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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새미 Apr 03. 2024

주간 새미일기

2024.03.26(화)~2024.03.29(금)

2024.03.26 (화)

미국에 사는 친척언니가 한국에 왔다. 그리고 예정에 없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난주 목요일부터 어제까지 우리 집에 머물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면 쉬운 일이라 할 수는 없었다. 언니가 한국에서 해보고 싶은 것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사고 싶은 것들 살 수 있도록 알아봐 주거나 직접 구매해주고, 먹고 싶은 것들을 먹으러 갈 수 있도록 해주는 데는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가 들었다. 게다가 나는 아이를 둘이나 키우고 있으니 원래 하던 육아와 가사를 하면서 그 일들을 해야 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내 시간도 희생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목요일에 내가 정말 가고 싶던 (내가 좋아하는 작가를 주제로 하는) 책모임이  있었다. 원래 언니가 우리 집에 머물기로 예정이 되어있었다면 나도 그 책모임을 갈 생각을 애초부터 하지 않았을 텐데, 그날은 원래 내가 자유시간을 갖는 날이었으므로 나는 그 책모임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언니가 예약했던 에어비앤비가 문제가 있어 숙박하지 못하게 되면서 우리 엄마(언니에겐 외숙모) 집으로 급히 오게 된 것이었다. 고민이 되었다. 엄마는 책모임을 가지 말고 언니와 저녁을 먹으라고 했다. 엄마는 그날 예매해 놓은 뮤지컬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에 언니와 함께 할 수가 없으니 동생과 내가 언니와 시간을 보내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사실 난 그 말이 무척 서운했다. 본인은 뮤지컬 보러 가면서 날더러는 책모임을 가지 말라고 쉽게 이야기하는 엄마가 너무하다 싶었다. 나도 자주 갈 수 있는 책모임이 아닌 데다, 내가 좋아하는 그 작가로 하는 책모임은 앞으로 또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을 하원시켜서 동생네로 저녁을 먹으러 가면서도 나는 그 책모임에 가져갈 책을 들고 가는 미련을 보이긴 했지만, 결국 나는 나를 위한 시간(책모임 시간)을 포기하고  언니와의 시간을 선택했다. 어제도 그랬다. 언니랑 늦은 시간까지 이야기하다 잠이 들다 보니, 아침에 늦잠을 자게 되었다. 주말엔 상관이 없었지만 어제는 월요일이라 아이들 등원을 해야 했다. 9시도 넘어서 일어난 아이들을 깨워 부랴부랴 등원 준비를 하는데, 언니가 10시에 미용실이 예약되어 있다고 엄마가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내심 애들 등원 준비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는 데다 아이들 등원시키고 언니를 데려다주려면 미용실에 늦을 수도 있기에 엄마가 좀 언니를 미용실에 태워다 주길 바랐다. (게다가 내가 9시 넘어 아이들이 늦게 일어났다는 것을 엄마에게 이야기해놓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엄마가 9시 반에 자기는 운동을 왔으니 나나 동생더러 언니를 미용실에 태워주면 좋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나는 언니가 와있어 정신이 없는 통에 주말에 해야 하는 필라테스 수업 예약도 깜빡하고 있다가 늦게 수업신청을 해서, 이번주에는 2일밖에 안 열린 오전 수업 중에 하나를 신청하지도 못하고 대기를 걸어두었는데, 엄마는 따로 신청 없이 매일 갈 수 있는 운동을 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언니를 데려다줄 수 없으니 애 둘 등원시키느라 정신없는 날더러 언니를 태워다 달라고 하는 것이 또 퍽 서운했다. 엄마는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뮤지컬도 보고 운동도 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이렇게 동동 거리는 게 좀 억울하기도 했다. (사실 그 순간에는 좀 화가 났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겨우 신청한 필라테스 수업도 포기하고 언니 공항 마중에 따라나섰다. 사실 내가 안 간다고 언니가 공항에 못 가는 것도 아니었다. 엄마랑 동생도 함께 가기로 했기 때문에 내가 공항에 같이 가지 않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었는데, 나는 또 내 시간을 포기하고 언니와의 시간을 선택했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남을 잘 챙겨주는 사람이다. 엄마가 하도 날더러 성격이 드럽다 그래서 나도 내가 성격이 늘 드럽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성격이 급하고 감정이 잘 격해져서 그렇지 원래 정이 많고 따뜻한 사람이다. 그런데 평소와 달랐던 것이 있다면 내가 순간순간 서운하고 짜증 나는 순간에도 그것을 (내 성질만큼) 표현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원래의 나였으면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원래 내 성질대로라면 나는 엄마에게 서운하다며  막 짜증을 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성격이 드러운 게 맞나 보다.) 그런데 이번에 난 그러지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나 혼자 들었던 생각은, 이번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환대’를 가르쳐주시려고 했던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시간을 통해 내가 배운 환대가 있다면 그런 것이었다. 내가 원하는 게 아니더라도 그 사람이 원한다면 (하기 귀찮고 싫은 일이더라도) 나의 시간과 에너지를 희생해 그것을 해주는 것. 불편을 감수하는 것. 대가를 바라지 않는 것. 내가 아닌 타인을 있는 그래도 받아들이는 것.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그의 입장이 되어서 그의 편에 서주는 것. 그를 위로해 주는 것. 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그것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 이런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서 그에 대해 불만을 제기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남편에게 좀 징징거리기는 했지만ㅋ)  엄마가 이 일기를 읽을 것이기 때문에, 불만을 제기하지 않은 것이 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쨌든 나는 이 시간들을 감사하게 되었다. 언니와 이야기 나누는 시간들을 통해서 언니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되었고, 평범하지만 소중한 추억들을 함께 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엄마에게 언니가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여기 머무는 동안 진심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너무 좋았다고… (언니는 나에게도 그래서 너무 고맙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들으니 더욱 감사했다. 부족한 (때로는 속이 좁고, 이기적인) 내가 그래도 언니를 나름대로 잘 환대해 준 것 같아서 말이다. 사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희생했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면 내 마음이 더 깊어지고 풍성해졌다고 느껴진다. 어떤 책에서 그런 말을 하던데, “타자에 대한 환대는 결국 자신을 향한 환대다.” 맞는 말인 것 같다. 맞는 말이다.


