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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인 Aug 13. 2020

자본이 휩쓸고 간 빈터에 남은 그 무엇 : <강호아녀>

<강호아녀>(2018), 지아장커.




지아장커의 신작 <강호아녀>는 1990년대 초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를 관통하는 두 남녀의 멜로드라마다. 영화에는 17년간 급변해 온 중국 사회와, 그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중국인들에 대한 애환과 통찰이 담겨 있다. <강호아녀>의 서사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며, 극을 이끌어나가는 주 인물은 챠오챠오(자오타오 분)라는 이름의 여성이다. 챠오챠오는 첫 등장에서부터 힘깨나 쓸 법한 어깨들 사이에서 주눅 들지 않고 일원을 자처할 만큼 만만찮은 기세를 보여준다. 조직의 중간 보스인 빈(리아오판 분)의 연인 자리에 걸맞는 모습이다. 그랬던 챠오챠오가 총기 소유 혐의로 감옥에 수감된다. 빈이 휘말린 폭력 사태에서 빈을 지키려다가 화를 당한 것이다. 5년의 형기를 마친 뒤, 연락이 끊긴 빈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는 챠오챠오는 다른 사람처럼 바뀌어 있다. 1부의 챠오챠오가 어깨선에 맞춰 똑 떨어지게 자른 단발머리에 화려한 옷차림을 한 당찬 아가씨였다면, 2부의 챠오챠오는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맨얼굴로 찌그러진 생수병을 든 채 돌아다닌다. 자신만의 구역을 확보하여 관리하는 3부의 챠오챠오는 또 다르다. 스마트폰 GPS로 길을 찾고 명품 브랜드 로고가 찍힌 가방을 들고 다니며, 여전한 맨얼굴에 시름이 엿보이기는 하지만 보다 관록 있는 태도를 보여준다. 특히 챠오챠오는 산시성을 떠나 대륙을 맴도는 2부에서 더욱 자주 ‘얼굴을 바꿔’나가는데, 이를 두고 그녀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모든 중국인들의 변모의 과정을 대표하는 자화상이라고 말하더라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강호아녀>에는 ‘강호’라는 말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강호는 고수들의 세계다. 무협지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옛 중국, 원칙과 품위를 벗어나지 않은 채 정당한 대결이 펼쳐지곤 했던 시공간이다. 영화 속 ‘강호’는 실재하는 영역이라기보다는 혼란한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정확하게는 변치 않도록 지켜야 할 가치를 뜻한다. 챠오챠오가 강호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빈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때 빈이 말한 강호는 패권을 겨루고 그 질서로 유지되는 세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빈은 내켜하지 않는 챠오챠오에게 총 쏘는 법을 손수 가르쳐주면서, 자신의 연인인 이상 챠오챠오 또한 강호에 들어와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스스로 살아남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된다고 설파한다. 그랬던 빈이 강호를 떠나 표류하는 존재로 살아가게 되는 데 반해, 챠오챠오는 ‘변치 않는 것’들의 세계로 재진입해 그녀 자신이 믿는 강호의 가치를 지켜나간다. 풍으로 반신불수가 된 빈은 다시 만난 챠오챠오에게 왜 자신을 받아주었는지 묻는다. 빈은 자신을 향한 챠오챠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자신이 그녀의 마음 속 영역을 확보했음을 확인하고 싶었겠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낮고, 창백하고, 덤덤한 것이었다. “그게 강호의 의리니까.”

