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 육아하고 있는 할매의 간청
이제 환갑을 넘어선 주위 친구들의 사는 모습을 보면 진정한 복은 노후에 자식복인듯하다. 요즘 친구들이 사는 모습은 몇가지로 분류된다. 이제 마흔이 가까워오는 자녀들을 한명도 출가시키지 못해서 안달하는 친구도 있고 일찍 자녀를 결혼시켜서 손주 보는 일까지 어느정도 마무리해서 편하게 취미생활하며 세계여행 다니는 복많은 친구들도 있다. 그런가하면 자식들이 늦게 결혼해서 이제야 손주를 낳아 그를 키워야하는 할매가 된 친구들도 있다. 특히 전문직을 가진 출세한 딸을 둔 부모일수록 황혼육아의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에 비해 며느리들이 육아를 맡기는 경우는 많지 않은듯하다.
아무튼 이런 상황이고 보니 황혼에 육아를 감당해야하는 나이든 할매들이 사는 모습이 때로 웃플 정도이다. 일례로 출세한 외교관 딸이 외국으로 발령을 받고 엄마를 그곳까지 데려가서 육아를 해달라 부탁했는데 그 엄마가 요즘 한창 유행하는 트롯 가수에게 흠뻑 빠져서 그의 콘서트를 보고 한달 늦게 가면 안되겠느냐고 사정했다는 말을 들었다.
또 어떤 친구는 손주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되니까 그 딸이 그동안의 수고에 대한 보답으로 평소 그가 소원하던 남미 여행을 다녀오라고 수천만원짜리 초특급 여행권을 선물했단다.
튼실한 손주를 안아주느라 손목 근초염이 심해져서 수술할 지경에 이른 친구는 딸네와 함께 사는 그의 집에 사돈이 와서 손주를 봐주고 있다했다.
이렇게 전문직 딸의 뒷바라지 뿐 아니라 내 집마련이 시급한 맞벌이 부부의 아이를 돌봐줘야하는 생계형 육아도 많다. 하루라도 빨리 내집 장만하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황혼 육아를 해주는것이다.
막상 육아를 하다보면 각오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상황을 만나기도 한다. 일단 요즘은 어린이집에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4시까지(시립은 7시까지) 돌보아주고 딸네 회사에서 육아를 위한 혜택이 있어서 아침에 등교준비를 대충해주고 출근하고 나면 남편이 데려다주고 오후 3시반쯤 데리고 와서 딸이 7시쯤 퇴근전까지 돌봐주니 하루에 4시간 정도만 집중적으로 돌봐주면 된다. 어린이집 덕을 톡톡히 보고 있지만 그 정도의 시간을 돌봐주는것도 늙은 몸으로 감당하기 힘들어서 허리와 손목에 침을 맞으러 일주일에 서너번 한의원을 들락거려야한다. 게다가 자칫 비상사태라도 발생하면 사돈과 우리집 모두가 난리를 겪어야한다. 작년에 내가 낙상해서 심하게 다쳤을때 도저히 방법이 없어서 어린이집을 결석시키고 두주일간 사돈댁에 신세를 져야했다. 그분들은 어린이집도 못보내는 상황에서 오롯이 종일 아가를 돌봐야했으니 내가 너무 죄송하고 마음이 불편했다.
육아를 책임지면서 겪는 가장 큰 불편은 나의 유일한 취미인 여행을 다니는데 큰 제약이 있는것이다. 아가를 돌보기 전까지는 평일날 한가로이 여행할수 있는것을 은퇴후 가장 큰 특권이라 여겼는데 육아를 하면서 더이상 평일 여행이 힘들어지니 인파가 몰리고 숙박비도 비싼 주말에 여행할수 밖에 없는게 참 불편하다. 더구나 며칠씩 가는 해외여행은 꿈도 꾸지 못한다. 몇년전 제주도에서 한달 살이를 몇번 해보고 그곳에서 노후를 보내는 꿈을 꿨는데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우리 부부가 좋아하는 여행은 주로 숲길을 몇시간씩 걷는것인데 우리가 그렇게 걸을수 있는 건강이 있는 마지막일수도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것 같아 아쉬울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아쉬움에 비해 아가가 커가면서 주는 기쁨과 보람이 훨씬 큰것 같다. 특히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루하루 늘어가는 표현을 보면 신기할 정도이고 고집이 늘어가는것도 이쁘고 자기 주장이 강해지는것도 대견하다. 특히 남편은 우리 아가를 천재로 생각하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침이 마르게 칭찬하고 우리 부부와 아가 모두의 인생에 가장 귀하고 보람있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하기야 그는 아이 갖기를 거부하는 딸에게 '우리가 키워줄테니 하나만 낳아라'고 간곡히 권했지만 막상 그가 하는 일은 아이의 등하원을 도와주는 일 정도이며 기저귀 한번을 갈아준 적이 없다. 게다가 자기는 친구들과 일년에 서너번씩 여행을 다녀오곤하기 때문에 나처럼 여행에 목말라하지도 않고 자기 생활에 큰 지장이 없으므로 딸네와 함께 살면서 아가를 돌보는 일이 무조건 좋기만 한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