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도 에자일을 해야 할 때입니다.”
디지털 전환(DX)을 논하는 일본 기업 회의실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선언이다.
그러나 이 선언은 종종 현실과 충돌한다. 컨설팅 보고서에 정리된 이상적인 플로우는 현장의 리듬과 맞지 않고, 팀원들은 ‘애자일을 한다’는 말은 들었지만, 여전히 하루의 대부분을 회의와 보고서로 보내고 있다.
이 글은 일본이라는 사회, 문화, 조직의 맥락에서 에자일(Agile) 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탐구하려는 시도다. 도입을 넘어 ‘작동 가능한’ 에자일은, 기술이나 프로세스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태도와 심층 문화에 대한 변화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일본 조직문화의 핵심에는 ‘정합성(整合性)’이 있다.
회의는 많지만 논쟁은 드물다. 컨센서스를 통해 조직의 균형을 맞추는 데에 익숙한 구조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성과 품질을 담보해왔다. 하지만 그 대가는 느린 실행력이다.
반면 에자일은 정합성보다 실행을, 정답보다 실험을, 완성보다 반복을 중시한다.
여기서 첫 번째 충돌이 발생한다.
완벽하게 설계된 워터폴형 프로젝트 관리 방식에 익숙한 일본의 관리자와 실무자들은, 명확한 계획 없이 바로 실행하고 수정하라는 방식에 본능적 불편함을 느낀다. “이게 정말 프로답다고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조직 내에서 쉽게 고개를 든다.
하지만 ‘완벽한 계획’은 환상에 가깝다. 특히 복잡계의 문제를 다루는 오늘날의 비즈니스 환경에서는 더욱 그렇다. 고객의 니즈는 빠르게 변하고, 시장의 피드백은 계획서에 존재하지 않는다. 지속적인 피드백 루프를 돌리며 학습하는 실행 중심의 구조가, 가장 예측 가능한 조직 시스템이 되는 아이러니를 받아들여야 한다.
‘호렌소(報連相)’는 일본 조직문화의 근간이다. 보고(報告), 연락(連絡), 상담(相談)의 줄임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 원칙이자 충성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이 호렌소가 정보의 흐름을 제한하고, 책임의 이동을 차단하며, 자율성을 억제하는 구조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
에자일은 매일의 짧은 스탠드업 미팅으로 정보를 투명하게 공유하고, 모든 팀원이 자신이 맡은 일에 책임과 권한을 함께 가진다. ‘허락’이 아니라 ‘공유’를 통해 결정하고, 위계보다 기능 중심의 팀워크를 선호한다.
이 구조에서 호렌소는 재해석되어야 한다.
정보 공유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집단적 학습의 리듬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보고를 위한 보고가 아닌, 피드백과 제안을 위한 커뮤니케이션 구조로 재설계할 필요가 있다.
일본 조직은 ‘실수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미덕으로 삼는다. 클레임 제로, 품질 제일주의, 리스크 회피. 이런 문화는 제조업 기반의 시대에 강력한 경쟁력이었다. 그러나 불확실성이 상수가 된 지금, 이 문화는 오히려 조직의 학습 능력을 마비시키는 요인이 된다.
에자일은 실패를 허용한다. 아니, 오히려 작은 실패를 자산으로 삼는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실패하지 않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더 빨리 실패하고 배우며 다음 실행으로 나아갈 것인가’이다. 실패를 추궁하는 문화에서는, 누구도 리스크를 감수하려 하지 않으며, 팀은 정체되고 피상적인 개선만 반복하게 된다.
에자일이 작동하는 조직은 리더가 이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우리가 실패한 실험입니다. 잘하셨습니다.”
실패를 축하하는 문화가 없다면, 에자일은 문서에만 존재하는 단어로 남을 것이다.
일본 조직은 직급이 곧 책임이며 권한이다. 직책은 위계적이다. 명령은 위에서 아래로 전달되며, 결정은 승인 체계를 따른다.
하지만 에자일은 역할 기반(Role-based)의 운영 체계다.
리더는 명령자가 아닌 촉진자(Facilitator), 팀원은 지시 수신자가 아니라 실행의 주체다. 역할은 유동적이며, 책임은 집단적이다.
이러한 운영 방식이 일본식 조직에 정착하기 위해서는, 관리자 스스로의 정체성 변화가 필요하다.
관리하지 않는 관리자, 개입보다 관찰을 택하는 리더십이 필요하다.
수평적인 팀 문화는 구조의 문제가 아니라, 리더의 권한을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신뢰의 문제다.
오직 시간과 경험, 실패와 회고, 그리고 리더십의 행동을 통해서만 정착된다. 일본이 에자일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스크럼을 돌릴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는 실험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이다.
일본의 강점은 명확하다. 높은 품질의 기준, 꼼꼼한 실행력, 구성원 간의 충성도와 조직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은 에자일이 뿌리를 내리기에 오히려 좋은 토양이 될 수 있다. 다만, 그 위에 뿌릴 씨앗은 달라야 한다. 속도, 실행, 자율, 실패, 신뢰. 에자일은 시스템이 아니다.
일본의 조직이 이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조의 혁신이 아니라, 사고의 혁신이다.
에자일은 시스템이 아니다.
에자일은 문화다.
문화는 도구로 만들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