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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종이 Apr 29. 2017

좋은 집 잔혹사

  얼마 전 미국 CBS 방영 시트콤인 <빅뱅이론>을 보며 깔깔 웃어대던 장면이 있다. 밖에 나가서 놀고 싶은 라지가 친구 쉘던에게 나가서 놀자고 떼를 쓰며 조른다. 밖에 나가서 놀자고, 밖은 '좋은' 곳이라고. 그러자 괴짜 쉘던이 버럭 하는 말. 그렇다면 인간은 왜 '완벽한 내부'를 만들기 위해 그토록 오랫동안 노력했냐고. 하하 맞다. 인간에게 있어서 '외부'란 원초적으로 공포의 대상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그들의 '집', 즉 그들의 내부에 집착한다. 그러므로 당연히 집은 중요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또 기왕이면 '좋은' 집이면 더 좋다. 그러면 '좋은' 집이란 뭘까. 역세권이라던지 자녀 교육을 위한 학군이나 앞으로 개발해제되어 집값이 훌쩍 뛰어오를 노른자위 같은 곳? 아니 그건 '비싼' 집이 될 이유는 될 수 있어도 '좋은' 집이라는 물음에 대한 충분한 답은 못 될 것 같다. 이거 문제다. '좋은' 집을 갖고 싶으면 '좋은' 집이 뭔지는 알아야 될 것 아닌가. 어쩌면 인간들은 그토록 오랫동안 완벽한 '집'을 만들고자 노력했는데 성공은 커녕 그 조건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여기 이제 소개할 이야기들은 '좋은' 집을 만들고 싶었지만 영 뜻대로 되지 않은, 실패한 스토리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하는 '집'이라는 개념은 인공적인 건축물에다가 가족이 입력되어야 완성된다(1인 가구라 하더라도). 이런 가족과의 만남 없이는 '집'이란 그 자체로는 아직까지 별 감흥이 없는 단어일 뿐이다. 여기서 알맹이가 들어가야 그저 비바람을 막아줄 뿐인 건축물에서 비로소 우리가 생각하는 '집'이 되는 것이다. 자 이제 '좋은 집'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우리가 생각하는 일반적 가정(내부)의 이미지 대부분이 허상이라는 것. 각종 미디어 매체는 소리 높여 외치고 있다. 바로 바람직한 가정의 표준형을(가령 엄마는 남편과 아이를 위해 일찍 일어나 밥을 차리며 보람을 느끼고 다정한 아빠는 사랑스러운 자식의 뺨에 뽀뽀로 단잠을 깨우며 상쾌한 아침을 맞고 강아지를 산책시키는 따위의 것 말이다). 그것에 익숙해진 우리는 주변에서 그런 '표준형' 가족이 사실상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그 모습에 가까워지려 있는힘 없는힘 다 쓴다. 그 노력 중의 일환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곳에 가족사진을 건다. 당연히 그들은 활짝 웃고 있다.

<라스트홈> 집을 빼앗긴 가장이 다른 집을 빼앗으며 다시 가정을 되찾는다

 첫 번째 이야기는 영화 <라스트 홈 99 Homes>이다. 얼핏 보기엔 경제 위기로 인해 집을 잃은 자들의 이야기처럼 보인다. 줄거리는 대략 이러하다. 모기지론 담보 대출에 의해 자신의 집을 잃은 가장 '데니스(앤드류 가필드)'가 자신의 '집'을 되찾기 위해 자신과 같은 처지인 사람들을 그들의 집에서 쫓아내는 악독한 일을 하게 된다는 것. 어려운 말로 눙쳐보자면 즉 자본주의의 피해자가 가해자가 돼가는 과정을 그린 뭐 그런 영화다. 그런데 이게 '좋은'집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화는 노골적으로 데니스의 가해자적 행위가 만드는 가정 내부와 외부와의 간극을 카메라에 담는다는 것이다. 은행에 집을 빼앗기고 빚 갚을 돈이 없어서 구질구질한 모텔에서 임시적으로 가족이 구겨져서 살고 천진난만한 아이는 우울해지고 다정한 아버지와 더 이상 해맑게 장난을 치지 않으며 어머니와 자식 간의 대화가 줄어드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적인' 집이 아니다. 그러나 데니스가 자신의 '완벽한 내부'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가정(외부)을 파괴하기 시작하자 상황은 달라진다. 다른 집들을 은행에 헐값에 넘기고 다른 가족들을 무정하게 길거리로 내몰고 정부를 속여 지원금을 뜯어내자 데니스의 가정은 여유가 있어진다. 아니 좀 더 화목하고 '인간적인' 가정으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한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하호호 장난꾸러기처럼 장난을 치며 놀고 푸짐한 음식들로 다른 가족들을 초대하여 웃음꽃이 피는 저녁식사를 누리게 된다. 하지만 이런 장면 사이사이에는 이 '행복한 가정'이 완성되기까지의 큰 공헌을 한 희생자의 모습이 삽입된다. 그 희생자는 다름 아닌 고작 얇은 울타리를 사이에 두고 살았던 이웃 가정들이다. 이웃집의 산산조각 난 모의 이미지들을 불쑥 교차시켜 보여주는 의도는 뻔하다. 종종 사람들은 가장 '인간적인' (내부)을 위해 '비인간적인' 행위를 서슴없이 해야 한다는 아이러니. 사실상 허상에 가까운 완벽한 내부에 대한 집착은 외부에 무관심하게 만들고, 외부에 무관심해질수록 그들의 내부는 더욱 견고해지고 또 더욱 왜곡 된다는 것. 