물론 그 대답이 이유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빈과 챠오챠오의 관계는 단순한 애증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서로의 존재로 인해 가능했던 순간들이 변해버린 그들 몸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 그러나 빈은 구시대적 질서, 남성적 힘과 폭력으로 유지되었던 세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 빈은 자유롭게 몸을 쓸 수 없는 신세가 되어 옛 부하에게 꼼짝없이 모욕을 당하는 반면, 챠오챠오에게는 자신의 영역에서 빈을 욕보이는 이를 대번에 응징하고 일갈할 수 있는 힘이 있다. 빈의 옆 자리에 있을 때 발휘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층위의 권력, 자본과 생산수단을 확보한 이만의 권위다. 챠오챠오는 자기 직원들에게 공연히 성질을 부리는 빈에게도, 그가 더 이상 제멋대로 굴 수 없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기존의 성 역할이 뒤바뀌어 있다고는 하나, 챠오챠오는 빈을 챙기고 빈은 그녀에게 몸을 의탁한 상황에서 새로운 형태의 관계가 가능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빈은 부적응자의 길, 표류인의 길을 택한다. 그 자신이 먼저 저버린 강호의 의리에 기대어 살 수 없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고, 자신에게는 낯선 얼굴을 가지게 된 챠오챠오의 영역에 그대로 머물기에는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떠나겠다는 빈의 짧은 음성 메시지를 듣고 챠오챠오는 가게를 뛰쳐나간다. 빈은 이미 온데간데 없다. 이도 저도 못하고 선 채로 감정을 억누르는 챠오챠오의 모습이 CCTV의 시선으로 보여지면서 영화는 끝난다.





<강호아녀>는 현대 중국의 도시 개발 문제에 대한 비판을 넌지시 내비추고 있다. 극의 1부에서 챠오챠오의 부친은 정부가 추진하는 광산 이전移轉 문제로 생업을 위협받게 된다. 체념하고 소일하는 다른 동료들과 달리 그는 확성기를 들고 대형 자본을 상대로 혼자만의 투쟁을 벌인다. 2부에서는 장거리 기차 여행 승객들과의 대화를 통해, 챠오챠오가 부재했던 기간 동안 위상이 달라진 고향 산시성의 문제가 부각된다. 챠오챠오는 처음 만난 여행객의 조언에 따라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신도시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런 챠오챠오의 발을 붙잡은 것은 밤하늘에 펼쳐진 은하수, 제각기 빛나지만 무리지어 길을 만들어보이기도 하는 별들이다. 하늘 아래 건물들은 세워졌다 부서지기를 반복하고, 땅과 물도 파헤쳐지고 메꿔지며 계속해서 변화하지만 별들은 변하지 않고 늘 그 자리에서 반짝일 터이다. 밤하늘을 홀린 듯이 바라보면서, 챠오챠오는 2부 들어 처음으로 행복해보이는 표정을 짓는다.

3부는 앞서 언급되었던 개발과 재개발의 모든 문제점들이 응축된 공간으로서의 산시성을 보여준다. 휠체어를 탄 빈과 그를 보조하는 챠오챠오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휑한 기차역과 흔들리는 용달차의 짐칸을 거쳐 공사가 중단된 흔적이 역력한 공터를 빙글빙글 맴돈다. 버려지거나 사유화된 공적 공간은 지아장커 영화의 주요한 미쟝센이다.1) 빈과 챠오챠오가 지나치는 모든 공간은 무서운 속도로 개발을 추진하는 중국 사회의 어제와 오늘, 미래에 대한 은유처럼 보인다. 챠오챠오의 가게 또한 과거와 현재가 병존되어 흐르고 있다. 가게는 ‘강호’ 시절 분위기와 질서를 간직하고 있는 한편, 현대적인 경향에 맞추어 CCTV가 설치되기도 하는 공간이다.

