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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Aug 13. 2020

<아워 바디> 속 성애 장면에 대하여

<아워 바디>(2019), 한가람.



한가람 감독의 <아워 바디>에서 성은 욕망의 외피일 뿐이다. 혹자는 필요 이상의 정사 장면이 나온다며 비판하지만, <아워 바디>는 인간에게 3대 욕구 이상의 채울 수 없는 욕망이 있음을 인정하며, 그를 섣불리 성으로 해결하려 들지도 않는 영화다. 오히려 앞서 말한 3대 기본 욕구에 대한 명제를 뒤집어 생각해야만 주인공 자영의 심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성욕은 사회적인 기준선을 지키지 않고 이루어지는 성관계가 되고, 수면은 영원한 잠인 죽음이 되며, 식욕은 주머니 사정에 맞지 않는 비싼 끼니가 된다. 언뜻 보아 비합리적이기 짝이 없는 이 세 가지 행위는 차라리 욕구불만의 ‘표출 방법’으로 보아주는 게 맞다. 이 경우 자영은 달리기를 통해 육체적 감각에 눈을 떴다가 현주의 죽음을 계기로 성에 눈을 뜬 게 아니다. 오히려 현주와의 만남을 통해 욕구나 육체가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무기력한 무욕의 상태에서 활기찬 욕구불만의 상태로 접어들고, 현주와 함께 달리고 친분을 쌓아감에 따라 그와 같은 욕구불만을 적절한 사회적 기준선 안에서 해결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자영은 현주와 달리면서 [욕구불만→충족]의 선순환 상태를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리듬으로 몸에 입어간다.





그러나 현주는 달리는 것만으로는 제 안의 근본적인 갈증을 채울 수 없었다. 성욕, 수면욕, 식욕? 아니, 현주에게는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욕구가 존재했다. 어떻게 해도 욕구불만 상태를 면할 수 없었던 현주는 자신의 생명활동을 중지시킴으로써 채울 수 없는 욕망에서 벗어나기로 한다. 현주가 죽은 뒤 자영의 세계가 무너진 건 아니다. 다만 자영의 욕구 공급로가, 배수로가 뚝 끊겼다. 그에 자영은 이것저것 해 보기로 한다. 현주에게 전업 작가로 살고 싶은 욕구의 대체 행위가 달리기였듯, 자영의 빈칸_욕구의 대체 행위는 섹스로 채워진다. 그 뒤 영화에서는 때로는 사회적 시선에서 결코 환영받지 못할 관계를 만들어내는 즉흥적이고 '부적절’한 섹스들이 이어진다.



이때의 섹스를 현주-되기 내지는 현주와의 담화를 확인하는 절차로 해석하면, 자영이 현주에게 던지는 시선의 총체는 동경으로만 뭉뚱그려지고 엔딩 씬 이전까지의 자영은 다른 이의 욕망을 수행하는 무기력한 기계가 되어버린다. 때문에 나는 섹스가 막 신체를 깨우기 시작한 자영에게 있어 가장 만만한 욕구 표출방법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밀어보련다. 중요한 것은 자영의 섹스에 ‘내어준다’가 아니라 ‘내던진다’는 표현만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자영이 가지는 성관계에 자학적이고 체념적인 뉘앙스가 완전히 소거되어 있다고 장담할 순 없지만, 자영은 제 몸이 있다는 걸 알고, 제 몸을 쓸 줄 아는 한 사람으로서 타인의 욕망에 자기 실행력을 가지고 부응한다. 일면 능동의 기제인 셈이다. 어쩌면 자영도 위에서 우리가 뒤집어 생각하기로 한 명제(성욕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며, 인간은 성행위를 통해 욕구불만을 해결할 수 있다는)를 상식처럼 참으로 알고 살아왔기에 그와 같은 행위를 시도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영의 진짜 욕망은 차라리 현주의 온몸을 시선으로 훑고, 불뚝거리는 근육의 움직임과 땀에 젖어 촘촘히 빛나는 솜털을 오감으로 느끼면서 그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것 자체였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현주가 죽고 난 뒤 자영이 빠져드는 욕구불만(이 욕구불만이 무기력과 다르며 그 대척점에 있는 상태로 제시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이 설명되지 않는다. 현주의 곁에서 조금 더 오래 머무르며 그 욕구가 정확히 무엇을, 혹은 누구를 향하는 건지 파악할 시간이 필요했을 테지만 애석하게도 자영에게는 그럴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그렇기에 <아워 바디>는 한편으로는 사회적으로 용인되지 않은 좌절된 시간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수록 세상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잠깐의 모라토리엄 기간을 가지고 나오도록 기다려주지 않으며, ‘시기에 맞지 않는’ 연애와 결혼과 육아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심각한 우울증으로 슬럼프를 겪는 직장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퇴사밖에 없다. 대부분의 회사는 그들을 이해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고시만 합격하면 신분상승이 보장되어 있다는 것처럼 떠들지만 정작 고시를 7년, 8년 붙들고 사회와 멀어진 이들이 받아야 하는 시선은 냉정하다. 교복 입던 시절에는 하룻밤 자고 다음날 교실에서 보는 게 당연했던 친구들은 시간을 써 연락하고 배려하지 않으면 일 년에 두 번도 만나기 어려운 사이가 되어버렸고, 마음에 맞았던 사람이 어느 날 없었던 것처럼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아워 바디>는 자영의 생각을 낱낱이 밝혀주지는 않는 영화다. 다만 영화에서 주어진 정보로만 파악하려 들었을 때 자영의 욕망이 현주의 생동하는 육체 그 자체라는 가설은 제일 설득력이 있고 유효하다. <아워 바디>가 부산국제영화제 상영 섹션 중에서는 LGBTQ로 분류된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이 영화가 소위 ‘성장영화’의 틀에 끼워 해석되어서는 안 되며, 마찬가지의 이유로 이 영화가 주인공과 주인공의 욕망을, 여성의 육체를 ‘건강하게’ 사유하기만을 바라서도 안 된다는 점이다. ‘정상적인’ 욕망이 무엇이며 ‘건강’한 상태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그와 같은 말들은 모두 다 숨은 괄호를 내포하고 있다. (사회적으로 용인된)이라는. 그때에야 그 명제는 참으로 인정받고 진리인 양 스크린 속을, 활자 사이를, 매체 곳곳을, 사람들의 머릿속을 활보한다.


한 GV 자리에서 최희서 배우는 <아워 바디>가 여성영화라는 수식어로 설명되지만은 않기를 바란다고 의견을 밝힌 바 있는데, 그 말 또한 이 영화가 어떠한 틀과 그 틀이 내포하고 있는 일정 규격에 전혀 들어맞지 않는 종류의 영화임을 알리고자 한 배우 나름의 소신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니까 <아워 바디>는 자기 욕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얘기이다. 그 욕망이 좌절되었을 때 어떤 선택을 하고 어떻게 책임을 질지는 그 사람들의 몫이다. 비록 용인을 내리는 사회의 높으신 양반들, 혹은 그 양반들이 흩뿌리는 가치를 섬기는 이들로선 못마땅할 선택이고 돌이킬 수 없는 책임일 수는 있겠으나, 적어도 자영은 스스로의 몸을 움직여 달리고 이동하고 섹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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