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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Sep 25. 2023

사과 혹은 받아들이기

  한 달 전 이맘때, 언니는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다. 나만이 가족 연락망에서 살아남았다. 생애 첫 부녀 여행이 기폭제가 돼서 언니의 응어리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따지고 보면 여행에 아빠를 끼워 넣은 건 나다. 언니는 내게만 바다 보러 가자고 말하였다. 그런데도 동병상련의 동생은 눈에 밟혔는지 차단에서 면제시켜 주었다. 추석 연휴에 안 내려갈 거고 졸업 전시에도 나만 부를 거라는 언니의 화가 처연하여 열심히 멍멍이 사진만 보냈다. 언니는 부모님의 또 다른 자식이다. 동시에 나와 나이대가 같다. 아빠엄마가 이해 못 하는 지점을 나는 납득 가능하기에 어찌 보면 언니를 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는 건 부모님이 아니라 내가 된다.


  어릴 때는 언니가 무서웠고 커서 얄미웠다. 엄마는 언니의 사춘기 발발을 초등학교 4학년 때로 기억하고 있으나 엄마가 타깃이 되기 전에 나는 벌벌 떤 지 오래였다. 언니는 툭하면 때렸고 두들겨 패기도 했다. 조롱은 일상이었고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언니는 내 역사의 첫 폭군이다. 숙청하기 싫으면 귀향이라도 보낼 것이지 내시처럼 끼고 다닌 탓에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폭군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 태생적 기질도 있겠다마는 어릴 적 받은 상처가 크게 작용한다. 난 언니를 악인으로 기록하는 걸 관두었다. 언니는 화를 표출할 방법으로 폭력을 배웠다. 내게 공포를 물려준 건 잘못이지만 여파까지 감안하기에 언니는 어렸고 또 다른 피해자이기도 했다. 어른들은 언니가 왜 날 못살게 구는지 알아야 했다. 좀 더 과거로 들어가서는, 언니의 동심(童心)을 살펴야 했다. "네가 한 번 키워 봐, 그게 쉽나!" 소리가 나올 걸 알고, 요즘의 어른과 아이 관계는 다를 수도 있겠다만 내가 봐온 걸 말하자면....


  아이들은 좀 더 어린애가 놀이에 껴달라 하면 '깍두기'를 시켜준다. 그저 받아들이는 거다. 어른들은 몇 배나 어린 존재를 '어린이'로 받아들이질 않는다. 아이 대 어른이 아니라 사람 대 사람으로 려 한다. "이런 일로 왜 투정이니" 이마를 짚는다. 어른에게는 '이깟 일'이겠지만 겨우 몇 년 차인 아이의 삶에는 난관이다. 언니는 아이였을 때 몇몇 어른한테 공포를 느꼈고, 좀 더 자라서는 반항하길 택했다. 지금도 언니에겐 '어른'이라는 개념이 없는 수준이다. 장유유서의 정신이 똑바른 나와 달리 언니는 나이 상관없이 동격으로 대한다. 아이들이 스펀지와도 같다는 건 어른들이 더 잘 알지 않는가. 언니의 조롱에는 얼평이 상당수였다. "왜 내 얼굴 못 잡아먹어서 난리야 엉엉" 서러웠는데 이 또한 어른들에게 습득한 거였다. 성별은 같고 나이대는 비슷한 두 꼬맹이가 나란히 다니니 어른들 특유의 '비교' 화법이 나왔던 게다.


  난 태생이 조용한 편인데 주어진 환경 때문에 더욱 얌전해졌다. 생떼 쓰는 언니와 화나 있는 어른들 옆에서 참기와 침묵을 취했다. 아이가 고분고분하다고 안심하면 안 된다. 떼쟁이 아이게도, 소심이 아이게도 동일 이 있다. 난투는 언제고 나를 빼놓고 벌어. 나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행인 역할이었다. 마음은 물론 존재조차 어른들 눈엔 들어오지 않았고 그런 대우를 받으며 나도 날 지워갔다. 존재를 자각하는 데 한참, 마음을 인식하는 데 또 한참이 걸려서 사춘기는 뒤늦게 찾아왔다.  다 자란 애가 분통을 터뜨리며 한 말은 "내가 만만해요? 날 그만 무시해요!!"였다.




