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간다
원시인 A는 파도를 구경했다. 파도는 똑같이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좍 밀려가기도 하고 가끔 철썩철썩 발을 때리기도 했다. 어느 날 원시인 A는 집채만한 파도를 보았고, 파도에 쓸려가 죽었다.
원시인 B는 매일 사냥을 했다. 배불리 먹을 때도 있었으나 가끔은 죽을 만큼 굶어야 했다. 그는 원시인 C 가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먹는 걸 보고 씨앗을 심기로 결정했다. 그는 열매가 열리면 굶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대인 D는 대출 금리가 낮을 때 전세를 얻었다. 금리가 오른 지금, 그는 이자를 갚느라 허덕인다. 그는 금리가 낮은 시기가 길어지기를 바랐으나 상황은 크게 바뀌어 버렸다.
현대인 E는 인생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질렸다. 절망을 거듭하던 그는 믿기만 하면 모든 일이 행복해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모든 일이 행복해지길 바라며 사이비 종교를 믿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잘 안 될 수도 있다는 복잡한 생각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신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게 확실했기 때문이다.
물을 한 그릇 떠놓고 그 위에 꽃가루를 뿌린다. 그러면 꽃가루가 불규칙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 현상을 '브라운 운동'이라고 한다. 브라운이 발견해서 '브라운 운동'이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그 유명한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을 이론적으로 설명했다. 꽃가루는 확률적으로 움직인다. 복잡한 설명은 접어두고, 이 꽃가루의 움직임을 통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만 알아두자.
통계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말은, 꽃가루 하나만의 움직임을 알 수 없다는 걸 의미한다. 모든 물분자의 움직임을 계산하고 꽃가루에 가해진 힘을 더 한다면 꽃가루 하나가 어떻게 움직일지 정확히 알 수도 있겠지만, 그건 불가능하다. 삶도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이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신경학적인 계산까지 더한다면 삶을 예측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불가능하다. 꽃가루와 인생은 어디로 갈지 모른다는 점이 닮았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자. 원시인과 현대인은 둘 다 불확실한 인생을 살지만, 불확실한 정도가 다르다. 현대인은 대체로 내일 어떻게 살지 예측이 가능하다. 내일이면 회사에 갈 것이고, 주말이면 늦잠을 잘 것이며, 때가 되면 저녁을 먹을 것이다. 그에 비해 원시인은 다음 날 무엇을 먹을지, 잠은 어디서 잘지 등 모든 것이 훨씬 불확실하다. 원시인의 삶이 좀 더 꽃가루에 가까운 셈이다.
이렇게 원시인과 현대인의 삶에 차이가 생긴 건 왜일까? 나는 문명의 발달이 그 차이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문명은 삶의 불확실성을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했다. 식량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기 위해 농업이 시작되었고, 사고나 병으로 쉽게 죽지 않기 위해 의학이 발달했다. 그렇게 발달한 현대 사회는 사회 보장 제도를 만들어냈고, 심지어 불확실성을 파는 보험이라는 상품까지 생겨났다.
그렇다고 현대인이 불확실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경기는 좋았다가 나빴다가를 반복한다. 코로나가 창궐하기도 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문명을 발달시키며 불확실성을 줄인다고 줄였으나, 여전히 꽃가루보다 더 복잡한 사회를 살고 있다.
인간은 이렇게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삶을 지속한다. 재미있는 건, 불확실성을 피하지 않고 즐기는 현상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위험을 회피하며 불확실성을 최소화하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안전하다는 확신이 있다면, 불확실성을 즐기기도 한다. 예를 들어, 게임은 의도적으로 불규칙하게 아이템 등을 배치하여 재미를 준다. 도박의 경우는 더욱 극단적인데, 불확실성에 빠져든 인간은 큰 이익을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이라도 불사한다.
그런 경우를 제외하면 불확실성은 대체로 스트레스를 유발한다. 시험에 붙을지 떨어질지, 앞으로 돈을 더 벌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 놓이면 어떤 선택을 하기가 힘들어진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사람들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해 불확실성에서 눈을 돌리기도 한다. 특히, 사회 보장이 충분히 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주 불확실성에 노출된다. 그러다 보면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 불확실성을 외면하는 경우도 생긴다. 누군가가 확실한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면, 그 말에 쉽게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 등에 빠진 사람들은 아주 확실한 보상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믿는다. 절박한 믿음이라는 건 이해하지만, 눈먼 확실성을 쫓은 대가는 결코 좋지 못하다.
문명은 많은 것을 덜 불확실하게 만들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꽃가루보다 더 복잡한 사회에서 살아간다. 예기치 못한 비극이 우리 사회를 덮치기도 하고 물가나 금리도 요동친다. 얼마나 복잡한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사회는 불확실한 것으로 가득 차 있다.
이렇게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인생은 꽤 무겁다. 인간은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하나하나 불확실함을 풀어가며, 불규칙하게 움직이는 운명을 발로 걷어차듯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쳐낸 꽃가루 같은 운명이 어떻게 다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앞을 트기 위해 인간은 운명을 향해 발길질을 한다. 예상할 수 없는 세상을 사는 건 그래서 꽤나 힘든 일이다.
물분자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꽃가루는 힘들 일이 없다. 하지만 인간은 힘들어도 끊임없이 선택을 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정확한 미래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하며,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본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을 떠올려 보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되, 그 다음은 하늘의 뜻에 맡긴다는 뜻이다. 어찌보면 운명론 같은 말이지만, 인간은 운명이 결정할 때까지 손 놓고 있는 존재는 아니라는 뜻도 된다.
확실성을 추구하다 보면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불확실성이야말로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원동력이다.
- 에리히 프롬
운명을 걷어차고 발버둥치는 모든 노력은 진보를 만들어 낸다. 에리히 프롬의 말대로 불확실성이 인간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불확실성을 줄이며 문명이 발전했듯이 말이다. 이리저리 어쩔 수 없는 운명에 휘둘려 사는 것처럼 보여도 인생은 이렇게 결과를 남기며 흘러간다.
불확실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은 개인이 생각해볼 문제다. 부정할 수 없는 불확실성 속에서 어떻게 살아갈지, 어떤 궤적을 남기며 살아갈지도 모두 개인이 결정할 수 있다. 물론, 생각하지 않아도 세상은 굴러간다. 다만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하나 늘리고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한 번 쯤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NewPhilosopher - 불확실성 속에서 나아가기>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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