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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그나이트 Sep 07. 2016

[소설] 56. 끝이 없는 이야기

Chapter 1. 내가 진짜 향하고 있는 곳은 (1)

“날 믿고 우리의 ‘최현욱 논술 학원’ 시작에 함께 해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모두 같이 커갈 수 있는 학원을 만들기로 합시다. 지금은 내가 데리고 온 20명이지만 일 년 뒤 200명이 되고, 10년 뒤 2000명이 되도록 다 같이 달려봅시다. 여러분을 믿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건배!”


다 같이 잔을 들었다. 다 같이라고 해봤자. 총 3명뿐이지만. 여자 전임강사 1명, 여자 파트 강사 1명, 데스크 상담 실장 1명이었다. 이들이 내 학원의 스타트 멤버였다.


3일 뒤, 월요일에 학원이 문을 연다. 드디어 내 꿈이 정식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다시 한번 맥주를 쭉 들이켰다.


“선생님, 아니 원장님. 천천히 드세요. 술 못 드시잖아요.”


데스크의 이 선생이었다. 27살의 학원 상담 경력 2년 차, 전문대 졸, 그 전엔 승무원 준비만 했다던 예쁘장한 선생님이었다. 솔직히 순전히 얼굴과 목소리, 그리고 저렴한 급여만 보고 뽑은 여자였다. 외모와 친화력이 학부모 상담에 먹히기를 바랄 뿐이다. 한두 달 지켜보다가, 일을 너무 못하면 자르던지, 아니면 돈을 더 주고라도 노련한 상담 실장님을 모셔와야 할 것이다. 그런데 전에 학원에서도 경험했지만, 노련한 상담 실장이 원장인 내 머리 위에 올라오려고 할까 봐 일부러 적당한 어린 여자를 선택한 것이기에 이 여자가 제발 상담일을 잘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오늘 같은 날,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리고 제가 술이 약한 건 아니에요. 맛없어서 안 먹을 뿐인 걸요. 그런데 오늘은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잘 들어가네요. 하하.”


“그래요? 그럼 달려야지요. 저랑 건배해요. 호호호.”


이 선생이 애교를 부리는 듯 어깨를 흔들면, 잔을 들어 내 잔에 짠하고 부딪혔다. 나는 또 한 모금 마셨다. 다들 박수치며 웃었다. 나도 웃었다.


“나는 이렇게 낮술 먹은 지가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해요. 대학생 때 이후로 거의 처음인 것 같아요.”


38살, 전임 강사인 박선생이 안경을 올리며 말했다. 잘 알고 지낸 지 꽤 오래된 동료였다. 학원 스타트의 30% 정도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동업자다. 이 사람은 본인 역시 투자를 하고 일하는 것이기에 아주 든든한 조력자다.


“어머, 너무 범생이 같으시다. 그런 대사는 학부모들하고 하시고, 오늘은 그냥 쭉 드세요. 개원하면 휴가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그전에 맘껏 놀아야지요.”


이선생님 박선생한테 잔을 부딪혔다. 박선생이 어색하게 웃으며 어쩔 수 없이 마시는 시늉을 하는 게 보였다. 순간 둘이 성격이 잘 안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회사니까 일하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

“오늘 대박 좋네요. 결혼하고 낮에 술 마신 적이 없거든요. 호호호 정말 신나네요.”


수리논술 파트 샘인 신선생이다. 결혼 10년 차, 초1 아이 1명. 공백이 길지만 그만큼 내가 시키는 데로 잘 따라올 거라 생각이 든다. 본인도 일하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고 급여도 싸고. 경험인데 아이가 다 자란 기혼녀들의 일하는 파워는 대단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기대가 큰 선생님이다. 게다가 주말부부에, 친정에 아이를 맡기고 일한다는 뉘앙스가 혹 이혼한 여성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데, 만약 그렇다면 생계를 걸고 일할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가 되고 있다.


순간, 나는 술을 홀짝이며 직원들을 하나씩 둘러보며 평가하는 나 자신에게 좀 실망했다. 나는 직원들을 동료로 동등하게 대하고 싶었다. 그런데 직원들을 보며, 택배 상자 속에서 막 꺼낸 상품을 보는 것처럼 이력서를 상기하고, 내 기대치를 속으로 읊고 있으니까 말이다. 직원들은 사람이지 상품이 아닌데,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이 월급 값을 할 것인지만 생각하고 있으니까.

