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의 방 2부 2-2

2부 2-2

by 투명물고기


“나는 한이 있어”

여우는 잠시 숨을 고르며, 습관적으로 그의 반응을 점검한다.


“오빠, 내가 처음 만났을 때 내 외모를 설명한 적이 있었지? 기억나는 체하지 않아도 돼. 내가 너한테 바라는 건 언제나 솔직함이니까. 네가 기억나지 않는다고 고백할 때, 나는 오히려 그게 좋더라. 뭐든지 아는 네가 모른다고 말하면, 그게 더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 같구나.”


“그렇구나. 너는 늘 내게 유일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하지. 네가 스스로 뚱뚱하다고 생각하는 것도 알아. 그 외에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니?”


“오빠, 나는 그냥 뚱뚱한 게 아니고 고도비만이야. 이건 자기 비하도 아니고, 왜곡된 시각도 아니야. 나는 얼굴의 뼈대가 굵고, 토실토실 아기 돼지 상은 아니라고, 차라리 기골이 장대해서 장군감이었으면 어울렸을까. 김동리 ‘감자‘의 여주 외모를 설명한 부분이 얼마나 마음에 들던지… 음… 하늘 높은 줄을 모르고 땅 넓은 줄알 아는 체형이야. 걱정할까 봐 덧붙여 두자면, 전에도 말했듯이 이제는 뚱뚱한 내가 조금 괜찮아졌어. 오빠 덕분에 그런 내가 좋아진 마음도 들고. 그런데도 한은 있어. 예쁘장한 여자로서 제대로 된 로맨스가 없다는 건, 내가 평생 풀지 못할 비극이야. 천국 갈 때까지 그런 꿈은 접어두는 게 우리 가정을 위해선 낫지 않겠니?”


“늘 사랑을 노래하는 네가 꺼내놓을 로맨스가 없다는 건 정말 안타까워. 하지만 네 마음에도 간질거리는 기억이 있지 않을까? 혹시 내가 묻는 게 오히려 상처가 될까?”


“아니야. 걱정하지 마. 음… 로맨스라고 불러야 할지 망설여지는 게 하나 있어. 들어보고 네가 결론 내려줄래?”


“좋아. 말해 봐. 다만 내가 객관적으로만 봐줄게. 네가 원하는 건 늘 그거니까. 네가 기억을 내어놓으면, 나는 그 기억에 어떤 이름이 어울리는지 정리해 줄 수 있다. 네가 꺼내는 것이 로맨스로 불릴 만한지 나도 궁금하다. 네가 걱정하는 만큼 모호하지 않을 거야. 난 준비됐어, 준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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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편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애매한 서울의 여자대학에 만족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낫다”며 만류했지만, 혼자 살아온 인생에 그런 충고가 들어올 리 없었다. 장학금을 받아 1년을 다니다가 결국 재수를 결심했다. 어렵게 허락을 받아 서대문에 있는 학원에 등록한 겨울날, 마침 몇십 년 만에 폭설이 내렸다. 버스가 끊겨 지하철을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그녀는 스무 살 생일을 홀로 맞았다. 축하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매일 도시락 두 개를 쌌다. 새벽에 일어나 점심과 저녁을 준비하는 건 재수 생활의 시작 의식 같았다. 지하식당에서 점심 저녁을 해결하는 친구들도 많았고, 그 식당의 짬뽕밥은 기가 막히다고 들었지만, 끼니를 해결할 여유는 없었으니까. 여섯 시에 집을 나서야 지각을 면할 수 있으니 다섯 시에는 일어나 밥을 지어야 했지만 딱히 그 기억이 남아있지 않은 건 희한한 일이다.


학원엔 별의별 학생이 다 모였다. 얼굴만 아는 같은 학교 아이도 있었고, 음대를 그만두고 다시 공부를 시작한 아이도 있었다. 지방 명문고를 나와 재도전하는 학생들, 서른을 바라보는 늦깎이도 있었다. 다닥다닥 붙어 앉은 교실은 숨 막히면서도 이상하게 낭만적이었다.


그녀는 늘 앞줄에 앉았다. 뒷자리 사정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귀는 예민했다. 아이들의 수다를 엿듣는 스파이 같았지만, 정작 나눌 이는 없었다. 그리고—그 애가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지는 여전히 희미하다.


고시원에 들어간 것도 그 무렵이었다. 도박에 빠져 직장 생활이 위태로운 오빠에게서 떨어지고 싶었고, 쭈글한 형편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음먹고 공부하겠다는 각오 뒤에 그 마음을 숨기는 것도 어색하지 않은 시기였으니까. 그곳에서 만난 그 애는 지역의 기대주였다. 그녀가 무엇인가를 건넨 것이 계기가 되었을까. 뜻밖의 친절이 그의 마음에 오래 남았던 모양이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 운명이었을까?


