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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밀과참 Oct 01. 2023

계획형의 괴로움은 길어져만 가고

연휴 넷째 날 새벽

  추석 연휴가 6일이나 된다는 게 우리 집에서도 희소식인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연휴 긴 거 참 싫다~!" 말할 때마다 그리 아리송하게 들릴 수 없었다. '놀면 놀수록 좋지 뭐'란 마음으로 미리미리 신나 하는 '학생'이었으니 말이다. 연휴 시작 전날에도 학교 안 나갔고, 연휴 끝나고도 들을 수업 없는 현재로선 휴식이라는 게 길다고 좋은 건 아님을 깨닫고 있다. "놀면 뭐 하니!" 부르짖을 만큼 심적 여유를 못 누리는 처지인 것도 있고, 눈 뜨면 맞닥뜨려야 하는 사람 얼굴이 셋으로 늘어난 것도 크다. 각각 타지살이 중인 언니와 아빠는 연휴 내내 본가 개념인 청주 집에 머물 예정이다. 명절에 특별히 갈 다른 집은 없다. 언니는 "추석에 부모님을 만나지 않겠다"는 폭탄 발언을 한여름 때부터 날렸는데, 민족 대명절이 다가오기 직전에 응어리가 풀려서 심야 버스를 타고 왔다.


  언니와 부모님은 행동에서 비슷한 부분이 많고, 나와 부모님은 외적으로 닮은 게 크다. 세 사람과 달리 나만 지나친 계획형이다. "오늘 영화나 볼까?" 이 질문은 내게 한숨부터 나오게 만든다. '오늘'이 붙기 때문이다. 허구한 날 '만약에'를 외쳐대는 내 친구들은 "너 유승호가 말해도 정말 안 보러 갈 거야?" 물을 게 빤하다. '만약에' 토크에 환장하는 나는 "영화관이 위치한 데가 서울이야, 청주야?" 확인하고 볼 테다. 시간 계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당연 안 보러 간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ㅎㅎ 아무튼 연휴 셋째 날(0930), 엄마와 아빠는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러 갔다. 공짜로 볼 수 있는 포인트가 말일에 소멸되는 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결국 동행하지 않았다. "영화는 언제 보는 거야?" 물음에 아무도 대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변할 게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 줄 알고 미리 정하니! 저녁에 되면 보고 안 되면 마는 거지" 나는 이마를 짚는다. "하루가 어떻게 흘러갈지 나는 알아야겠다고~~"


  내 본격적인 휴식 시간은 자정 넘어 시작한다. "1시까지만 쉬어야지" 말하는데 이는 내가 가장 못 지키는 다짐이다. 넘기는 건 당연지사고 심할 때는 새벽 2시가 되어가서야 양심에 찔려하면서도 휴대폰 놓을 생각을 안 한다. 그래도 괜찮은 게 아무리 늦어도 새벽 아닌가! 새벽은 가장 유동적이게 굴 수 있는 시간대다. 차질이 생길 경우 잠들기 전 계획을 수정하면 된다. 9월 30일 새벽의 나는, 저녁까지는 밖에서 보낼 것만 같은 예감에 휴식 대신 할 일을 어느 정도 해 두었다. 저녁 7시가 돼서야 비로소 나머지 계획을 수행하였으니 하루의 흐름을 추측하는 건 NO계획파들의 주장과 달리 적중률이 괜찮은 편이다. 글도 초고를 저장해 둔 상태에서 놀아야 퇴고를 제때 마칠 수 있을지에 대한 불안이 덜하지 않은가. 어찌 됐든,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세 사람은 다음 날의 목적지를 의논하였다. 시작은 이동거리가 괜찮은 오창 혹은 진천이었는데 강릉, 울산, 포항까지 나왔다. 10월 1일 자정에 확인한 결과 태안이란다. 안 믿는다. 우리 가족을 하루이틀 봐온 것도 아니고 차키를 쥐기 전까지는 바뀔 가능성이 태반이다. 차 안에서 목적지가 변경된 적도 있기에 "제발 기상 시간만이라도 정하면 안 될까?" 물었으나 "일어나는 대로 출발하면 되지!" 단칼에 씹혔다.