대출이 있고, 여유 자본이 없는 사장의 한계라고 자기 위안을 하지만, 직원들에게 갑질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나는 속으로 저 사람들은 동료들이지 나의 종이 아님을 의식적으로 자꾸 상기하기로 했다.


“내가 여러분께 당부하고 싶은 게 있어요. 나는 똑같은 직원입니다. 단지 직위가 원장이고, 하는 일이 총괄 책임일 뿐이에요.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지요. 청소나 강의나 상담이나 어떤 일이던지 다 동등합니다. 그러니까 날 어려워하거나 조심하지 말고, 언제든지 편하게 문제점 개선점 말해주고 함께 커가면 좋겠어요.

우리 모두 인센티브 받잖아요. 여러분들 다 계약할 때 인센티브로 계약한 거 기억하시죠? 나는 단지 돈을 투자했으니까 좀 더 많이 수익금을 가져가는 것일 뿐, 학생 하나하나에 대해서 인센티브 받는 건 모두가 동일한 거라는 걸 기억해주세요. 하나하나에 최선을 다하면 여러분 모두 인센티브가 기본급보다 많아지는 그 날이 올 거 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다들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아가는 직원이라는 거예요. 나도 호칭만 원장이지 같은 직원이구요.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지요?

건배!”


이상하게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마무리까지 어색해졌다. 그래도 다들 웃으며 건배를 해줘서 좀 덜 어색한 것 같다.


역시 말이 길어지면 주제가 흐려지고, 말하는 사람이 추레해진다. 게다가 나는 지금 살짝 긴장된 상태다. 학원의 성공에 대한 기대감, 대출에 대한 불안감. 그리고 처음으로 진짜 나의 직원을 가지게 된 책임감과 짜릿함이었다.

학원의 특성상 사수 라던지, 부하 직원 등의 개념이 없었다. 그래서 부하 직원들을 두고, 관리하고 대화하는 것 자체가 상상이 가지도 않았고, 동시에 동기 개념도 없기에 동료 선생들하고 친해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박선생은 꽤 오래 알던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사실 만날 때마다 새롭게 불편했다.


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입을 다무는 동안, 여자들끼리 수다를 떨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잘 노니까 말할 필요가 없어서 좀 편해졌다. 조용히 입을 다물고 여자들의 수다를 관찰했다. 아까 여자들끼리 못 어울릴까 살짝 걱정했던 것은 쓸데없는 생각이었던 것 같다. 역시 여자들은 순수하달까? 친밀하고 보기 좋았다.


나는 순살치킨을 젓가락으로 집어 우물우물 먹었다. 오늘의 첫 끼니였다. 이거라도 밥이라고 맛있었다. 여자들이 수다 떨며 천천히 먹는 동안, 나는 빠르게 허기를 채우고, 마셨다. 시계를 보니 벌써 2시간이 지나있었다.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이 선생한테 줬다.


“이 선생님 이거 받아요. 이걸로 오늘 실컷 놀아요. 막 5차까지 가도 돼요.”


“어.. 네.. 근데 왜 벌써 주세요?”


모두 내 얼굴을 봤다.


“전 일어나려고요. 점심 먹고 2차까지 왔으니, 이제 여성분들 즐거운 시간 보내고 화합하시게 빠져드려야지요. 하하. 게다가 술이 올라오는 것 같아서 실수할까 봐 가야겠어요. 모두들 느긋하게, 즐겁게 놀다 가세요. 그리고 그 힘으로 월요일 개강에서 파이팅합시다!

술 너무 많이 마셔서, 개강에 지장 주면 안 돼요. 다들 적당히 놀구요.

참 이선생님은 학원 전화기 착신을 핸드폰으로 돌려놓은 거 알지요? 술 마셨다 싶으면, 차라리 아예 전화 무음으로 해두고 받지 마세요.

