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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김 Jan 23. 2023

과학 앞에서 의미 찾기

뇌를 조작한 사람의 인격은 인격이라고 할 수 있을까

5살 즈음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입원하셨던 적이 있었다.

기억이 많이 희미해졌지만, 하얀 병실에 석고 붕대를 한쪽 다리 전체에 감고 있던 아버지의 모습이 생각난다. 워낙 술을 먹고 집안에서 폭력을 예사로 휘두르는 아버지였기에 그다지 마음이 아프지는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날도 술을 먹고 차도에 들어가는 바람에 차에 치였던 모양이었다. 그 당시에는 차에 치인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아버지가 불쌍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어른들이 이야기를 다 나누고 병실에서 나올 때 즈음에 나는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다지 잘 울지도 않고 뭐든 꾹 눌러 참는 편이었는데도 그때는 정말 서럽게 울었다. 어렸을 때라 내 감정의 정체를 잘 몰라 그저 펑펑 울기만 했을 뿐이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런 감정이었던 것 같다. 인간이, 그것도 폭력을 휘두를 정도로 강한 인간이, 그렇게 쉽게 부러질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전까지 나의 세계에서는 인간은 항상 건강한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게 당연했는데, 멀쩡했던 인간이 망가져버릴 수도 있다는 걸 눈으로 확인해 버린 것이다.


생생한 인격과 영혼을 갖춘 존재로 보이던 인간이 그날 이후로 쉽게 망가져버리는 장난감처럼 느껴졌던 것 같다. 게다가 나는 장난감을 떨어뜨리기만 해도 장난감이 다쳤다고 생각하고 마음 아파하는 편이어서, 인간이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심하게 마음이 괴로웠다. 인간이 물건처럼 휙 부서져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 어린 나이의 나는 너무 슬프고 아팠다.







그렇게 여린 성격으로 자랐지만, 한편으로는 그 사건의 영향도 받았던 것 같다. 인간에 대한 개념이 좀 더 물건을 보는 듯이 변했다. 예를 들어, 나는 인간이 동물의 한 종류라는 사실도 쉽게 받아들였고, 뇌를 다쳐서 인격이 변화한 사람의 이야기도 사뭇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다소 유물론적으로 생각이 바뀐 것 같았다. 인간도 결국 물질로 이루어져 있고, 물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아버린 듯했다.


최근에는 그렉 이건의 SF 소설집 <내가 행복한 이유>를 읽었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 소설 중에는 뇌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나온다. 뇌를 건드리면 거기에 맞춰서 인식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게 된다. 다소 끔찍하게 여겨지는 소재지만, 나는 꽤 덤덤하게 소설을 읽어 내려갔다. 복잡한 회로를 가지고 있어서 그렇지 사실 뇌도 배관이 잘 연결된 물질일 뿐일 테니 거기에 맞춰서 인식이 변한다는 건 당연하게 느껴졌다. 어느 영화에 나온 대사처럼 인간이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사소한 조작으로도 변화가 생긴다는 사실을 납득하는 게 어렵지 않았다.


흥미로운 건 그렇게 냉철한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럼 인격이란 건 뭐지?' 하는 감상적인 질문도 떠올랐다는 것이다. 단순히 뇌의 전기신호를 튕기며 반응하는 게 인간이라면, 인격이라는 건 무엇일까. 뇌에 신호를 조금 변경했을 때 나타나는 반응들도 함께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걸까. 그 외에도 우리가 사랑하고 우정을 느끼는 모든 행위가 전기 신호에 지나지 않다면, 이 감정의 의미는 무엇일까. 나는 과학적으로 그것이 전기신호에 불과하다는 사실 앞에서도 그런 질문들을 떠올렸다.


과학적 사실에 의미를 부여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가 부여되든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닐 테니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단순한 전기 신호라는 과학적 사실을 넘어, 인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찾고, 행동과 감정의 의미를 찾았다. 왜 인간은 이성적인 판단과 과학적 사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걸까? 그것도 어릴 때 각인된 '인간은 다른 물건처럼 부서질 수 있는 물질이다'는 사실을 기어코 넘어서서 말이다.







주변 사람이 치매로 점점 기억을 잃어가고 인격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은 안타까움과 슬픔을 느낀다. 그것이 당연한 과학적 귀결이라도, 오히려 그걸 단순히 자연현상으로 치부한다면 무언가 비인간적이라고 느낀다. 치매에 걸려 망가진 한 사람의 인생에 사람들은 감정을 이입하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실에 의미를 찾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일 지도 모른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모든 일들에 도덕적 기준을 적용한다. 


오히려 아무 의미 없이 과학적 사실만을 가져다 쓸 때 문제가 되기도 한다. 도덕적 판단을 하지 않는다면 과학기술을 무기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고, 혹은 정말로 소설처럼 뇌 기능을 조작할 수 있게 되는 날에는 한 사람의 자유와 삶을 쉽게 망가뜨릴 수도 있다. 아주 어리석은 과학의 예시는 우생학인데, 지금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로 간주되고 있지만 한때는 최신 과학 연구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차별을 위해 태어난 과학은 도덕적으로 심각한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을 고통받게 하거나 죽게 만들었다. 이처럼 가치 판단이 없거나 왜곡된 과학적 사실은 위험하다.


어쩌면 우리는 이 위험성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에, 또는 마음속에서 올바름을 추구하기에 비인간적인 과학 기술에 거부감을 느끼고, 냉정하기만 한 자연의 법칙 속에서도 의미를 찾는 건지도 모른다. 








'인격'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만약 뇌 조작이 아니라 채찍으로 때리거나 협박에 의해서 행동하게 되는 경우에는, 그 행동에 그 사람의 인격이 반영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인격에는 그 사람이 자유롭게 행동해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자유의지로 자신의 삶을 결정하는 모든 태도를 '인격'으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뇌 조작을 어느 정도 수준으로 하는지에 따라서 그 사람이 인격을 상실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결정될 것이다. 


예를 들어, 분노 조절 장애가 있거나 깊은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분노를 조절하게 해 주거나 근거 없는 우울함에서 해방시켜 준다면, 오히려 그 사람들은 더욱 자유로움을 느끼고 자신의 인격을 더 선명하게 보여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자유롭게 자신의 행동을 모두 선택할 수 있는 사람에게 뇌 조작을 가해 근거 없는 쾌감을 맛보게 하거나 허무함을 맛보게 한다면 그 뇌 조작은 그 사람의 인격을 망가뜨린 거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어떤 과학적 사실이 주어졌을 때, 이렇게 인격을 생각하는 식으로 맞서며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과학적 사실뿐만 아니라 현실은 가끔 우리에게 어떤 잔혹한 사실을 직시하도록 만든다. 우리가 모든 현실을 비틀어낼 수는 없겠지만, 그 현실에 질문을 던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질문을 통해 의미를 읽어내고 인격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을 더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다 보면 더 많은 상황에서 더 도덕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따라서 과학적 사실 앞에서 의미를 찾는 건, 소용없는 일이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자연 현상 위에 인간으로서 추구하는 도덕을 구현해 나가는 일이다. 현실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놓였을 때, 더 나은 선택을 하기 위한 과정이다. 즉, 바꿀 수 없는 사실이 나타나더라도 그 의미를 묻는 건, 인간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호기심이자 옳은 길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UnsplashMoritz Kin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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