  "태안 가기로 했으니 태안으로 고고!" 혹은 "오창 호수 공원이나 걷지 그래?" 혹은 "속리산도 괜찮지 않나?" 혹은 "마트 가고 싶다" 혹은 "그냥 내일 나가고 오늘은 쉬자" 등등.... 나올 수 있는 선택지는 다양하다. 이로 인해 10월 1일 자 외출 계획은 책 반납 말고 정해진 게 없다. 정할 수 없다! 이게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우리 가족은 절대 알아주지 않는다. 집안 계획 중 사이클 운동은 연휴 첫날부터 이뤄지질 못한지라 빼버렸다. 실내 사이클이 있는 거실을 아빠에게 점령당해서다. <세계테마기행>도 못 보게 아빠가 리모컨을 꽉 붙들고 있다가 거실 바닥 혹은 소파에서 스르륵 잠들어버린다. 잠든 아빠 옆에서 사이클 타기엔 양심인지 효심인지 아무튼 마음이 껄끄럽다고 피한다. 아빠에게 "나 볼 거 있어" 말하면 리모컨은 주겠지만 휴대폰으로 유튜브에 들어가 텔레비전 소리보다 볼륨을 높일 양반이다. 가족과 있을 때 속으로도 실제로도 제일 많이 부르짖는 말이 "너무 시끄러워!"다. 연휴 첫째 날 새벽, 아빠가 터미널에 도착한 언니를 데리고 올 때까지 30분간 <세계테마기행>을 보았다. 도어록 소리가 열리는 즉시 텔레비전 소리는 아예 묻히고 말았다. 내 계획은 '사이클 타기'가 아니라 '세계테마기행 보면서 사이클 타기'인데 가족들은 "그냥 타!"만 외쳐댄다. 중요한 건 사이클 말고 <세계테마기행> 다시 보기다. 이는 휴대폰, 패드 다 필요 없다. 텔레비전으로 틀었을 때야 진가를 겪을 수 있는데…….




  9월 마지막 날이자 연휴 셋째 날에는 성묘를 다녀왔다. 출발 시간은 역시나 정해지지 않았고 알아서들 준비하다가 얼렁뚱땅 출발하였다. 끌리는 대로 식당을 찾았고, 있고 싶은 만큼 카페에서 머물다가, 돌아오는 길에 패스트푸드점 드라이브 쓰루를 이용했다. 엄청 배고픈 이가 없어서 햄버거 라지 세트에 감자튀김만 추가하였다. 집에 오자마자 내가 한 일은 상 차리기였다. 좌식용 밥상을 펼치고, 감자튀김을 접시에 와르르 붓고, 케첩은 두 종지에 나눠 짜고, 햄버거를 썰고, 제로콜라는 유리컵에 덜어 따라 둘씩 마실 수 있게 했다. 그사이 언니는 씻었고, 아빠는 복권방에 들르느라 곧장 안 왔으며, 엄마는 마른 옷들을 걷고는 수건을 다른 건조대로 옮겨 널기 시작했다. 집에 들어오면 먹는 줄 알았던 나와 달리 가족들은 "조금 이따 먹어도 되지 않아?" 생각해서다. '조금 이따'는 우리 집에서 마법의 어휘다. 어쩔 때는 곧바로가 되는데 30분이 넘어갈 때도 허다하다. 하루에 '조금 이따'가 세 번 나온다 치면 심하게는 1시간 30분을 흘려보내는 거다. 나 또한 휴대폰에 지배당한 사람으로서 폰 보는 건 좋아하지만 해야 할 게 있는 상태에서 무턱대고 폰만 만지는 일은 싫어한다. "시간으로 말해주면 내가 다른 일을 해도 되나 계산할 수 있잖아"라 얘기했을 때 이해하는 이는 엄마밖에 없다. 고로 엄마+멍멍이하고만 지내는 보통 때는 하루가 무리 없이 잘 흘러간다. 이번 연휴처럼 1(계획파):3(자유파)가 될 경우엔 쪽수에서 밀려버린다.