  언니는 내게 사과하는 걸 오랫동안 피했다. 때에 맞는 사과를 받지 못해서다. 내가 호소할 때면 "나도 그랬어, 내가 그렇게 보고 배운 걸 어쩌라고!"라며 더 화를 냈다. 까딱하다간 맞았다. 이제는 언니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기에 사과 받을 필요는 없어졌다. 내가 이 문제를 거론하면 언니도 자연스레 기억을 끄집어내야 하니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언니의 극악무도함은 중학생 때 절정을 찍었다 나이를 먹으 나아졌다. 하나 어릴 적의 면모를 여전히 지니고 있다. 튀어나오는 횟수가 줄었을 뿐이다. 어른들은 지금도 언니의 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라고 화내는 사람이 좋겠는가. 그렇다 해서 나까지 화낼 필요는 없다. "언니가 무슨 문제로 화가 났구나" 받아들일 뿐이다. 나도 연관되어 있으면 "내가 이러이러해서 속상했지. 미안해. 앞으로는 조심할게" 필요한 말 "그러니 언니도 이래줬으면 좋겠어" 당부를 한다.


  언니는 사과를 어려워하 잘 받아준다. 이는 언니의 장점이다. 연락이 한 달 동안 안 되니 보다 못한 아빠는 엄마와 함께 서울에 갔다. 언니와 소통하는 건 나뿐이었는 귀띔하지 않아서 언니는 깜짝 방문을 겪었다. 언니가 왜 화났는지 나는 안다. 부모님이 왜 답답해하는지도 안다. 궁금해하면 설명해 주는데 "얼른 풀어!!" 나서진 않는다. "언니는 이랬고 엄마는 이랬고 아빠는 이랬지. 그러니까 언니는 기분이 어떠하겠지. 그걸 바라보는 아빠의 기분은 이러하겠지" 추론의 결과를 들려준다. 한 달 전의 브리핑은 관계에 별다른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부모님은 걱정되기에 서울을 찾아갔다. 사과를 잘 받아주는 언니는 방문객을 문전박대할 성격이 못 된다. 속 좋은 게 언니인지 부모님인지 모르겠다. 나는 아닌 거 같다.


  사과하는 건 내게 어렵지 않지만, 개인적으로 사과받는 상황은 안 좋아한다. "이미 저질렀는데 뭘 미안해하니" 이렇게 싸가지를 밥 말아먹은 발언은 하지 않는다. 화도 별로 안 나다 보니 '내가 널 몰라? 받아들일 수 있으니 괜찮아. 더는 못 참겠으면 그때 돼서 화낼게' 싶은 마음으로 넘어간다. "뭘 잘못했는데?"라고 묻지도 않는다. 잘못을 알고 있는데 상대의 입에서 다시 열거를 듣는 건 피차간에 좋을 게 없어 보인다. 사과는 하기도 어렵고 받기도 어렵다. 다 큰 성인끼리도 어려운 일이 어른과 아이 사이에서 쉬울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인생을 더 오래 산 데다 온갖 곤경 겪었으면서 사과도 안 하고, 아이의 사과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어른은... 그 사람의 포용심을 아리까리하게 만든다.


  나는 어찌 보면 어른과 아이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아이들과 즐겁게 놀, 어른들과 진지한 얘기도 나눈다. 신경 쓸 게 많은 어른들의 기억은 침식되기 마련이지만 어린 나이에 맞닥뜨리는 순간은 세밀하게 새겨진다. 잘못을 따지기 전에 아이만이 기억을 짊어지는 건 불합리하다. 그런데도 관된 어른들은 미안하다는 말만 쏙 빼놓고 한다. 속내는 세 가지로 추정된다. '어른의 기억'만 놓고 보았을 때 자신의 행동은 합당했다고 여겨서다. 아니면 기억 자체가 없어서다. 그도 아니면 기억하고 있으나 사과하기 싫어서 회피하는 거다. 어째 추하게 다가온다. 더 선명한 기억을 놔두고 판단 기준을 '어른의 기억'으로 삼으니 비겁해지기 마련이다.


  "내가 정말 그랬다고?" "나 안 그랬어" "설령 내가 그랬다고 해도 네가 잘못했겠지" 주제넘게 첨삭해 보자면 "내가 그랬지" "그리 행동해서 네가 속상했겠다" "이러한 게 잘못을 알았다" "미안하다"가 듣기 좋다. 편파적어도 별 수 없다. 아직 어른으로 안 살아 봐서 어른의 입장은 모른다.  아이였을 때 이런 사과를 들었다면 어른들을 더 빨리 받아들였을 듯싶다. 우리 가족은 자식 대 부모로 일어난 한 달 전의 일을 성인으로 넘겼다. 트라우마와 얽힌 어른들은 언니가 지금 성인이라 해서 '어른답게' 해결하길 바라면 안 된다. 아이였던 언니에게 어른이었던 자로서 사과하는 게 올바른 해결법이지만.... 언제가 될진 알 수 없다. 나처럼 받아들이는 방법은 사과보다 높은 차원이라 '어린 언니'에게 강요하 미안하다. 속 터져하며 에 있을 수밖에.  


감성을 추구하는 언니는 개인 카페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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