돛이자 닻,
처음 여행에서 만난 해먹은 신세계였다. 발코니 요람에 누우니 그처럼 포근할 수가 없었다. 태초의 감각이란 이렇게나 오래간다. 그 때부터 내가 숙소를 평 매기는 기준은 해먹의 유무가 됐다. 객에게 쉼을 줄 의지가 있는 숙소인가 아닌가. 종일 숙소에 비비고 있어도 반길 곳인가 아닌가.
가와구치코에 잡은 숙소엔 해먹이 있다. 후지산역이라지만 후지산은 멀다. 안개에 가려 감춘 산은 오후 늦게야 빼꼼 보이다 만다. 그래도 하나도 아쉽지 않았던 건 숙소 뒤 해먹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먹은 위아래 좌우로 기울면서도 끝내 떨어뜨리지 않는다. 역설적인 안정은 집 떠난 타지에서도 정착을 찾는 여행과 꼭 닮아있다.
브라질 원주민이 나무 사이에 매달고 잠잔 것이 시초란다. 잠을 허공에서 잘 생각은 어디서 나온 생각일까. 움직이지 않고도 가장 멀리갈 수 있는 꿈이 바로 허공에서 달랑거리는 해먹인가. 어제 병선이가 들려준 군대 이야기는 내 생각에 확신을 더해줬다.
군대 생활관. 후임과 침대와 침대를 잇는 해먹을 만들자고 계획을 짰단다. 그저 휴식을 원했다지만 해먹은 갇힌 군안에서 체감 상 가장 멀어질 수 있는 흔들림을 줄 수 있으니. 허공에 달랑거리는 방법으로 택한 것이 해먹이었을 터. 한 사람, 두 켤레 전투화에 주어진 여분 끈을 죄다 모았다. 병선이와 후임은 끈을 공들여 꼬고 맸다. 장정이 들어가도 무너지지 않는 해먹이 완성됐다. 장장 세 시간의 휴식시간을 들인 작업. 그러나 허공은 짧았다. 선임이 오면 바로 끈을 숨겼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여느 때처럼 허공을 즐기던 어느 날, 선임이 기습 침투했다. 군의 밀림 무늬 속에서 즐기는 브라질 원주민의 휴식시간. 선임이 외쳤다. “이 또라이야!”
정글 해먹이 끝났다.
“이게 뭐야?”
“해먹입니다”
이렇게 군에서도 찾는 태초의 흔들리는 안정은 우리를 뒤쫓는다. 돛이자 닻. 우리는 여기서 후지산을 보지 않고도 마음 놓는다. 해먹에서 마무리하는 하루는 부족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