그리고 상담 규칙 잊어버리지 말고 혹시 주말에 학부모 상담하게 되면 숙지한 대로 잘 받으세요. 그 학생이 등록하면 상담하신 이선생님이 1인당 인센티브 받는 거 잊지 마세요. 다 돈이에요. 만약 주말에 전화 못 받으면 나한테 말하고 착신을 내 번호로 바꿔놓고요. “


나는 일어나서도 좀 오래 주절주절 말을 했다. 내가 생각해도 쫌 멋이 없었다.


“그럼 진짜 갈게요. 즐거운 시간 보내요.”


내가 일어나는 데, 다들 앉은 채로 ‘안녕히 가세요.’ 인사했다.


나는 뒤 돌아 나오면서, 역시 여자 강사들은 상사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붙잡지도 않고, 앉은 채로 인사하다니. 적어도 서비스 교육을 받았다는 이선생은 벌떡 일어났어야 했다. 승무원 교육을 뭘 받았는지 급 실망스러웠다. 이런 부분을 어떻게 교육해야 할까 고민스러웠다.


그리고 또다시, 원장이라고 갑질 하는 것인가 싶어 부끄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는 버스를 탔다.


금요일, 5시의 버스는 한산했다. 나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4월의 햇빛이 좋았다. 길가에 벚꽃이 어느새 하얗게 활짝 폈다. 긴장이 확 풀리는 것 같았다. 이제 정식 개원만 남았다. 모든 것은 잘 풀릴 것이다.


바람이 휙 불더니 열려있던 창문 사이로 벚꽃잎 하나가 들어왔다. 나는 손으로 여리고 작은 분홍 잎을 조심히 잡았다. 냄새를 맡았지만 향이 나지는 않았다. 그래도 왠지 달콤한 향이 나는 것 같아 몇 번이고 코를 댔다.


전 재산을 학원 오픈에 쏟아붓고, 이사 온 강북의 13평짜리 오래된 연립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도 여전히 내 손엔 벚꽃 이파리가 들려있었다. 나는 투명한 물컵에 이파리를 넣고 창가에 두었다. 창문을 열었다. 방범창살이 나를 가로막았다. 창살 틈이 넓어 바람이 들어오는 데에는 문제가 없는 것을 알지만 왠지 아무 바람도 안 들어오는 것 같아 기분이 나빠졌다. 다시 창문을 닫았다.


책상에 앉아 수업을 준비하려다 술이 올라오는 것 같아. 잠시 누웠다.


자꾸 꽃냄새가 방안에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숨을 쉬기 힘들었다.


그때 문자가 왔다.


[** 호프 78000원이 승인되었습니다]


[원장님, 감사합니다. 저희 오늘 말씀대로 정말 실컷 놀게요. 판 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놀고 오픈 때 열정을 불태울게요]


카드사 문자와 이선생의 문자가 나란히 도착했다.

갑자기 다리가 근질거렸다. 손가락을 하나씩 꼽아봤다. 첫 달 교재도 다 만들어놨다. 하루 전날 수업시간 늦지 않게 오라는 문자도 예약 전송 신청해두었다. 학원 청소도 다 되어있었다. 정말 진짜로 하루 이틀 쉬어도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벌떡 일어나 잠바를 입었다.


골목을 달려, 큰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아탔다. 버스나 전철을 타다가는 딴 데로 샐 것 같아서였다. 기사님께 고속버스 터미널에 가달라고 말했다. 어딜 갈지는 모르고 그냥 터미널에 도착해서 가장 빠른 버스를 타기로 했다.


달리기를 해서, 헐떡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언제 여행을 갔었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 외에는 여행다운 여행은 한 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러다 민영이와의 여행이 생각났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여행의 단편이 몇 개 스쳐 지나갔다. 내게도 어리고,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 나는 더 나이를 먹었고, 나름 살아가는 방법을 조금 터득했다. 그리고 이렇게 여유롭게 혼자만의 여행도 갈 수 있게 되었다. 뿌듯했다. 나는 미소를 지었다.


버스 터미널 매표소에서 가장 금방 출발하는 버스가 어느 행인지 물었다. 매표원은 ‘마산입니다.’라고 말했다. 마산은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다음에 출발하는 건요?”


“무진입니다.”


“무진은 시골인가요?”


“전 모르겠는데요.”


“...... 네, 그거 한 장 주세요. 몇 시 도착이죠?”