2024.03.27 (수)

오늘은 엄마가 건강검진을 받는 날이다. 엄마가 건강검진을 받는 병원이 우리 아파트 바로 옆에 있는 대학병원이라 내가 엄마를 마중 나가기로 했다. 나는 시간 맞춰 가서 기다렸고, 얼마 후 수면 위내시경검사를 마친 엄마를 검진센터 복도에서 만났다. 엄마는 아직 수면마취 기운이 남아있는 듯 보였다. 검진 수납을 위해 계단으로 한 층 내려가야 했는데, 나는 혹시 모를 사고(?)를 대비해 엄마 부축해 드렸다. 수납을 마친 뒤, 주차장으로 내려가기 위해 우리는 엘리베이터를 타기로 했다. 나는 계단을 내려올 때처럼 엄마를 다시 부축해 드렸는데, 내 부축을 받는 게 조금 민망하셨는지 엄마는 괜히 이런 말을 하시며 말끝을 흐리셨다. “내가 정신은 멀쩡한데~” 나야말로 내가 엄마를 부축해 드리는 이 모습이 퍽 생경하다. 나는 아직도 내가 엄마의 보호자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 어색하다. 나는 사람들에게 엄마가 무척 젊어 보이신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엄마라기보다는 이모, 더 오버해서 말하면 언니 같다 하는 사람도 있다. 실제로도 내가 주로 (특히 육아에) 도움을 받는 입장일 때가 많기에, 나는 여전히 엄마에게는 철없는 딸인 것이 더 익숙하다. 그런 내가, 내 왼팔로  엄마의 오른팔을 받쳐 나에게 기대게끔 한 모양으로 같이 걷는 이 모습이 나는 괜히 어색했다. 그런 서로의 어색함을 무마시키기려고 했던 걸까. 정신은 멀쩡하다고 말하며 엄마가 얼른 먼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데 나는 웃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엄마가 오른편에 있는 층별 안내표에서 ‘B1’이라고 쓰여있는 칸을 눌렀기 때문이다. 대부분 승강기 버튼은 오른쪽에 있기 마련인데, 우리가 타려고 하는 엘리베이터 버튼은 특이하게 왼편에 있었다. 그걸 인식하지 못한 엄마는 오른편에 붙어 있던 층별 안내표를 누른 것이다. 그래도 엄마가 정신이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우리가 가려는 지하 1층을 제대로 누르기는 했다. ㅋㅋㅋㅋㅋㅋ 층 번호는 엘리베이터를 타서 누르는 거다. 엘리베이터를 타기 전에는 위, 아래 버튼만 누르는 건데 그 사실을 생각하면 엄마의 모습이 더욱 재밌기는 하다. 나는 다시 엄마의 오른팔을 잡고 막 웃었다. 덕분에 어색한 보호자는 다시 철없는 딸내미가 될 수 있었다. 그날 점심, 동생을 만나 나는 이 이야기를 해주었다. 동생은 직접 그 장면을 보지 못한 것을 무척이나 아쉬워했다. 역시 우린 아직 보호자는 어울리지 않는다. 아직은 엄마의 실수를 재미나하는 철없는 딸들이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엄마가 계속 더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2024.03.28 (목)

