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네이밍'은 없어도 '좋은 네이밍의 기준'은 있다.
2021년 8월, 저의 마음을 크게 쓰이게 한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습니다. 한 제약회사의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를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제품의 컨셉에 대해 합의하고 이 컨셉에 맞게 네이밍을 해야 다음 단계인 디자인으로 넘어갈 수 있을텐데, 네이밍이 두 달 동안이나 결론이 나지 않으니 그 상태로 이도 저도 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같은 회사가 진행했던 이전 프로젝트에서도 이런 일이 벌어져 프로젝트가 좌초되었다고 하는데, 담당자가 달라져 일하는 양상도 다를 것이라고 예측한 상황에서 또 같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고 생각하니 지금도 입맛이 씁니다.
브랜드 기획자로서 가장 자신없는 부분을 꼽으라고 하면, 저는 '네이밍'을 꼽을 것입니다. ‘어떠한 것이 좋은 네이밍인가’에 대한 답을 내리는 것이 곤란하기 때문입니다. 네이밍을 다루는 책들에서는 분명히 좋은 네이밍이 갖춰야 할 음성학적, 형태적, 의미적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막상 선택의 과정 속에 있다보면 그 조건을 믿기 어려워집니다. 심지어 저는 잠깐이긴 하지만, 꽤 그럴듯한 규모의 브랜드 에이전시 안에 있는 네이밍 전문 부서에 있어 봤는데도 그렇습니다. 그 곳에서 모셨던 분이 낸 책에서는 그 멋진 네이밍과 슬로건들이 잘 정돈된, 매우 깔끔하고 합리적인 사고의 과정을 통해 나온 것처럼 묘사되어 있지만, 그 이면에 이미 이루어진 컨셉 기획 또는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토대로, 누군가 시시콜콜한 단어 조합부터 철학 용어, 처음 보는 외국어까지 동원한 자신의 언어 감각을 바탕으로 일주일에 몇 천개씩 적어 내려간 네이밍 파일을 내부에서 고르고 클라이언트와 함께 또 고른 뒤, 이를 반복하는 비효율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사실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기획자로서, 브랜드를 기획하면서 쌓아올린 논리에 따라 네이밍도 개발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이 가끔은 흔들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컨셉에 따라 우리가 사용해야 할 단어를 제안해 보고, 나름의 기준을 세워 스크리닝도 해 볼 수 있겠지만, 경험상 '네이밍이 팔리는 포인트'는 스크리닝과 반드시 연계되어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스크리닝마저도 추천안을 밀기 위한 요식행위처럼 처리되는 경우도 있죠. 또, 나름의 합의할 만한 기준을 요청해 봐도, 상표 문제로 다 들어줄 수 없거나, 그 조건들대로 이루어진 네이밍에 '글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이런 과정은 늘 더할 나위 없이 허탈하고, 이를 여러 차례 반복하다보면 오히려 내적 자기검열에 시달리면서 새로운 네이밍 아이디어를 얻기 어려워지고, 결과적으로 진이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네이미스트들이 늘 '네이밍에 객관적인 정답은 없다'고 하는 모양입니다.
네이밍을 처음 접하고, 이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이들이 갖는 의문은, “우리가 기획해낸 컨셉과 클라이언트의 마음에 부합하는 네이밍을 만들 수 있는 효율적 방법이 있을까?” 정도로 정리됩니다. 이런질문 속에는, '컨셉이나 프로세스는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지만, 후자인 '클라이언트의 마음'은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클라이언트가 기획자와 같은 정도의 브랜드 또는 네이밍 지식 체계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보장이 없으니, 결국 결정하는 사람 마음대로 되는 것 아니냐는 것이죠.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 마음을 얻는 것이 네이밍의 핵심이고, 그 마음이 맞춰지지 않으면 어떠한 네이밍도 팔 수 없습니다. 저를 포함한 초보 네이미스트들은 네이밍에 들인 고생과 공, 논리 등을 크게 여기고, 이를 위해 좋은 의미의 단어와 높은 컨셉 및 형태적 · 언어적 적합성, 그리고 이를 이룰 수 있는 프로세스나 가이드에 목을 맵니다. 그러나 이는 네이밍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틀일 뿐, 이것만으로는 네이밍을 '팔 수는' 없습니다. 이 네이밍을 '판다'는 속된 말 아래에는, 이 또한 상품처럼 그 자체가 가진 기능 뿐 아니라, 고객이 이것을 사야 하는 존재의 이유를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박한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즉, 네이밍의 과정은 단순히 이름을 짓는 것을 넘어, 함께 네이밍을 만들고 이를 결정해야 할 사람들의 생각과 의도를 읽음으로서 그들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생각이 그들의 생각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기준을 심고 함께 정렬해 나가는 지속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사실 네이밍 작업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는 것은 어떤 네이밍 기법이나 프로세스가 아니라, 무한히 넓은 가능성의 영역을 우리의 컨셉과 클라이언트의 니즈에 맞게 좁혀 나가는 과정 가운데 있을 겁니다. 다시 말해, 네이밍 개발은 사람마다 다르고 시점마다 달라지는 ‘감도’에 의존하지 않고, 네이밍을 둘러싼 사람들 간의 '합의'를 만드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조금 엉뚱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지금이야 회사 이름을 짓는 일도 CI라는 이름으로 브랜딩 전문가와 네이미스트가 도맡아 하고 있지만, 이런 일이 생소했던 30년 전으로만 돌아가 보면, 이 역할은 '동양철학관'이라는 곳에서 도맡아 했습니다. 맞습니다. 사주와 팔자, 토정비결과 무속신앙이 점철되어 있던 그 곳은, 지금은 몇 남지 않았지만 아직도 '작명/개명'과 함께 '상호'를 지어준다는 이야기가 붙어 있습니다. 어쩌면 국내 최초의 네이밍 에이전시인 셈이죠.