 두 번째 이야기

  여기 또 '좋은' 집을 만들고자 노력하는 이야기 한 편이 더 있다. 영화 제목을 들으면 좀 갸우뚱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건축학개론>은 첫사랑의 풋풋함을 다룬 대표적 영화로 알려져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왜 하필 대학시절 첫사랑 로맨스를 다루는 소재로 '건축'을 선택했을까. 생각해보면 그렇다. 물리학개론도 정치학개론도 법학개론도 아니고 말이다. 그 답은 간단하다. 이 영화는 결국은 '집'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하자면 이 건축 로맨스의 주인공들은 '좋은' 집을 만드는 데 실패하고 미완성 공사로 남게 된다.

<건축학개론> 남녀 주인공과 그 주변인물들과의 관계가 건축으로 표현된다

 사실 집의 주된 기능 중 하나는 은폐다. 집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모를 노릇이니 말이다. 집을 다루는 영화답게 <건축학개론> 이 영화도 시작부터 본심을 숨긴 거짓말다. 은채(한가인-수지)는 몇십 년간 생사도 몰랐던 대학교 1학년 때 잠깐 같은 강의를 들었을 뿐인 남자 승민(엄태웅-이제훈)에게 뜬금없이 찾아와 불쑥 말한다. 집을 지어달라. 뭐 표면적인 이유야 그게 맞겠지만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거 관객도 다 안다. 집 지어달라는 거야 능청스러운 핑계고 사실상 딴 결혼 생활의 실패로 첫사랑 남자가 생각나서 수소문해서 찾아왔겠거니 하고 짐작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그들의 풋풋한 스무살에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하고 추리하며 회상하는 것을 다 제쳐놓고서라도 영화의 진행을 이끄는 것은 건축되는 집의 향방이다. 집이 건축되는 양상의 변화에 따라 인물들의 심리와 갈등 양상이 진행되는 것을 상징한다.

 

 최초에 제안된 설계도는 '신축' 설계이다. 그리고 극이 진행됨에 따라 '증축' 설계로 바뀐다. 신축이란 기존의 것들을 모조리 치워버리고 백지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즉, 과거의 기억 없이 새롭게 다시 집(관계)을 짓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관객들도 그렇고 승민와 서연이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들 사이의 해피엔딩을 막는 두 가지 장애물이 있는 탓에 관계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신축)은 불가능하다. 첫 번째 장애물은 승민의 약혼자의 존재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스무 살 시절의 승민과 서연 사이에 있었던 매듭짓지 못한 기억들이다. 이런 장애물로 인해 그들은 신축이라는 방향을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그 다음 형태인 '증축'으로 넘어간다. 기존의 집의 형태(장애물)를 그대로 유지한 채 진행하자는 것이다. 이를 통해 서연과 승민의 관계는 백지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이 된 서로의 여러가지 상황이 복잡하게 얽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당시 멋모르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던 이들이 이제 서로의 맘을 이해할 만큼 성숙했지만 이제는 서로의 진심을 알아도 어쩔 수 없다. 대표적 삽입곡인 전람회의 <기억의 습작> 노래처럼 너무 커버린 그들의 미래에 행복한 집을 짓기는 어려워 보인다. 자연스레 이들의 관계는 관객들이 바라는 해피엔딩이 될 수는 없다. 우여곡절 끝에 서로의 맘을 확인한 듯 그 시절 노래가 웅장하게 울리며 로맨틱하게 마무리 짓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그 관계는 불륜의 일종이다. 그들의 '집'은 완성되지 못한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아무리 떠들어봐야 실패를 성공보다 좋아할 사람은 없다. 확실하다. 눈 씻고 봐도 없다. 그럼에도 좋은 집을 만들기를 실패한 사례들에 대해 줄창 적어댄 것은 단순히 내 성격이 꼬여서만은 아니다. 요즘 한국에서 집이란 여전히 필수적인 것이지만 더 이상 당연하지는 않다. 이런 판국에 집에 대한 이런 경고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집에 대한 우리를 둘러싼 상황이 달라질수록 집에 대해 기존의 우리가 가지고 있던 상식들은 무너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차분히 '좋은' 집이란 무엇인지부터 시작해서 어떻게 만들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해 탐색해봐야 한다. 정말로 '좋은' 집에 살고 싶다면 말이다.


글/삼종이

일러스트레이션/강성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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