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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Nov 30. 2024

일상조각 ; 비가 오면 거리를 걷는다

  "적당히 비가 오는 날이면 종종 우산 없이 걸어요."

그러면 사람들은 굳이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았어도 대게는 '요즘 힘든 일이 있으시냐'거나, 궁상맞다거나 자의식 과잉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런가. 그냥 좋을 뿐인데.' 나도 굳이 대답하지는 않고 멋쩍게 웃어넘겼다.

  전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어보다가 스스로 보기에도 어휘력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얼마 전부터 집에서 틈틈이 국어사전을 읽고 있다. 그날 기분에 따라 아무 페이지나 펼쳐 읽는데 어느 날은 유독 시선이 오랫동안 머무는 단어가 있었다.

  희나리.

  익숙하지만 뜻을 몰랐던 단어. '채 마르지 않은 장작'이라는 설명이 나의 시선을 붙들었다. 희나리. 혹시나 이 장작은 비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싶어서였나, 글자를 곱씹을수록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비가 오는 날, 처마에서 뛰쳐나와 비를 맞으며 돌아다니는 장작의 모습을 상상하니 마냥 귀엽다가도 무슨 이유가 있나 묻고 싶어졌다.

  그렇구나. 누가 비를 맞고 있으면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이 드는 게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시 잘 생각해 보니 나도 비를 맞는 이유가 그냥 좋아서는 아니었다. 이 내용으로 글이 쓰고 싶어졌다. 다짐이 흩어지기 전에 외출 준비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카페에서 문서 편집기를 열고 비와 관련된 생각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를 맞는 이유로 운을 떼려니 막막해져서 가볍게 '비' 하면 떠오르는 것들을 페이지 속에 마구잡이로 집어 담았다.

  대부분 우산 없이 비를 맞고 있을 때에는 보슬비였고 가방이 없다. 귀갓길에 우연히 비가 오거나, 아니면 비가 오는 것을 보고 집에서 나왔었다. 한 번 비를 맞기 시작하면 최소 삼십 분은 걸었고, 늦은 밤 집 근처에 문 닫은 가게 앞의 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가게에는 부채꼴 철골 위에 플라스틱 판이 둥글게 덧대어진 처마가 있었는데 앞 공간 턱보다 고작 삼십 센티미터 정도 더 튀어나와서 비바람이 거세질 때마다 빗방울이 무릎 너머까지 들이쳤다. 종종 앉은자리 옆에는 캔맥주가 있었다.

  보슬비가 아니더라도 빗속을 걸어 다닌 적이 있었다. 기억으로는 두 번이었다. 삼 년을 만났던 사람과 정말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날. 집 근처에서 기다리던 그 사람을 보내고는 공동현관을 차마 들어가지 못하고 서있었다. 다른 한 번은 폭우 속에서 한 시간 동안 같은 골목을 몇 번이고 정처 없이 떠돌았다. 할머니가 식탁 정리를 하며 '네가 가장이니까 좋은 데 빨리 취직하고 성공해야지. 아빠처럼 되면 안 된다'라고 한 말에 내가, 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서도 그렇게 말씀을 하셔야겠냐며 소리를 질렀던 날이었다.

  "아빠처럼 되면 안 된다" 그 말에 대꾸할 자격이 있었을까.

  소설가가 될 거라며 하루에 일곱 시간씩 글을 쓰던 중학생 소년은 나이를 먹고 성인이 되어 전공과 관련 없는, 경력도 신입이나 다름없을 잡다한 부류의 직업을 거치며 여태껏 글을 써오기만 했을 뿐이었다. 첫 퇴사 후 일 년 반, 지금 다시 회사를 나와서 글을 쓴 게 열 달. 바닥에 쏟아진 이쑤시개 통처럼 메모장과 문서 파일에 여기저기 흩어진 글들을 모아서 정리했다. 나는 어떤 걸 쌓아뒀는가 하니 완성까지 못 가고 끊어진 글, 퇴고를 하지 않아 거칠고 비린내가 나는 글, 보잘것없고 부끄러워 쉽사리 꺼내지 못할 글, 그런 글 무더기뿐이었다.

  머리 한 구석에서는 글로 성공하겠다는 갈망이 늘 있었다. 그런데 태워낼 연료가 없다. 회사를 다닐 때 쓴 글은 없었다. 퇴사 후 돈이 없어 매일처럼 공립 도서관을 오가던 때, 점심 끼니를 거르면서까지 썼던 글들 중에서도 제대로 완성된 것이 하나 없었다. 변명들은 하루마다 그 위에 그 위로 덧붙여지고 나는 그것들을 묵은 때처럼 빗물에 불려 벗겨냈다.

  그래, 제대로만 마음먹고 쓰면 완성시킬 수 있을 거야. 회사 일이 바쁘니까, 힘드니까 지금은 쓰지 말자. 오늘은 퇴근이 너무 늦었으니까 쓰지 말자. 내일 쓰면 되니까. 묘사가 구리고 이야기 구성이 별로인 건 초고니까 당연한 거야.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마냥 비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저 거리에 나를 내버리고 젖어가게 놔둔 것이었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완결이나 실패보다 미완이 편한 이유로.

  나는 입에 단내가 돌아서 잠깐 카페 밖으로 나왔다. 좀 있으면 카페 마감시간이었다. 꽤나 오랫동안, 혹은 앞으로도 계속 비를 좋아한다고 다닐 것이었고 우산 없이 거리를 서성거릴 것이었다. 그렇지만 꼭 태워내 보고 싶은 글이 하나 있다. 시나리오든 장편 소설이든 어떤 형태로든 간에 반드시 제대로 된 모습으로 잔불까지 완전히 태워내고 싶은 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날씨를 확인해 보니 다음 주에 나흘간 비 소식이 있었다. 출근은 해야 한다. 결국은 우산을 찾아야 할 것이다. 어쩔 수 없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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