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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S Mar 03. 2020

코로나 19가 열어버린 판도라의 상자, 재택근무

집돌이가 되어 버린 어느 구글러의 이야기

"나, 오늘 WFH(Work from Home. 재택근무)이라서 VC(화상회의)로 들어갈게요." 


미팅 참석자들에게 미리 행아웃 메신저를 보내고, 구글 캘린더에 연동되어 있는 회의에 접속한다.

그리고 회의시간.

"지금 그래프보다 더 최신 버전을 제가 받았는데, 지금 공유하신 자료에 장표 추가했어요." "저는 슬라이드 마지막에 코멘트 달았는데, 확인 좀 해주세요."

내 구글 슬라이드 자료를 화상회의에서 띄우자, 참석자들이 각종 코멘트를 달고, 함께 자료를 수정하며 논의한다. 얼굴 직접 보고 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업무 일상이다. 다른 건 단지, 내가 집에 있다는 것뿐. 

최근 코로나 19(COVID-19)로 인해 재택근무가 화두가 되고 있다. 사실 생산직 혹은 일부 서비스직 같이 재택근무로 대응이 어려운 경우를 제외하면, 상당수의 사무직은 재택근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이런 류의 원격 근무 시스템은 상당수의 IT기업들도 적용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많은 기업에게 재택근무는 요원한 혹은 꺼려지는 영역인 것 같다.

예전에 발행했던 '중요한 건 '어느 장소'에서 일하냐가 아니다.' 글에서 재택근무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때만 해도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지금과 같은 활발한 논의가 생길 것이라고는 솔직히 예상은 못했지만, 결국은 시간문제일 것이라 생각했었다. 

지금 한국 사회는 코로나 19라는 예기치 못했던 재난으로 인해,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질문을 조금 더 일찍 스스로에게 하게 된 것일지 모른다.




공포의 출근길. '코로나 옮지 않고 무사히 다녀오게 해 주세요..' [사진 1]


준비된 시스템


"하루 사이에 확진 환자가 XXX명 늘어서, 현재까지 환자는..."

뉴스에서는 연일 우울한 소식이 들려온다.

'아휴, 큰일이네.' 답답한 상황에 한숨을 쉬며, 평소에 자주 연락하는 협업 파트너사 직원에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상당히 큰 회사여서, 재택근무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는데, 수화기 너머 들려오는 소리로 미루어 보니 사무실인 듯하다.

"팀장님, 사무실이신 거죠? 요새 이런 상황에 고생 많으시네요." 

"네, 보안 때문에 외부에서는 업무 메일 접속이 안돼요. 내부 회의도 화상회의로는 다 막혀있어서, 얼굴 보고 해야 되고요." 딱히 무슨 수가 있겠냐는 그의 목소리 속에서 살짝 답답함이 묻어 나온다.

"네, 아무래도 갑자기 재택근무 같은 걸 할 수가 없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답답함에 동조하는 것뿐.

결국 재택근무를 하기 위한 가장 기본은, 바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재택근무의 특수를 맞아, 요새 많은 솔루션 업체들이 경쟁하듯 다양한 플랫폼을 홍보하고 있는 것 같다. 회사에 다 모이지 않아도 온라인으로 업무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플랫폼들. 이 작금의 사태가 한국의 상당수의 기업에, '재택근무'라는 미뤄왔던, 혹은 생각지 않았던 숙제를 던졌기에, 시스템 분야는 어떻게든 진전이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준비된 조직 문화


"Hey, 뭐야? 지금 회사야??"


직속 상사인 매니저 C는 주간 화상회의에서 내 얼굴을 보자마자 살짝 높아진 톤으로 물어본다. 매니저도 임원도 동료도 모두 서로 다른 오피스에 있다 보니, 항상 화상회의로 모든 업무가 진행되는데, 오늘따라 내가 있는 방의 뒷 배경이 회사 회의실과 비슷해서 오해를 한 듯하다. 

"아냐, 나 집에 있어."라고 답을 하자, C는 약간 안도한 표정으로 이야기한다. "그래 잘했어. 코로나 19 때문에 위험하니까, 당분간은 절대로 오피스에 가지 마." 

따뜻한 걱정에 고마웠지만, 다음날의 중요한 발표를 오피스 회의실에서 하려 한 계획이 떠올라, 대답을 주저하고 있었다. 사실, 이때는 한국의 확진 환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기 전이어서, 조금은 경계가 느슨했던 것도 있었다.

"설마 회사 갈 일이 있는 거야?" 역시나 눈치 빠른 C는 재차 물어본다. 

"사실, 내일 오전 임원회의는 오피스에서 참석할까 했어." 사정을 얘기한 나.

"난, 네가 안 갔으면 좋겠어. 네가 내일 발표할 때 필요한 게 있으면 내가 다 서포트해줄 테니까, 꼭 다시 생각해봐. 제일 중요한 건 네 건강이고, 네 가족의 안전이야."


회사에 나오지 말라는 매니저의 이런 간곡한 요청에, 결국 나는 생각을 바꿨다. 

C는 실제 내 발표에 30분 전부터 들어와서 (그녀의 timezone에서는 아침 6시 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내 발표 준비를 도왔다. 딸아이의 울음소리가 중간중간 나의 발표에 양념처럼 들어갔지만, C의 적극적인 도움 덕분에 임원들의 호평을 받으며 무사히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나를 어떻게든 회사에 못 가게 하려는 매니저와 임원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아마도 오피스로 출근했겠지. 이렇듯 결국은 조직문화, 조직의 분위기가 시스템의 실행의 큰 축인 것이다.