이름을 짓기 위해 동양철학관을 가든, 혹은 네이미스트를 찾아가든, 비즈니스의 성공을 위해 좋은 이름을 얻고 싶은 마음은 같을 것입니다. 오히려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상담과 사주, 토정비결에 의존하는 동양철학관보다는 상표 검색과 시장조사, 언어적 기법 및 포지셔닝 등 네이미스트들이 더 직관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적인 여러 방법론들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이밍을 만들고자 하시는 분들이 동양철학관을 세 군데 정도 돌아다니시면서 받은 이름에 대해 납득하는 것이, 네이미스트가 고생 끝에 만들고 스크리닝으로 추려내어 추천한 시안에 대해 납득하는 것보다 훨씬 쉬워 보입니다. 적어도 동양철학관에서 이름을 받으신 분들이, 같은 사람에게 '이름을 이러이러한 방향으로 추려서 다시 만들어 주십시오'라고 하진 않으니까요. 이유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정보의 비대칭 상황에서 어떠한 신호를 주느냐에 따라 갈라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네이미스트 또는 동양철학관을 찾아간 손님은 그들이 맞닥뜨린 사람보다 '좋은 네이밍'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동양철학관에 찾아갔다는 것은, 다 이해할 순 없어도 그들의 방법론(사주, 팔자)에 동의하고, 그에 따라 좋은 네이밍 또한 그들이 결정하도록 허락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대부분의 네이밍 프로젝트에 대해, 우리는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심지어 결정권자가, '좋은 네이밍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을 것임에도 말이죠.
이런 자연스러운, 동양철학관을 향한 신뢰는 무엇으로 이루어질까요. 그것은 개인의 신앙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철학관 선생님을 만난 순간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상대방이 모르는 것에 대한 전문가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짧은 대화 동안 상대방의 선호와 니즈에 대한 최대한의 정보를 끌어모음과 동시에,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을 이해함으로서 일종의 심리적 라포(rapport)를 형성합니다. 때문에, 이렇게 나온 네이밍을 손님은 이리저리 평가하기보다, 상대방이 전문성을 바탕으로 잘 지었겠거니 생각하고,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 약간의 공통점만 있어도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들에게 있어 '좋은 네이밍'은 '사주팔자 이론에 부합하는 네이밍'임이 명백한데, 이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철학관 선생님일 뿐이고, 때마침 좋은 마음으로 해 주셨기 때문이죠.
네이밍을 하는 사람들이 그 정도의 라포를 형성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국 갑과 을 관계인데다가, 어떤 네이밍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니즈를 직접적으로 물어보면 '그건 전문가인 당신들이 알아서 잘 하실 일'이라는 대답을 듣기 쉽습니다. 네이미스트는 네이밍에 대한 지식은 있으나 상대방이 어떠한 네이밍을 선호하는지 알기 어렵고, 클라이언트는 클라이언트대로 네이밍에 대한 지식이 없지만 결정은 해야 하는 입장이 됩니다. 이렇다 보니, 우리는 우리가 가진 논리를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설득해야 하고, 클라이언트 입장에서는 모든 네이밍들이 비슷해 보이고, 전략적으로 시장 안에서 먹힐 네이밍보다는 클라이언트의 불확실한 기준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이죠.
결국 네이밍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기법이 아닌, 고민거리를 줄이고 얼마나 상대방이 원하는 것, 우리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빨리 알아냄은 물론, 우리의 선택을 상대방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느냐일 것입니다. 이 과정은 네이밍 개발이나 시안 제안 과정을 넘어, 개발 이전부터 네이밍을 결정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이루어져야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네이밍에 대해 Co-creation을 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네이밍의 접근 조건에 대해 사전 체크하고, 이에 대해 합의할 필요는 있습니다.
세상에 통용되는 '좋은 네이밍'의 기준은 없을지언정,
클라이언트와 합의할 수 있는 '좋은 네이밍의 기준'은 만들 수 있습니다.
제안 과정에서 일종의 선별(screening)을 할 수 있는, 숨은 카테고리가 존재하는 네이밍 스펙트럼 제안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초기 네이밍 제안 시, 완성도를 떠나 조합 방식과 컨셉에 따라 네이밍을 구분해 여러 안을 제안해 보는 것이죠. 이를 통해 클라이언트가 각 네이밍 방식 및 컨셉의 장단점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고, 향후 선택의 방향성을 좁히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클라이언트가 네이밍을 아무런 기준 없이, 개인의 취향이나 인지적 편향, 이른바 '감'에 의존해 선택하게 해선 안됩니다. 우리가 기획 단계에서 브랜드의 전략적 목표를 설정하였다면, 네이밍 선택 또한 우리가 합의한 컨셉 및 전략적 목표에 부합하는지에 따라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가로서의 스크리닝 평가 뿐 아니라, 조사 방법론을 동원해 소비자에게 직접 물어볼 필요도 있습니다.
앞서 우리는, 네이미스트들이 늘 '네이밍에 객관적인 정답은 없다'는 이야기를 해 왔습니다. 그러나, 세상에 통용되는 '좋은 네이밍'의 기준은 없을지언정, 클라이언트와 합의할 수 있는 '좋은 네이밍의 기준'은 만들 수 있습니다. 이는 네이밍의 기법 뿐 아니라, 네이밍을 합의하고 설득하는 프로세스를 통해 네이밍이 완성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네이미스트가 전문가로서, 감각이 아닌 전략에 근거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고, 클라이언트의 마음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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