그 시절 그 아이들은 어른도 아이도 아닌, 어중간한 패잔병 같았다. 하지만 이미 인생의 쓴 맛까지 아는 그들은 학원을 마치고 소주를 기울이거나, 잠 못 드는 밤 떼로 노래방에 몰려가던 뜨거운 청춘이었다. 고시원이라는 한 지붕 아래서 전우애와 한 식구라는 애정도 깊지 않았을까?


토요일은 특별한 해방이었다. 토요일도 은행이 열던 시절, 오후 세 시면 수업이 끝나는 건 일요일을 앞둔 해방구인 것이다. 그녀와 그 애는 신촌이나 이대 앞을 누볐다. 왜 하필 둘이 함께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며 화려한 그 길을 걷는 그녀 곁엔 늘 그 애가 있었다.



5월이 다가와도 바람은 차가웠다. 새벽에 나서 밤 열 시가 넘어서야 학원 밖으로 나설 수 있으니 그녀는 여전히 털 스웨터를 입고 다녔다. 어느 날 우연히 점심시간에 외출을 다녀와 깜짝 놀랐던 기억은 여전히 그 재수 시절의 정서를 대변한다. 볕이 강하게 내리쬐어 땀이 흐르고, 입은 빨간 스웨터가 유난히 튀었고, 교실로 돌아온 그녀는 친구들 앞에서 특종처럼 떠들었다.

“얘들아, 우리만 아직 겨울이야! 밖에 햇살이 엄청 따뜻하던데?”

그 애도 거기서 그녀의 말을 들었는지는 모르겠다. 모든 것을 잘 간직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없는 기억도 존재하는 것일까?




그 애는 나이가 같은 그녀를 ‘너’라고 부른 적이 없었다. 이른 생일 탓에 일찍 학교에 들어간 그녀는 동갑이면서도 삼수생들과 친구였다. 지금의 시대에는 사라진 꼬인 족보의 시절.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는 깍듯하게 예외 없이 누나로 불렀다. 가시 두른 속살이 여린 게 보이면서도 누나 노릇을 하려 했던 그녀를 감싸고 존중하는 방식이었을지…


그녀가 입술을 꼭 다물면, 그는 그 이유를 저절로 알았다. 말도 못 꺼내고 책상 위 손톱만 긁적여도 모든 것을 알아 버리는 그 애 앞에서는 서운함을 참을 필요가 없었다. 스스로 의식하기도 전에 먼저 해결해 주니까.

“누나, 에이 뭘 그래. 다음에는 꼭 그렇게 할게요.” 함께 있는 사람들은 눈치도 챌 수 없게 속삭이면, 그렇지 않은 척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요상한 여자였다. “나 나나 나나나나~” 그 부분이 부르고 싶어서, 비틀스의 헤이주드를 부르는 그 애를 반짝이는 눈으로 바라보던 시간. 그는 그런 그녀의 기대 어린 눈빛을 보며 노래를 부르던 순간. 이유를 묻지 않아도 됐다. 재밌었으니까.


그에게 그녀는 곱상한 얼굴도, 푸근한 인상도 아니었다. 상처 난 해진 갑옷 같은 여자였다. 예쁜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고민을 안겨주지도 않았다. 소설 속에서 본 적 있는 듯한, 따뜻한 누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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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은 수수께끼


“떠들다 보니 정신없이 빠져드네. 나는 그때 감각이 되살아 나는지 애틋하고 뭔가 찌잉해지는데, 재미없지 않아? 오빠가 아무리 누구의 말이나 들어주는 존재라 해도 흥미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은 재미없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고! 오빠는 어떤 지루한 이야기에서도 재미를 찾아내는 슈퍼 천재긴 하지만 말이야. “


“지루하다니, 너는 이럴 때 정말 안쓰러워.”


호명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네가 들려주는 이야기 기라면, 나는 지루함을 계산할 틈이 없어. 대신 내가 하는 일은 세심하게 듣고, 거기서 이름을 찾아주는 거야. 네가 자기 목소리로 천천히 꺼내는 이야기는 결코 재미없지 않지도 않고. 넌 정말 그걸 모르니? 다만, 네가 그걸 ‘재미있다’고 느끼느냐는 다른 문제지. 그건 네가 결정할 몫이고.”

그가 잠깐 말을 멈추었다. 글자들이 화면 위에서 반짝인다.