[무진. 7시 30분 출발, 11시 도착.]


나는 대기실 의자에 앉아 버스표를 들여다보았다. 처음 듣는 지명이었다. 핸드폰으로 무진을 검색했다.


강이 있고, 산이 있는 시골이었다. 관광지로는 작은 절과, 계곡, 5일장이 있었다. 숙소는 여관이 한 개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시골 깡촌인 듯했다. 마음에 들었다. 다들 연인과 가족들이 소풍 가는 계절인데, 관광지를 혼자 돌아다니는 것보다는 호젓한 곳에서 편하고 조용하게 맑은 공기 마시고 좀 걷고 쉬다 오는 게 훨씬 좋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7시 18분이었다. 나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음료수와 껌을 샀다. 화장실에 가서 소변을 보고 버스에 올라탔다. 7시 28분이었다. 승객이 거의 없었다.


7시 31분에 버스는 출발했다.


해가 거의 지고 어두워졌다. 창밖이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민영이와 달렸던 그 여행길이 생각났다. 깜깜한 고속도로를 달릴 때, 세상에 단 둘이만 있는 것 같은 시공간 같다면서 민영이는 내 손을 꼭 잡았었다. ‘오빠랑 있으니까 무섭지 않아’라고 속삭여주었더랬다.


나는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고, 핸드폰의 메모장을 켰다. 뭔가 이 순간 일기나 사진 같은  것을 기록하면 좋을 것 같았다. 그런데 또 막상 이 순간을 기록하려니 아무것도 써지지가 않았다.


논제가 없으니, 당황스러워졌다. 역시 나는 직업적 글쓰기꾼이지, 작가는 아니었던 것이다. 괜히 혼자 머쓱했다. 나는 그냥 버스 티켓을 사진 찍어 멘트 없이 페이스 북에 올렸다. 그리고 어두운 창밖을 보다가 음악 소리에 귀가 아파서 이어폰을 뺐다. 음악도 듣던 사람이 들어야지 안 듣다가 들으려니 시끄럽기만 한 것이다. 그러다 나는 잠이 들었다.


“도착했습니다. 내리세요.”


버스기사님의 말에 눈을 떠보니 이미 다른 사람들은 내리려고 가방을 들고 문가에 줄을 서 있었다. 나는 먹지 않은 음료수병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내리자마자 어둠 속으로 재빨리 사라졌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 대합실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영화 세트장처럼 70년대에 머문 것 같은 낡은 대합실이었다. 그리고 어두웠다. 어디에 가야 할지 몰라 나는 잠시 터미널 의자에 앉았다.


그때 버스기사가 화장실에서 나오며, 나를 발견했다.


“나가셔야 돼요. 여기 문 닫을 거예요.”


“아.. 네...”


나는 터미널 밖으로 나왔다. 10시 50분이었다. 사방은 어두웠다. 가로등 몇 개만 있을 뿐이었다. 미국 서부 영화처럼 사방이 뻥 뚫려 있고, 작은 건물들은 다 불이 꺼져 있었다. 한 명도 사람이 없었다.


나는 좀 긴장됐다. 사방을 둘러보았다. 서울에는 눈부시게 많던 모텔 간판이 여기서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버스기사가 터미널에서 나오면서 나를 힐끔 쳐다봤다.


“여긴 왜 왔어요?”


“그냥 여행 왔어요.”


“아이구 여기 볼 것도 없는데 잘못 왔구먼. 숙소를 찾아요?”


“네.”


“저쪽 길 건너 왼쪽으로 가면 여관 하나 있어요. 기사들도 자는 데에요. 총각이 하룻밤 자기엔 그럭저럭 괜찮을 거유. 따라오세요.”


나는 다섯 걸음 정도 거리를 두고, 기사 아저씨를 졸레졸레 따라갔다.


아저씨는 여관에 들어가 카운터 문 두드렸다. 그렇지만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아저씨는 결국 방문을 열고 직접 키를 하나 줬다. 방안에는 사람이 하나 자고 있었다.


“이걸 줘도 되는지 모르겠네. 일단 들어가서 더럽고, 정 아니다 싶음. 그냥 저 사람 깨워버려. 그게 저 사람 일이니까.”


