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장보다 생존

무조건 크게 성장하던 시대는 끝났다.

by Sam의 기억 궁전


한때 스타트업의 성공 공식은 명확했다. 빠르게 투자를 유치하고, 인력을 공격적으로 채용하며, 무조건 성장 속도를 높이는 것이 정답처럼 여겨졌다. 실리콘밸리를 중심으로 확산된 이른바 ‘블리츠스케일(blitzscale)’ 전략은 수익성보다 점유율을 우선했고, 지속 가능성보다는 기업가치를 키우는 데 집중했다. 기업가치가 1조 원을 넘는 ‘유니콘’이 되는 것이 모든 창업가의 꿈처럼 여겨졌던 시기였다.


하지만 지금, 그 공식을 따르지 않는 창업가들이 전 세계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고금리 시대의 도래와 경기 불확실성, 팬데믹 이후의 자본시장 변화는 창업 생태계의 기준 자체를 바꾸고 있다. 이제는 빠르게 크는 것보다 작게 시작해 안정적으로 생존하는 방식이 더 주목받고 있으며, 이를 상징하는 흐름이 바로 ‘앤티스케일(Anti-Scale)’이다. 이름 그대로 확장을 목표로 하지 않는 전략이다.


앤티스케일의 흐름은 먼저 ‘얼룩말 스타트업(zebra startup)’이라는 개념에서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는 유니콘과 달리 이익을 실현하면서 사회적 가치를 함께 추구하는 스타트업을 뜻한다. 특히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등 신흥 시장에서 이런 유형의 창업이 증가하고 있다. 외부 투자 환경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창업가는 처음부터 수익 모델을 고민하고, 자체적인 현금 흐름을 만들기 위해 집중한다. 이 과정에서 ‘부트스트랩(bootstrap)’ 방식, 즉 외부 자금 없이 자체적으로 사업을 키우는 방식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거에는 투자 없이 성장하는 것이 한계로 인식됐지만, 이제는 오히려 독립적인 창업가 정신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한편,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1인 창업’이라는 새로운 흐름도 강해지고 있다. 인공지능, 노코드 툴, 원격 협업 도구의 발전으로 인해 이제 혼자서도 서비스를 기획·개발하고, 고객을 확보하며,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1인 스타트업은 규모의 확장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삶의 방식에 맞춰 비즈니스를 설계하고, 특정 시장을 깊이 있게 파고들어 충성도 높은 고객층을 확보한다. 이들은 스타트업이라기보다는 크리에이터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전문성과 콘텐츠를 기반으로 디지털 제품을 판매하거나 구독 모델을 운영하고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이 단순한 구호를 넘어 실제 사업 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은 조직 구조와 자본 조달 방식에서도 이어진다. 코로나19를 계기로 리모트 근무가 확산되면서, 스타트업의 조직 형태 자체가 분산형으로 변화하고 있다. 창업 초기에 국내 인력만을 고려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전 세계에서 팀원을 모집해 함께 일하는 것이 당연한 환경이 되었다. Deel, Remote.com 같은 글로벌 인재 채용 플랫폼은 초기 스타트업이 쉽게 분산 팀을 구성할 수 있도록 돕고 있다. 자본 조달 역시 탈중앙화되고 있다. DAO(탈중앙화 자율조직), 커뮤니티 기반 투자, 롤링 펀드 등 다양한 대안적 투자 방식이 실리콘밸리 중심의 벤처 투자 시스템을 바꾸고 있다. 이제 스타트업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 어디에서나 시작될 수 있으며, 누구와도 연결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스타트업의 존재 목적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과거에는 ‘기존 질서를 파괴하고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 이른바 ‘디스럽션(disruption)’이 핵심 가치였다. 하지만 이제는 기술이 인간과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더 중요하게 본다. 정신 건강, 기후 위기, 정보 격차와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윤리적 기술’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는 스타트업들이 주목받고 있다. 내부적으로는 지속 가능한 조직 문화, 구성원의 심리적 안정, 투명한 의사결정 구조를 강조하는 기업이 더 많은 인재를 끌어들이고 있다. 성장만을 위한 성장, 수치를 위한 수치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크게 되지 않겠다’는 결심은 이제 하나의 전략이자 철학이 되었다. 모든 기업이 유니콘이 될 필요는 없고, 모든 시장이 확장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작고 단단한 기업이 오랫동안 사회와 고객에게 기여하며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것이 더 의미 있는 성공이 될 수 있다. 앤티스케일이라는 흐름은 이러한 가치를 기반으로, 전통적인 창업 공식의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지금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선택은 어쩌면, 크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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