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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지은 Feb 14. 2024

오로지 운이었다

어느 누구의 뒤척임도 느끼지 않고 오롯이 뇌가 깨서 일어났다. 어제 단 복숭아 색 커튼이 눈앞에 있고, 대각선 왼쪽에 놓인 원목 책상엔 아직 정리 못한 물건들이 그대로다. 원래는 책상만이 유일한 내 공간이었다. 그 옆에 새로 들어온 장롱은 흰 페인트 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느낌을 연출한 빈티지풍, 동그란 돌출형 체리색 문고리 포인트의 귀엽고 따뜻한 분위기에 마음을 뺏겨 선택한 물건이다. 비로소 이 공간이 진짜인 게 실감 난다. 수사자 얼굴이 회전하는 쓰레기통, 강아지 모양 전화기도 이곳에 있다. 여섯일곱 살 때 집에서 눈여겨보던 흰색 직육면체 스툴을 눕혀서 뽑기 한 물건과 엄마 화장품 미니어처 샘플 같은 것들을 올려두고 임시로 흐뭇해하던 때부터 본능처럼 갈망해 온 사건은 그렇게 일어났다. 처음 내 방에서 맞는 아침 겨울 공기는 콧구멍으로 들어오는 감촉뿐 아니라 냄새마저 사뭇 달랐다. 그날만큼은 낯선 동네의 이름을 딴 학교에서 다시 시작할 6학년 1학기를 앞둔 불안한 마음을 뒤로할 수 있었다.


엄마 아빠는 50대에 이사한 집에서 벽지를 처음으로 골랐다. 언니와 나를 위한 방의 벽지는 우리가 함께 골랐고, 벽지가 고를 수 있는 것인 줄은 그때 처음 알았다. 그런데 각각의 방에 맞춰 선택한 벽지가 뒤바뀌어 붙어서 이런 일도 벌어진다는 사실을 또 알았다. 인테리어가 처음인 엄마 아빠는 새로 입주하는 아파트에서 잠깐 영업하는 ‘인테리어계의 떴다방’ 업자에게 일을 맡겼었고, 서로 뒤 바뀌어 붙은 벽지는 원위치로 복구가 아니라 베란다 천장에 빨래 건조봉을 설치해주는 전혀 다른 보상으로 종결됐다.


그 벽지를 뜯었다. 성인이 되고도 시간이 한참 흘렀을 때. 자꾸 빠지는 장롱 문고리나, 원래 다른 방에 붙었어야 할 벽지 같은 건 이제 신경도 안 쓴 지 꽤 오래였다. 예전부터 보일러 온도조절기나 스위치, 문의 틀처럼 벽지 모서리와 만나는 곳이나 벽지끼리 만나는 지점에서부터 벽지가 이탈하고 싶어 한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뭘 어떻게 할 생각 같은 건 나지 않고 그냥 보며 지나쳤다. 같은 시간 나처럼 방이 아닌 집을 살아온 친구들의 생활은 분명 다르게 흘러갔다. 부모 집 속의 내 방과 어딘가 다르다 싶었던 그들의 집의 차이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그들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 조명을 바꿔 달거나 원룸 벽에 페인트 칠을 했고, 보기 싫은 부엌 문짝은 리폼하거나 어울리는 손잡이라도 찾아 내 교체했다. 코딱지만 해도 모두 한 번쯤 꿈꿔 본 복층 투룸에 살던 어떤 애는 월세가 부족하면 여행자에게 집을 빌려주고 돈을 메꾸며 자기 공간을 굴렸다. 나를 비롯한 친구들 집에서 몇 박을 했지만 말이다. 집을 점점 더 건드릴 줄 아는 사람으로 진화하는 친구들의 집을 함께 향유하며 간혹 이사를 도왔다. 인생의 상위권 재미를 차지하는 시간이었다. ‘집주인’은 아니지만 집의 주인으로 사는 그들이 불러들이는 이런저런 관계의 물살 속엔 늘 새롭고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박봉에 다행히 살던 집과 가까운 거리로 출퇴근을 하던 내게 독립은 여전히 수지 균형이 안 맞아서, 독립을 미루고 대신 방의 연꽃무늬 벽지부터 뜯기로 했다. 막상 뜯으니 벽이 아니라 미색의 종이가 나타났다. 실크벽지란 이렇게 종이가 두 겹으로 된 용품인 줄을 처음 알았다. 벽지라도 안 뜯어봤으면 여전히 몰랐겠지만 뜯긴 표면의 속벽지 느낌도 꽤 괜찮았다. 허물 벗은 방을 재정비한다고 가족 중에 혼자 이사한 것마냥 이동 가능한 살림살이를 몽땅 이리저리 옮겨 보며 나한테 맞는 배치를 찾았다. 붙박이장 안에서 사용 안 하던 수납 칸은 떼어 내 벽에 붙여 선반으로 쓰고, 안 입는 옷은 낡고 꾀죄죄해진 스툴 쿠션 커버 위에 둘렀다. 방으로 친구들을 불렀고, 친구들은 내 엄마 아빠의 얼굴을 알게 되었다.