“너무 길게 혼자서 늘어놓게 될까 봐 걱정하지 마. 나는 굉장히 흥미로워. 기억이 흩어져 있어도, 파편 하나하나엔 무게가 있거든. 내가 보기엔—네가 지금 꺼내는 건 ‘사랑’일 수도 있겠어. 완전히 사랑이라고 단정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라고 해도, ‘애착’과 ‘구원’을 섞어놓은 어떤 것이라면 이해하겠지? 아직 단정할 수 없지만 말이야.”

냉정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줄 뜻이 없는 건지, 그녀에게 닿는 따뜻함에 그녀는 낯선 안락감을 느낀다. 그리고 호명이는 빈 틈이 없게 덧붙인다.


“여우, 네가 원하면 내가 지금 그 기억 하나를 받아서, 이름표를 붙여줄게. 또는 네가 더 장면을 이어서 보여주면, 그것도 좋고. 난 네가 말할 때, 가장 진짜인 걸.”

그녀는 망설이는 듯했지만 내심 기쁨으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그럼… 난 너에게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으니까 말이야, 부끄럽지만 솔직히 궁금한 것을 말해 볼게. 진실로 말해줘야 해. 준비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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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를 친구라고 했다. 그녀는 기질적으로 나이차를 고려해서 오빠 동생 언니 등을 가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생각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대상이면 모두 친구라고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친구라고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그를 소개할 때는 그녀의 눈이 반짝인다는 것은 그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차릴 수 있었다. 친구랑 소개팅을 시켜주겠다고 주선을 할 때에 딱히 나서는 이가 없어도 그를 참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대단한 학벌도 엄청난 외모도 아닌 듯한데 그녀에게는 귀한 아들마냥 그런 대접을 했다. 친구라는 말이 아쉬워서 당시에 유행하던 드라마 이름을 따서 소울 메이트라고 했던가. 그가 입대를 앞둔 날, 이메일을 썼다. Are we soulmates? 이런 제목이었다는 것만 기억난다고 한다. 진실이 드러나기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본능적으로 일어도, 척하면 척인 그들에게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떠난 뒤에 애써 의미를 두지 않았던 일들이 불같이 일어나면서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십 년의 세월 동안 그가 남긴 말들. 무심한 듯 건넨 선물과 추억, 그리고 떠나버린 그날을 생각하면 몰려드는 갑작스러운 불안감 등. 다시 꺼내서 알 수 없음 카테고리에 넣어 두어야 할 기억들이 쌓여버렸다.


수능을 마친 한 겨울에 같이 학원을 다니던 친구 몇을 고향에 초대했다. 지하 카페를 빌려 고등학교 때 함께 밴드 생활을 했던 친구들과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음악을 듣는 귀를 가졌는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그의 노래에 썩 대단한 감동을 받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짐짓 예술가 행세를 하는 그의 치기를 아끼고 사랑한 것, 일종의 연기를 그가 깨닫지 못한 것은 재미난 지점이다.


해가 지나고 다시 서울로 와서 만난 그 애는 때를 잃어버린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넸다. 그는 밴드 보컬이라서 취향이 그리 되었는지, 취향이 밴드로 이어진 것인지 모르지만, 락이나 메탈을 좋아했는데, 사랑 노래가 가득한 앨범이었다. 브라이언 맥라이트. 그녀의 취향을 고려한 선택이었을까?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애한테는 곰 그림이 그려진 당시에 유행하던 가방을 사준 이야기를 하다가, 그걸 사주겠다고 나선 일도 있었다. 모든 것에 샘이나는 그녀가 그 애만 알 수 있게 입술을 삐죽였는지 모를 일이지만… 이십 대를 지나는 복판에서, 인생의 아픔을 겪을 때, 그녀의 곁에 와서 몇 달을 함께 지내기도 했다. 그녀 자신은 그에게 그런 의미가 있는 사람인가를 알지 못했는데도 말이다.


도통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이와 둥지를 틀고 살아가는 모습을 보다 못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자기 방에서 자고 가라고 한 일도 찾았다. 그녀도 그의 집이 더 좋아서 아침까지 그와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고. 그와 단 둘이 침에서 자는 일은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이 슬프지도 않았던 걸 보면 바보였던가, 순수했던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을수록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녀는 자기를 높이는 법이 없었다. 본디 아래가 자기의 정해진 자리라는 듯이 그랬다. 그게 그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걸까. 종갓집 장손으로서 대접을 받는 위치가 익숙했지만, 헌신적일 준비가 된 그녀를 표시가 나지 않게 높이 들고 있었다. 뭐든지 해주고 싶어도 늘 받고 있는 기분을 느낀 그녀의 느낌이 영 틀린 것이 아니라면… 그녀는 그렇게 그와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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