찍어 두지 못해 아쉽지만, 대강 이런 느낌 [사진 2]


준비된 구성원


"재택(근무)하는 친구 녀석이 게임하는 사진 보내줬어 ㅋㅋ"

"모처럼 재택근무하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일에 집중도 못하겠어서, 회사에서 하는 게 훨씬 나은 것 같아."

이런 류의 이야기도 인터넷에서, 혹은 주변에서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이런 이야기에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회사가 원하는 동일한 비즈니스 결과물만 내준다면, 게임을 하든, 집에서 일하든, 회사에서 일을 하든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다고.

회사원은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서, 조직과 약속된 성과를 내야 하는 계약관계의 피고용인이다. 순수하게 그 본질에 집중하는 조직에서는 만약 내가 약속된 성과를 냈다면, 그 외에 내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서 일하든지, 그건 순전히 내 개인의 영역일 것이다. 

"I care about business outcomes, not location.
If you feel more comfortable working from home and can achieve the same outcomes for the business, do it." 

(난 장소가 아니라, 비즈니스 결과물만 신경 씁니다. 여러분이 집에서 일하는 게 더 편하고, 동일한 결과물만 낼 수 있다면, 그렇게 하세요)

팀의 임원 Y가 우리에게 한 이야기.

"정말 그래도 되나..?" 

십수 년 전에 한국 대기업에서 업무를 시작했던 나는, 이직한 뒤 이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어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역으로, 내가 아무리 회사에서 오래오래 야근하면서, 딴짓도 일절 안 하고 모니터만 쳐다 본들, 약속된 성과를 못 내면 나는 능력 없는 직원으로 낙인찍히는 것이기도 했다.


"Q2 OKR(Objective and Key Result. 업무 목표 및 핵심 성과) 일정 나온 거 봤어?"

팀의 친한 동료 K가 단체 메신저 방에 푸념을 늘어놓는다.

"뭐야 이거 데자뷔 아냐? 며칠 전에 Q1 OKR 만든 거 같은데??" 

바로 동료들의 반 장난식 푸념들이 오가며, '나만 괴로운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의 마음을 공유한다.

매 분기 말에는 그 다음 분기의 업무 목표와 핵심 성과를 설정을 하는데, 이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사업분야별 글로벌 헤드의 지침과 각 파트너사들과의 업무 진척, 신규 사업을 서포트할 개발팀의 진행 속도 등 다양한 부분을 고려해야 한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어렵사리 만들고 나면, 팀의 리드들과 각 항목을 확정하고, 나의 리소스 분배 비율도 조율한다. 겨우 정리가 되어서 한숨을 돌린다 싶으면, 어느새 분기의 성과를 평가하고, 동시에 다음 분기 설정을 하는 시간이 되어 있다. 이를 통해 회사에서의 나의 가치는 철저하고 객관적으로 평가가 되는데, 이를 깨닫고나서부터, 내게 일하는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집에서 일한다고, '오예, 아무도 안 볼 테니 땡땡이 칠 수 있겠네!'라든가, '집에서는 일에 집중이 안되니까, 재택근무 제도는 없애는 게 낫다.'라는 류의 생각들이 본질이 아니라는 깨달음이 내 안에 들어왔다. 약속된 일을 기한 내에 해내는 것이 회사원의 숙명이 아닌가. 내가 그 일을 해낼 수만 있다면, 내가 어디에 있든,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하든, 법의 테두리 안에만 있으면 그건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재택근무하면서 게임했다던 그 친구가 자기 할 일은 다 제대로 했으면 그걸로 된 거고, 자신이 회사에서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면, 회사에 가서 일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각기 다르기에, 자신이 회사에서 집중이 더 잘된다고 해서 굳이 재택이 더 효율적인 다른 이의 선택지까지 줄이려 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집에 하나뿐인 책상을 쓸 수 없을 때마다  애용하는 내 애마. 다리미판.


"재택근무하면 어떠냐고요? 애들 때문에 일을 못 하겠어요."
"모처럼 재택근무하면 좋을 줄만 알았는데, 일에 집중도 못하겠어서, 회사로 나가고 싶어요."
"스킨십을 중시하는 한국 기업 문화에는 재택근무는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최근 본 기사들. 사실 예상했다. 이런 이야기들 분명히 나올 거라고. 이렇듯 재택근무가 가능한 업종에서도 아직 많은 기업 혹은 직원들이 이를 어색해하거나, 혹은 효율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판은 깔렸다. 어차피 이제 한국 사회는 반강제적으로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실험의 장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현상의 본질을 봐야 한다.

핵심은 집에서 일을 하는 것의 장점과 단점이 아니라, 직장이 직원의 성과를 최대화할 수 있는 시스템과 조직 문화 그리고 각 구성원의 책임 의식을 서포트할 수 있느냐에 대한 질문이다. 

그것이 기업에게도 직원에게도 win-win의 길일 것이기에.







표제 사진 출처: Photo by Dimitri Karastelev on Unsplash; unsplash.com/photos/V652ybYYY-k


사진 1 출처: www.freepik.com/free-photo/front-view-sick-man-riding-bus_6988021.htm#page=1&query=corona%20bus&position=16


사진 2 출처: www.freepik.com/free-photo/positive-surprised-new-dad-holding-baby_6882503.htm#page=1&query=work%20home%20baby&position=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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