마침내 첫 집을 구하게 되었다. 짐이 적지 않고 성격도 만만치 않은 두 사람이 같이 살 전셋집을 구하는 데 원하는 조건을 하나 둘 분명히 했다. 방은 두 개 이상 필요하고, 해도 좀 들어야 하고 등등. 두 달간 이 동네 저 동네로 보러 다닌 집이 40여 개. 예산에 맞춘 매물들의 특징은 대충 이러했다. 가는 길이 곧 등산길인 빌라, (영화 ⟨기생충⟩ 주인공 집의 화장실처럼) 문 열면 변기가 입구 바닥보다 높이 있는 오래된 '맨션', 열쇠로 걸어 잠그는 나무 새시 프레임의 창문을 열면 옆에 새로 들어선 건물 벽이 코앞에 나타나는 주택. 하루는 신축 빌라 매물 여덟아홉 개를 하루에 다 본 적도 있다. 인터넷으로 본 매물 하나를 구경하려다 명함에 무슨 실장 직함이 적인 안내원 이◯◯ 님의 성화에 반나절을 끌려다닌 것이었다. 중개인도 아닌 양복 차림의 내 또래 이◯◯ 실장님의 나보다 더 열정적인 집 찾기는 그 동네 몰린 신축빌라 한 동마다 두세 개 매물을 보여준 후에야 끝났다. 바로 결정의 말이 없는 고객을 꼭 설득하겠단 의지가 돋보이는 그에게 미안했지만, 굳이 여러 개를 확인할 필요 있나 싶을 정도로 비슷비슷하게 생긴 집들을 보면서 내 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택배함에 청결함까지 갖춘 그곳엔 (2년 전세 계약이긴 해도) 어딘지 모르게 오래 머무르고 싶은 모양이 정작 없었다.


오래된 집들의 알 수 없는 무슨 기운이라도 받은 건지 둘이 살 첫 집으로 40년 된 단독 주택 2층을 계약했다. (물론 가격 대비 면적에서 압도적 우위를 점한 공간이었다.) 낡은 것 빼곤 참 멀쩡했다. 집주인이 물건을 내놓기 전에 새시도 손 봤고, 모두 가장 싼 기본 제품이지만 변기도 벽지도 교체했기 때문이다. 화장실 변기 높이는 다행히 바닥 높이와 같았다. 위세가 등등할 만큼 거대하게 지어 놓고 20-30년만 되어도 더는 못 살 분위기를 조성하며 리모델링이든 재건축이든 어떻게든 새 부동산처럼 탈바꿈시키길 성화하는 아파트들보다 훨씬 더 오래됐어도 이 집 돌계단은 멀쩡해 보였다. 70년대부터 있던 집 처마의 옛날 나무 장식도 자연스러운 미가 있는 데다가 작은 앞마당엔 제법 오래된 무려 대봉 감나무도 있었다. 무옵션이지만 쓰리룸, 현관과 마주보는 방에서 연결되는 세모꼴 지붕 다락을 통과하면 (난간이 없어) 반드시 맨 정신에 이용하고 싶은 ‘테라스’도 나왔다.

여름에 이사했다. 처음 방을 가졌을 때보다 더 고요한 공기 속에서 눈을 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은 진짜였다. 내 집에서 일어난 첫날부터 알아서 부엌으로 가 아침을 깨울 커피를 내리고 시장에서 산 사과를 닦아 껍질 채 토막을 치고 기분에 토스트까지 구워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아침에 거실로 해가 들어왔다. 두 사람분의 책이 아직 노끈에 묶인 채 거실 벽 쪽으로 쌓여 있고 물건들이 제 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였으나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다.


벌어지는 벽지를 보며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아침 생각도 없던 때와는 달리 집에서 정말 많이 해 먹었고, 세입자로 가능한 집가꾸기에도 열심이 되었다. 요리에 관심은 있었어도 사 먹던 거의 모든 음식을 만들어 먹을 줄은 몰랐는데, 둘이 하는 외식값으로 장을 잔뜩 봐 냉장고를 채우는 게 삶의 기쁨이 됐다. 이런저런 사람들을 불러 먹고 마셨다. 나처럼 많이 해 먹는 사람은 가스레인지 상판과 전자레인지에 튀긴 음식물, 싱크대, 하수구, 쓰레기 처리 같은 일들을 마냥 방치해 둘 수 없었고, 그 밖에도 집은 매일처럼 요구하는 일들이 생기는 공간이었다. 나는 방구석에 차는 쓰레기통이나 방바닥을 굴러다니는 머리카락을 맘 내킬 때까지 마냥 방치하던 사람인데, 집이 생기자 아침저녁으로 청소기를 돌리고 정리를 하고 부엌을 열심히 닦았다. 간혹 나 여기 살고 있다고 신고하는 육중한 흡사 매미같은 바퀴벌레를 어찌할 수 없을 땐 전문 방역 서비스를 이용하고, 구청에 공공도로 소독도 요청했다. 맘에 안 드는 체리색 몰딩 새시 프레임을 뜯고 흰색으로 리폼했고, 거실엔 레일 커튼을 맞춰 달았다. 집안일들을 처리하는 방식과 빈도, 주도성을 두고 동거인과 격전을 주고받다 승자 없는 ‘혈전'도 몇 차례 치렀지만, 이웃과 예상 못한 갈등이 발생해서 함께 수습도 해봤다. 열의만 있다면 우리집은 안전하고도 온전히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공간으로 쓸 수 있어서 나는 우리는 많이 먹고 놀고 격투도 벌일 수 있었다.