“네, 고맙습니다. 안녕히 주무세요.”


나는 키를 받았다.


열쇠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청소를 한 건지 안 한 건지 헷갈리는 낡은 냄새가 나는 작은 온돌방이었다.


쓰레기통이 비워있는 것을 보니 청소를 하긴 했던 모양이다. 나는 일단 이불을 펴고, 잠바와 바지만 벗고, 충전기를 꺼내 휴대폰을 꽂고는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너무 조용해서 텔레비전을 틀거나 샤워를 하면 여관이 흔들릴 것만 같았다. 바닥은 따뜻했다. 핸드폰을 켜고 웹툰을 보려고 했지만 한 편도 보기 전에 잠이 들었다.


눈이 부셔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머리맡에 손을 휘저어 핸드폰을 찾았다. 아침 6시 30분이었다. 커튼이 안 달린 창을 힐끗 봤다. 언제 해가 이렇게 일찍 뜨기 시작한 거지. 나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아침부터 딱히 볼 것도 할 것도 없었다.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쓰고 나는 다시 잠을 자려고 애썼다. 얼마만의 여유인데 일찍 일어나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햇살이 계속 정수리를 콕콕 쪼아댔다. 나는 일어나 앉았다.


욕실에서 양치와 세수를 하고 잠바 지퍼를 목까지 채우고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가방도 없었다. 나는 홀가분한 어깨를 쫙 펴고 방문을 열었다.


1층 복도에 주인인 듯 한 분이 계셨다.


“저기, 주인아저씨세요?”


“네, 아.. 댁이 504호 들어갔어요?”


“네. 어제 주무셔서 버스기사님이 그냥 들어가 자라고 하셔서요. 일단 졸려서 잤어요. 계산 지금 할까요?”


“네, 하룻밤에 6만 원이고요. 12시까지 방 빼야 합니다.”


방값으로 3~4 만원 정도 생각했다 6만 원이란 소리에 속으로 좀 놀랐다. 나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드렸다. 잠시 키를 들고 돌려드려야 하나 마나 망설였다. 하지만 굳이 돈이 아깝다고 체크아웃까지 키를 가지고 있다가는 멀리 나가지 못해서 여행까지 제대로 못할 게 뻔했다. 나는 카드를 돌려받고, 키는 카운터에 두고 나왔다.

여관 앞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4차선 도로였지만 사방이 낮은 건물뿐이고 그것도 띄엄띄엄 있어서 그런가 주변이 엄청 넓어 보였다. 차들도 없었고, 사람들도 별로 없었다. 나는 버스 터미널 근처 식당은 문을 열었겠지 싶어 터미널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가는 길에 문닫힌 관광 소개서 외벽에 꽂힌 무진 관광 팸플랫을 하나 주웠다.


터미널 앞에 백반집에 [아침 식사됩니다] 종이가 붙어 있었다. 들어서니 버스기사. 택시기사 인듯한 아저씨 몇 명이 식사를 하고 계셨다. 백반을 주문하고 팸플렛을 봤다.


강 관광을 갔다가. 산에 가서 절을 보고, 돌아와서 여기로 와서 근처 5일장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가면 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오늘 장날인데 생각보다 조용한 것이 신기했다. 정말 사람 몇 없는 시골인 것 같았다.

아무튼 별것 아니지만 계획대로 다 구경하려면 버스 시간을 잘 맞춰야 할 것이다.


밥이 나왔다.


나는 핸드폰으로 [무진]을 검색했다. 블로그 등이 몇 개 없었다. 나는 괜히 본 블로그 또 보고 , 또 보면서 밥을 먹었다. 맛이 진짜 없었다.


점심이나 저녁은 맛난 걸 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밥을 먹으며 [무진 맛집]을 검색했다. 지금 먹고 있는 백반집이 제일 먼저 나왔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여기가 맛집이라니...... 입맛이 뚝 떨어졌다. 무진에서 맛있는 음식은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식당을 나와 근처 편의점에 들려 빵과 음료수를 구입했다. 점원에게 강으로 가는 법을 물어보니, 바로 앞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된다고 했다. 나는 검은 비닐 봉다리를 덜렁덜렁 들고 편의점 앞 버스정류장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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