  다음 계획인 멍멍이 산책에는 줄 찍 그어졌다. 가뭄에 콩 나듯 벌어지는 '언니 동행'이 걸려서다. 사람 넷에 강아지 하나 구성으로 산책 나간 적은 종종 있는데 어떤 조합인지에 따라 달라진다. 대화 주제가 상극을 달리는 우리 아빠, 우리 엄마, 우리 언니 조합에 끼는 건 좋게 흘러가지 않는다. 높은 확률로 내가 폭발한다. 세 사람이서 다녀오라고 멍멍이를 맡기고는 밀려 있던 할 일을 시작하였다. 산책 이후 부모님은 영화 보러 갔고, 언니는 배가 고픈지 요리를 시작했다. 언니는 청주에 어쩌다 한 번 오며, 머무는 기간 불 앞에 서는 일은 더욱 드물다. 무슨 재료가 있는지, 그것들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도 모른다는 뜻이다. "집에 카레 없어?" "카레 가루 없어?" "파는 어딨어?" "굴소스는 어딨지?" "팽이버섯 써도 돼?" 질문 세례에 '차라리 영화 보러 가야 됐나?' 의구심이 들었다. 이 사이사이 "카레가루가 왜 없어?" "집에 파가 없는 게 말이 되냐" 등 단답이 불가능한 질문들도 있었다. 에어비앤비에 접속하고 싶어졌다. 집 근처에 믿을만한 빈 방이 있는지 알고 싶어서…….


  1/3은 농담이고 2/3이 진담이다. 아무튼 할 일은 무사히 마쳤다. 멍멍이 산책을 나갔으면 아슬아슬했을 듯싶다. 자정이 넘어선 유튜브에 들어갔다. 연휴가 시작되고 asmr 쇼츠를 즐겨 보고 있다. 원래는 쇼츠 시청도 달가워하지 않는다. 드라마 명장면이면 몰라도 asmr은 취향이 아니다. 그런데 'restock asmr'로 끝나는 쇼츠들이 심신의 안정을 주는 게 아닌가. 그중 미리 얼려둔 각양각색의 얼음들을 틀에서 빼내고 냉동실에 차곡차곡 정리하는 게 가장 취향이다. 오늘은 'packing order small…'로 시작하는 소품 포장 쇼츠도 연달아 보았다. 내 알고리즘을 해외 유튜버들이 지배하는 날이 올 줄이야. 온종일 말소리에 갇혀 있어서 그런가 아무 언어도 들리지 않는 쇼츠들이 내게는 절실해지고 말았다. 방 안에서 계획 수행할 때는 재즈나 피아노곡을 틀어둔다. 가사 있는 가요만 찾아대던 내게 이 곡조는 알라딘 중고서점 BGM에 그치지 않았는데… 방 밖에서 들리는 가족 화음에 신경 끌려면 잔잔하게 듣는 것도 아니고 이어폰을 낀 채 볼륨을 높여야 한다. 방구석에서도 멀미가 나는 이상 증후를 며칠째 겪고 있다. (아빠의 텔레비전 시청 소리가 화음의 8할을 차지한다)


  나열하고 보니 내 유난이 큰 듯싶으나 가족 사이에 잘잘못 따져서 무얼 하나. 고쳐질 수만 있다면 따지고도 남겠는데 가족이라 그런지 한평생 맞질 않는다. 나를 뺀 세 사람이 연휴를 편히 보내고 있는 걸로 받아들이고… 싸우는 일이 없거나 다투게 되더라도 금방 그치길 바랄 뿐이다. 추석 연휴가 6일이나 되는 건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나 오늘 자정, 엄마에게 "연휴가 언제까지지?" 물었다가 "3일. 화요일까지"란 대답을 듣고는 기겁했다. "거짓말!"이라고 부정해 버렸다. 받아들여야지.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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