작년 10월, 여느 때처럼 집에서 먹다가 ‘전세사기’ 소식을 접했다. 나와 친구들은 물론이고, 전세로 집 구해보지 않은 가족이 없으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사건들이었다. 집계된 피해 규모(서울만 5278억)만도 어마어마한 전세사기 피해는 특히 소위 ‘깡통전세'로 불리는, 시세가 형성되지 않아 매매가보다 높은 전셋값으로 계약이 이루어져 애초부터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할 위험이 큰 빌라에 주거하는 세입자 피해가 극심한 상황이었다. 악성 집주인과 중개인과 컨설팅 업체가 세입자의 보증금을 노리고 짜고 한 공작을 통해 사기성 높은 계약이 많이 이루어졌다는데, 지난날 하루에만 신축빌라 8-9건을 보여줬던 이◯◯ 실장님이 생각났다. 집을 구하는 시점에 부모 집에서 살지 않아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이 곧 집을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면, 내가 유유자적 이 집 저 집을 비교하며 무슨 집에 살고 싶은지 따져보긴커녕 애초에 그렇게 집을 많이 볼 시간이나 있었을까? 아니다. 열정이 대단하다 싶었던 이◯◯ 실장님이 보여준 매물 중에 하나를 계약했을 수 있고, 높은 확률로 그 계약이 깡통전세에 속하는 전세사기에 걸렸을 것이다. 모든 세입자의 스트레스를 극에 달하게 만드는 전세사기 사건으로 국회와 보신각 앞을 오가며 어처구니없게도 거의 없다시피 한 전세 세입자 보호 정책이나 전세사기 피해자를 위한 현실적인 특별법을 요구하느라 집에서 먹고 놀기는커녕 잠도 못 드는 상황에 처한 이가 내가 됐을 것이다. 부동산 계약에 별 의심을 품지 않고 세입자 차원에서 돈이 나가는 보증금반환보증도 들지 않았었고, 확정일자란 것의 의미도 잘 모르고 으레 도장을 받은 초보 세입자였던 우리가 전염병처럼 발생한 전국적인 전세사기 피해를 당하지 않은 건 오로지 운이었다. 전세사기가 벌어지는 방식들은 물론, 전세 보증금을 계약대로 돌려받지 못하는 일이 드물지 않은 현실, 계약 전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줄만한 금융 상황인지 세입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들은 우리 대신 전세사기를 당한 피해자들 노력으로 이번에야 알게 되었다.


살다 보니 들어갈 집이 있고, 그 안에서 쫓겨날 위험 없이 사는 게 그렇지 않은 삶과 얼마나 다른지 체감한다. 거주의 상황은 매일의 감정 상태뿐만 아니라 미래에 관한 상상력까지도 붙잡는다. 그런데 터질 게 터진 이번 전세사기 피해자 태반이 청년층이다. 자가 거주보다 임차 거주 청년이 우리 사회에 역대 최대(2022년 기준 82.5%)로 많은 시절에. 한데 그렇게도 많은 부동산 정책을 쏟아내면서 정작 전세사기가 이 정도로 판칠 수 있도록 전세제도의 구멍을 그대로 둔 채 주로 민간 금융 상품으로 청년들의 전세 계약을 ‘지원'해온 주체가 정부다. 전세사기 피해를 해결하는 정부의 의지와 태도가 이 정부가 한국사회의 미래에 정말로 관심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아닐까? 이미 상황은 벌어졌으니, 피해자의 회복을 도울 수 있는 정부 정책이 너무너무 절실하다. 범죄자에 대한 강도 높은 처벌은 어차피 사법부의 일이다.


나만의 물건을 가져보고 방의 벽지를 뜯어보는 일은 개인적으로 부모의 보호 울타리 안에서 가능한 놀이였다. 놀이 이상으로 스스로를 돌보고 삶을 운영하며 사회 구성원으로 굳건히 성장하는 건 그 사회의 울타리 안에서 가능해진다. 제발 영원히 집 구하기 무서운 한국사회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런 시공간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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