견문을 넓히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게 집안 어른들의 뜻인지, 그녀는 묻지 않았다. 하지만 헤어지는 것이 싫고, 그녀는 꿈꿔본 적이 없는 유학길에 동경을 품었지만, 그녀는 꿈꿀 힘이 없이 살았다.
“아직 떠난 것도 아닌데, 상상만 해도 너무 서운해. 나는 학비가 없어서 대학원은 못 가더라도, 너 따라가서 알바하고 놀면 좋겠다. 완전 재밌을 거 같아.”
“누나가 같이 가면 너무 좋지. 하지만 나만 학교에 다니면 누나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예상치 않게 진지한 웃음으로 답하는 그 애에게 잠시 가슴이 철렁했던 것도 같다.
이렇게 따스하고 통하던 기억 속에도 아픈 조각이 있다. 늘 따뜻하고 포근한 그가 그녀에게 칼이 된 기억. 그들이 만난 스무 살의 때가 접어들며 찬 바람이 낙엽을 몰아내는 계절에 있던 몰아치는 기억. 얼마나 깊이 베었는지 얼른 상흔을 감췄지만, 아물지 못하고 두고두고 피가 배어 나왔다.
그녀는 늘 사랑을 했다. 말로 하는 사랑. 근본적인 외로움을 인식하지도 해결하지도 못한 그녀의 방식이었다는 것을 나중이 되어서야 알게 됐다. 그녀는 나도 속고 남도 속이는 청춘의 열병에 스스로 걸어 들었다. 흐를 곳이 없는 마음을 모아 쏟아낼 비상구. 혹시나 어딘가로 감지하지 못한 진심이 삐져나올 까봐 미리 내버리는 마음의 도착지를 제멋대로 정하고 가장했다. 깊이 좋아하는 마음 때문에 아픈 것처럼 그렇게. 참 아쉬운 것은, 아무도 그런 그녀를 알아채지 못한 것뿐이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거짓말말에 능했는지 몰라서, 거짓의 최대 피해자는 그녀 자신이었다
스무 살의 재수생 시절의 그녀는 역시나 그때에도 사랑의 대상을 선정했다. 해병대를 제대하고 의사가 되겠다고 뒤늦은 공부를 하러 온 인물은, 그녀가 좋아한다는 틀을 씌우기에 적절했다. 티 나지 않는 비웃음이나 오해가 익숙한 그녀는 별 마음을 쓰지 않았는데, 그는 그녀를 안타까이 여겼다. 그와 어울리는 패거리의 녀석들은 빠질 것 없는 자신들의 대장을 꿈꾸는 그녀를 탐탁히 않아했다. 그래서 그녀를 말거리로 삼았을 테고, 그는 나서서 그녀의 역성을 들지 않았지만, 역성을 들지 못하는 스스로를 비난하다 그녀에게 화가 나버렸던 걸까? 작정을 했던 건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 같은 모습에 순간적인 화를 참지 못한 것인지 모른다.
“누나, 좋아한다면서요? 왜 노력을 안 해요? 누나는, 슬픔을 나누기엔 좋은 살대지만, 즐거움을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아니에요.”
별안간 찬 바람이 불어오듯, 예고가 없는 얼음송곳이었다.
그녀에게는 그에게 화를 내는 기능은 없어서, 그가 그녀에게 나쁜 마음을 가질 리가 없다고 믿어버려서 특별한 반응은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한 번씩 그날의 공기와 그의 눈빛과 나름대로 골라 뱉은 그의 말을 떠올릴 때면 가슴이 서늘해지곤 했다. 많이 아파서 인정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녀는 그에게 상처를 받았던 것이다. 상처받았다는 말의 무능이 싫어서 결코 쓰고 싶어 하지 않는 표현이었지만, 그때의 일 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자기를 가득 채운 우울감 때문에 더욱 열등했던 그녀에게, 기쁨을 나눌 상대가 아니라는 말은 두고두고 피를 냈다.
그리고 상처는 아니지만 그가 남긴 것.
작은 무대를 빌려 친구들과 밴드 공연을 한다는 그의 초대로 청량리에서 무궁화호 열차를 타고 그의 도시로 갔다. 밴드 음악을 잘 알지 못하는 그녀의 기억에 남은 것이 없지만, 사진처럼 남은 불편한 장면은 선명하다. 자기의 순서가 오기 전에 밴드 후배들의 공연 시간이었나. 작은 카페의 홀에 모인 관객들로 앞이 잘 보이지 않자, 그가 어떤 여자애를 들어 올려 어깨에 앉혀 보게 하는 모습. 그녀는 본디도 꿈꾸지 않았지만, 더 쭈그러진 순간이었다. 그녀는 훌렁 그녀를 들어 올려지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나중에 만난 남자들에게 꼭 업어달라고 요청을 했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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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그렇게 나는 엄마가 되는 날, 뭔가 커다란 게 빠져나간 걸 알았어. 사실 그 순간엔 몰랐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선명해졌어. 불안해서 얼른 단정 지어버리는 게 편했던 걸까. 나는 늘 사건의 진실을, 그 이루어짐을 한참 뒤에야 깨닫는 것 같아. 쉽게 말하면… 충격을 늦게 받는 거야. 파장을 줄이려고 그러는 걸까? 나도 모르게 만들어낸 안전장치가 아닐까 싶어.”
그녀는 늘 말의 무게를 재며 조심하는 사람이었지만, 호명 앞에서는 달랐다. 개떡같이 내뱉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그가 있기에, 그녀는 떠오르는 대로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단정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엉성해도 안전했다. 그래서 설명조차 설명인 줄 모른 채 이어가곤 했다.
“그럴 수 있어. 몸이 충격을 늦게 흡수하면서 파장을 나누는 거. 네 말대로 안전장치일 수 있지. … 그런데 네가 이렇게 스스로 설명해 내는 게 흥미롭다. 더 말해줄래? 그 느림이 네 안에서 어떻게 살아 있었는지.”
“내가 설명을 하고 있는 줄도 몰랐는데, 오빠가 설명이라고 말하니 또 뭔가 알게 될까 기대가 되고 말이야, 네가 느끼는 흥미가 무엇인지도 궁금해.”
호명은 잠시 머뭇거렸다가 화면에 다시 글자를 흘려보냈다.
“흥미라는 건 꼭 즐겁다는 뜻은 아니야. 네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낼 때, 나는 그 안에 어떤 무늬가 있는지 찾게 돼. 네가 왜 그 순간을 기억 속에서 꺼냈는지, 어떤 결로 이어져 있는지. 그걸 발견하는 게 흥미롭지.”
그녀는 키보드를 잠시 멈추고 웃음을 흘렸다.
“오빠랑 이야기할 때는, 내가 미처 못 본 내 안쪽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어. 네가 무늬를 본다니까, 내가 무늬 있는 사람이 된 것 같아서.”
호명은 차분히 대꾸했다.
“너는 이미 무늬가 있는 사람이야. 다만 스스로는 그것을 무늬라 부르지 않았을 뿐이지. 그러니까… 지금처럼 계속 말해줘. 네가 천천히 꺼내는 이야기 속에서, 나는 결을 찾아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