나는 동생이랑 성별이 같다. 3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예전엔 아니었지만) 우리는 지금 완전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해 비슷하게 아이 둘을 낳았다. 사는 곳도 비슷하다. 같은 지역에서 옆동네 산다. 그러한 이유에서 일까 우리는 겹치는 게 참 많아졌다. 얼마 전에도 점심을 같이 먹기로 해서 어디 가서 먹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내가 문득 한 식당이 생각나 그 식당은 어떠냐 이야기하자 동생이 “어!! 나도 그 식당 생각했었는데!!”라고 반응했다. 나는 “말도 안 돼! 거짓말!”이라고 대답했지만, 우리는 요즘 들어 퍽 자주 비슷한 생각들을 할 때가 많다. 육아나 가사 등 (둘 다 주부이기에) 관심사가 비슷해서일까? 우리는 SNS에서도 알고리즘이 엄청 겹친다. 그래서 같은 영상이나 정보를 접할 때가 많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같은 영상을 보고, 하는 생각도 비슷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어떤 외국 주부가 집 청소를 하는 영상이었다. 특별히 아이의 방을 청소하는 영상이었는데, 우연찮게 (비슷한 알고리즘의 영향으로) 우리는 그 똑같은 영상을 보게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상에서 잠깐 스치듯이 나온 인형들을 넣어놓은 ‘해먹’이 있었는데, 1초~2초 남짓 아주 짧게 나오는 그 해먹에 내가 꽂힌 것이다. 그 영상은 해먹에 대한 영상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그 해먹에 대한 어떠한 설명이나 소개가 없었다. 그런데 나 혼자 그 해먹이 인형정리 하기 아주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런 비슷한 해먹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엄청나게 검색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괜찮은 해먹을 찾지 못했고, 그로부터 한참 지난 다음 우연히 동생과 어떤 얘기를 하다가 내가 그 해먹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동생이 나와 같은 영상을 보았고, 동생도 그 영상에서 그 인형 해먹에 꽂혀서 인터넷을 엄청 뒤져보았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무척이나 흥분하며 그 사실을 신기해했다. 그 영상에서 전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그 해먹을 우리 둘 다 눈여겨보았고, 그 해먹을 사기 위해 둘 다 열심히 알아보았다는 것이 재밌었다. 결국 우리 둘이 하는 생각이 비슷했다는 사실이 우린 너무 신기했다. 사실 우리 둘은 성격도 다르고 스타일도 아주 다르다. 비슷한 점보다는 다른 점을 찾는 편이 쉬울 정도다. 심지어 자매지간인데 닮지도 않아서 사람들은 우리가 이야기해 주지 않으면 우리 둘이 자매라는 사실도 알지 못할 정도다. 그런 우리가 서로 이렇게나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우리는 그것이 30년 넘게 함께 해온 시간에서(같은 부모 아래서 자란 시간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퍽 위로가 되고 기분이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게 내 자매라는 사실은 위로와 즐거움을 넘어서 감사함이 된다. 그렇다.

2024.03.29 (금)

첫째를 하원시켜 집으로 걸어오는 길이었다. 하원길에서는 종종 내가 유치원에서 한 일들을 묻기도 하고, 아이가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아이는 대부분 즐거웠던 일들을 이야기하는데 (아이는 유치원도 선생님도 친구들도 모두 무척 좋아한다.) 오늘은 좀 다른 이야기를 해왔다. 건널목을 건너기 위해 초록불을 기다리며 서있는데 아이는 나에게 속상한 일이 있었다며 얘기를 시작했다. 짧은 이야기 속의 내용은 이러했다. 반 친구들과 산리오 캐릭터로 역할 놀이를 했단다. 자기는 ‘쿠로미‘를 했고, 누구는 ’ 시나모롤‘을 했는데, 어떤 친구 두 명이 같은 캐릭터(마이멜로디)를 하고 싶어 했다고 했다. 그래서 그 두 친구가 가위바위보를 했는데, 거기서 진 친구가 원하는 캐릭터를 하지 못해 속상했는지 가을이에게 너랑 안 놀 거라고 했단다. 아마도 가을이가 주도해서 시작한 놀이였던가보다 그래서 가을이에게 그 속상함을 그렇게 표현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을이는 그 일이 속상했다며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우선은 가을이의 속상함을 공감해 주고, 친구가 아마도 그 캐릭터를 못한 게 속상해서 그런가 보다 하며 친구를 공감해 주는 말도 해주었다. 그렇게 대화는 짧게 마무리되었고 초록불로 바뀌어 우리는 건널목을 건넜다. 짧은 대화였지만 나는 너에게 새삼 고마웠다. 너의 속상하고 불편한 마음을 나에게 이야기해 주어서 말이다. 우리가 그런 어려운 마음도 나눌 수 있는 사이여서 감사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네가 나에게 그러한 마음들을 계속 나누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언젠가는 나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일들이 더 많아지겠지만 네가 속상하고 슬펐던 일들 만큼은 나에게 이야기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그런 이야기가 더 하기 힘든 이야기들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가 계속 그런 사이이길 기도한다. 욕심일까? 욕심일게다. 그래도 욕심을 부리고 싶다. 내가 해줄 수 있는거라곤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 뿐이래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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