챠오챠오의 부친이 국가와 대형 자본의 결탁으로 만들어진 피해자라면, 빈은 시장에서 제 가치를 입증하는 데 실패하여 도태된 사람들을 대변한다. 빈이 조직의 중간 보스로 위용을 떨치던 시절, 국가주의적 폭력은 전통적인 남성성과 남성 조직의 힘을 도외시하지 않았다. 새롭게 등장한 자본주의적 폭력은 소위 ‘강한 남성’이었던 이들조차 대처할 수 없을 만큼 맹렬한 기세로 질서의 중추를 와해시켜간다. <강호아녀>는 빈이 패배를 극복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빈을 사지로 내모는 것만도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빈과 챠오챠오가 새로운 관계성 안에서 계속 함께 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 풀이 우거지고 저 멀리 나직한 화산이 보이는 들판에 두 사람이 다시 한번 나란히 선다. 그곳만은 산시성에 휘몰아친 개발의 물결과 무관하게, 예전 두 사람이 기억하는 풍경 그대로였다. 빈은 그 자리에서 챠오챠오에게 총 쏘는 법을 알려주었고, 챠오챠오는 적시에 배운대로 방아쇠를 당겨 빈의 목숨을 구했었다. 빈을 향한 챠오챠오의 사랑은 활화산만큼 뜨겁고 화산재처럼 순수했다. 그러나 그들은 서로의 연소된 모습에서 순수함을 찾기보다는 모일 수 없을 만큼 흩어져 버린 재의 상태만을 발견한다. 각자의 길을 과열된 채 숨가쁘게 달려오면서, 그들은 너무도 지쳐버린 것이었다.



제이슨 맥그래스는 『포스트사회주의 모더니티』라는 책을 통해 “옛 것은 사라졌지만(혹은 사라지고 있지만)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지아장커는 바로 그 시간에 대해서, 그 시간을 담고 있는 공간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지아장커 영화의 주인공들은 사라진(혹은 사라져가는) 옛 것을 좇다가 적응에 실패한 사람들과 아직 오지 않은 그 무엇에 오도가도 못하고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다. 지아장커 영화의 대부분은 감독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산시성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무>(1997)와 <플랫폼>(2000)으로 작가주의적 로컬 시네마(local cinema)를 보여주었고, 네 번째 장편영화 <세계>(2004)를 통해 중첩된 로컬과 글로벌의 환경(Glocalization)을 시네마의 영토 안에서 재현하는 데 성공했다.2) <세계>로 고향을 떠난 것도 잠시, 지아장커는 <스틸 라이프>(2006)부터 <산하고인>(2015)에 이르는 후속 작품들에서 거듭 산시성을 소환해낸다.

신작 <강호아녀>는 산시성을 떠났다가, 밤하늘의 부름으로 복귀하여 살게 되는 챠오챠오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졌다. 챠오챠오는 자본이 날아가는 곳이 아닌 그 반대편에 착지하여 변하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지켜나가는 한편, 그 자신의 상황과 생애 주기에 따라서는 끊임없이 얼굴을 바꿔나간다. 감독은 그녀가 보여주는 수많은 얼굴들이 ‘가장 높은 온도의 고통스러움 속에서 제련된 가장 순수한 것’일 수 있음을 영화의 영문 타이틀(Ash Is Purest White)을 통해 말하고 있다. 챠오챠오에게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변용의 본능과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가치를 향한 보존의 본능이 동시적으로 작용한다. 그 양(兩)작용의 결과로 주어지는 삶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뜨겁고도 순수한 것일 터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챠오챠오를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어쩔 수 없이 애수가 묻어난다. 강호란 무협지 속에나 존재할 뿐, 자본과 국가의 폭력이 횡횡한 현실의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가상의 빈 터나 다름없기 때문이리라.



빈이 증발한 것처럼 떠나버리자 챠오챠오는 몹시 당황한다. 빈이 출소한 자신을 외면할 때는 무작정 쫓아다니면 되었고, 불구의 몸으로 환향했을 때는 휠체어를 밀어주고 으르고 얼러 기운을 내게 하면 그만이었다. 이제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이대로 두어야 하나, 무언가를 시도해야 하나? 안절부절 못하는 챠오챠오를, CCTV는 메마르고 빈틈 없는 노이즈 투성이 눈으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





1) 김정구, “새로운 공동체 모색: 글로벌 작가주의(지아장커의 경우)”, 일민미술관-트랜스 아시아 영상문화연구소 공동주최 영화아카데미 《글로벌 시네-미디어: 공동체를 기억하다》 강의, 2017. 11. 15.

2) 김정구, 위와 동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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