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부한 소유보다 풍요롭게 존재하기
기성세대와 달리 청년세대는 삶을 대하는 사고방식과 가치관이 많이 다르다. 끼니 해결이 과제였던 80년대는 대학교만 나오면 취업이 가능했고 근면 성실하게 돈을 모으면 아파트 한 채는 마련할 수 있었다. 즉, 노동의 가치로 원하는 걸 얻을 수 있는 시대였다. 그런 과거와 달리 요즘은 '젊어서 고생하면 나중에 잘 될 것'이라는 기대감 조차 품기 힘든 현실이다. 밥 굶을 걱정은 없지만 고용 불안과 과잉 경쟁 등으로 미래 비전은 고사하고 그저 현재를 꾸역꾸역 버텨내는 수준 같다.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현재 시점에서 확실히 행복해질 수 있는 길을 택하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나도 작년 말 그 길을 선택했다. 잘 되면 오너만 행복한 회사에 올인하지 않고,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을 찾아서!
몇 번의 이직을 하며 구직장과 현직장에서 여러 선배를 만났다. 고생하는 선배들의 연봉은 매년 올랐지만 삶이 더 편해지거나 나아지지는 않는 것 같았다. 어쩌면 내 미래일 선배들의 모습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할까. 돈은 많은데 사람 만날 시간은 없고, 일에 쫓겨 신경은 항상 예민해져 있고, 결혼은 뒷전이었다. 심지어 새로 산 집에 제대로 된 인테리어를 몇 달째 못한 분도 있었다. 돈 쓸 시간이 없어 한 번씩 비싼 옷이나 명품 등을 사지만 허한 마음을 한순간 채워 줄 뿐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사는데, 그 치열함에 대한 보상이 너무 허무해 보였다. 그들을 보며 나는 확신을 얻었다. 출근은 있지만 퇴근은 없는 회사에서 아예 나오기로.
전 회사에 다니던 작년 대비 카드값이 절반도 채 나오지 않는다. 내 씀씀이가 큰 걸 알던 동생이 '어떻게 소비를 참냐'라고 물어봤다. 대답을 생각하며 나도 놀랐다! 억지로 참는 게 아니라 그냥 안 쓰게 되는 거더라. 지금 버는 정도로 충분히 살아지는 거였다. 야근을 안 하니 퇴근할 때 택시 탈 일도 없고, 스트레스가 적으니 당 보충에 드는 군것질과 술값이 줄었다. 허한 마음을 채우기 위한 충동 쇼핑도 줄었다. 사실 연봉을 대폭 줄이며 현재 회사로 올 때, 당시 내 지출 상황에서 계산해 보면 눈앞이 깜깜했다. 돈 대신 시간을 얻는다는 걸 알지만 과연 만족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하지만 살아진다. 쪼잔하게 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적인 모임이 있을 때면 "나 없다고 생각하고 놀아. 일 끝나는 대로 합류할게"가 일상이었던 시절. 그때는 상상도 못했던 것들을 지금은 마음껏 하고 있다. 해보고 싶었던 모든 것이 가능하다. 큰 돈이 들지도 않는다. 주 2회씩 운동을 다니고, 퇴근 후 듣고 싶은 강연도 듣고, 배우고 싶었던 언어를 배우고, 퇴근길에 장을 봐서 저녁도 해먹을 수 있다. 누적 피로가 적어지니 주말엔 보고 싶던 공연이나 전시도 볼 수 있다. 예전의 나였다면 '치열하게 살지 않는 사람들의 삶'이라며 별로라고 했을거다. 젊을 때 열심히 살지 않고 저렇게 놀다가(;) 나중에 사회에서 제대로 자리 잡기 힘들거라고.. 그때의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지금은 잠시 희생하는 게 맞다고 여겼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라는 노래 가사처럼 나도 변했다. 당장의 성과가 없고 내 생업에 영향이 없는 일일지라도 가치가 없는 건 아니다. 분명한 가치 하나는 지금 내가 즐겁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아직 철이 덜 들어서 이런 생각을 하는지도 모른다. 정년은 짧아지는데 고령화는 심해진다. 그래서 노후가 더 불안한 시대에 미래를 위한 대책 마련은커녕 워라밸을 지키려 하면서 욜로(YOLO) 마인드로 산다는 것이 언젠가는 '참 한심했구나'라고 후회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살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상의 활기와 여유! 다른 사람의 말을 들어줄 여유, 좋은 것을 보고 들으며 감동을 할 수 있는 마음,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할 용기 등등 매사 피곤하고 늘어져 있던 나 자신이 달라진다. 처음에는 그 변화가 아주 미미해서 오히려 일을 하지 않는 나는 '가치 없는 사람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삶이 무료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내 삶이 풍요로워짐이 느껴진다. 담배를 끊을 때도 금단현상이 있듯, 삶의 방식 자체가 바뀌는데 어찌 금방 홱 달라질 수 있겠는가.
치열하게 일했던 그 삶이 헛되었다는 건 절대 아니다! 많은 것을 경험했고 배웠으며 지금 내가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다만, '직장에서의 나'와 '내 인생에서 나'를 골고루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 좀 아쉽다. 나는 일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