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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비령 Jan 27. 2023

황혼육아

3대가 같이 살아내기

육아를 핑계 삼아 딸네와 합친 지 둘째 해에 접어들었다. 애초에 합칠 때 4년을 기한으로 약속했기에 이제 1/4분기를 넘긴 셈이다. 생각이 복잡한 것 같으면서도 단순한 나는 이 일이 그토록 힘들 줄 상상하지 못했다. 결혼 후에도 자기 인생에 자식은 없다며 딩크족을 고집하던 둘째 딸에게 남편이 강요하다시피 자식의 필요를 강조했고 딸의 강경한 입장 때문에 아이를 원하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던 사위의 맞장구에 딸은 고집을 꺾고 아이를 가졌다. 큰 딸에게서 손주를 봤음에도 유난히 사랑하는 둘째 딸의 임신에 뛸 듯이 반가워하던 남편은 자진해서 아이를 키워주겠다고 장담했다. 누가 키울 건데? 당연히 거의 모든 육아는 내 담당일 게 뻔한데도 남편은 그리 큰소리를 쳤고 나 역시 작은 딸에게는 빚이 있었다. 그건 둘째 딸이 백일이 되기 전에 프리랜서를 시작해서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유명세를 날리게 되면서 딸의 육아는 뒷전이었고 일에만 매달리다 보니 아이가 7세쯤 되었을 때 정신적인 문제가 생겼고 나는 일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아이는 회복되었지만 그때 입은 상처는 딸이나 내게 흔적을 남겼고 나는 은연중에 딸에게 빚진 마음이었다. 그 때문에 손녀는 남의 손에 맡기지 않고 내 손으로 키워줌으로 빚을 갚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또 그런 필요 외에 집값이 미쳐 날뛰던 그 시기에 전세를 옮겨야 할 상황이 된 딸은 불안감에 그야말로 영끌을 해서 자기네 전세 보증금보다 두 배 나 더 많은 전세를 끼고 상투를 잡고 집을 샀다. 전세금마저 다 끌어넣은 그들은 우리 집으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 방법이 최선이라 동의했고 그렇게 하는 게 육아에도 더 편할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단순하게 시작된 동거는 생각지 못한 변수가 너무 많았다. 방이 4개인 집에서 안방을 선뜻 그들에게 내줄 때만 해도 그들은 황송해할 정도로 고마워했다. 그러나 그 후의 생활은 내 계획과 예상이 여지없이 빗나가는  상황이 너무 많았다. 가장 큰 갈등은 사위와 나 사이에 벌어졌다. 세심하게 배려한답시고 베풀려는 내 호의는 사위가 원하는 것과 달랐다. 예를 들면 나는 예전부터 퇴근하고 돌아오는 남편이 편히 저녁밥을 먹는 걸 보면 참 흐뭇했기에 사위에게도 그런 저녁을 챙겨주려 했지만 그는 그걸 큰 부담으로 여기고 굳이 사양했다. 처음부터 내 호의는 그렇게 거절당했다.

또 우리 세대의 남편과 전혀 다른 사위의 육아방식도 부딪혔다. 딸이 산후조리원에서 퇴원하고 집에 올 때 나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맞이했는데 사위는 유튜브를 보며 연구를 거듭하더니 아가 목욕부터 자기 손으로 했고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그는 할미인 내 육아방식보다 인터넷의 정보를 훨씬 신뢰했고 은근히 내게도 그 방식으로 해주기를 원했다. 지난 3월에 온 식구가 코로나에 걸려서 고생할 때 아가도 코로나에 걸렸고 유난히 고열에 시달렸다. 밤새 열에 들떠 우는 아가 울음에 불안해서 서성거리다가 안방문을 열었을 때 옷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아이를 달래고 있던 사위는 몹시 당황해서 벌컥 화를 내다시피 하며 자기들이 알아서 하겠다며 나를 내몰았다. 그때의 당혹감과 모멸감이라니! 

그렇게 극성인 사위와 달리 딸은 산후 우울증인가 싶을 정도로 아가를 부담스러워했고 급기야 자기는 결혼생활에 맞지 않는 것 같다느니,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강아지만 데리고 살았으면 좋았을 걸 그랬다느니 기가 막힌 소리를 해댔다. 그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한 사위와 나 사이의 갈등이 큰 부담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런저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또다시 남자를 이해해야 하는 평생의 숙제를 또 한 번 치러야 했다. 50년 가까이 살아낸 남편을 이해하는 일도 버거워서 이젠 거의 포기와 체념으로 받아들인 상태인데 딸만 둘 키운 내가 사위라는 남자를 또 이해해야 하는 것이었다. 내가 진심으로 사랑을 베풀면 되는 줄 알았다. 합가 하기 전에 가끔 만나서 식사하고 맞벌이하는 그들이 먹을 반찬을 챙겨주는 정도의 호의를 베풀 때는 서로를 깊게 알지 못했고 이런 상황에 맞닥뜨리지도 않아서 그렇게 살아내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살아보니 사소한 생활 습관이나 생각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 쌓이면서 깊어졌다.  곁에서 지켜보는 남편과 딸도 힘들 수밖에 없었겠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모든 갈등의 원인이 나 인 것 같고 나 하나 참으면 그들이 원하는 평화가 올 것 같았다. 그때 내 주제가가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라는 심순덕 시인의 시였다. 왜 이 나이에 새삼스럽게 이런 힘든 상황을 자초했을까 내 발등을 찧고 싶을 정도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원하는 노후의 삶은 이게 아니었는데' 반복했다. 몇 년 전 제주 한달살이를 봄가을에 걸쳐 4번 하면서 제주로 옮겨 살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는데, 지금도 그때 남편과 날마다 3-4시간씩 걸었던 숲길이 눈에 선한데 그 모든 걸 포기한 대가가 이런 건가 싶어서 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 속에서도 아가에 대한 사랑은 갈수록 깊어졌다. 그즈음에  나는 일기장에 혼자만 삭여야 하는 푸념들을 쏟아놓곤 했지만 언제나 마지막 마무리는 '그래도 아가는 너무 예쁘다'였다. 그 모든 갈등을 넘어설 만큼 아가는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그 덕에 일 년을 무사히 채웠고 이제 3년만 더 채우면 나는 해방될 것이다. 남편은 그때 제주도로 가자고 하지만 그때 가면 예전처럼 몇 시간씩 숲을 누비고 다닐 체력이 남아 있을까 싶다. 

그런저런 갈등을 겪으며 어렵사리 서로를 이해하기도 하고 체념하기도 하면서 차츰 적응해가고 있다. 젊었을 때는 문제가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하고 넘어가야 되는 성격이었는데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인간관계에서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는 문제보다는 덮고 지나가야 하는 문제가 훨씬 많음을 깨닫는다. 덮을 만큼 서로 인내와 포용심을 키우는 게 지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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