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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Apr 20. 2022

둘 다 하면 어때서 - 탕짜면

선택을 꼭 하나만 해야 해?

아마도 내가 죽는 그날까지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오래된 고민거리가 있다. 다른 일에 몰두하며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어느 순간 그 고민에 휩싸여 시간을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나 자신을 발견한다. 오늘 점심 나절도 마찬가지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찾아온 그 고민거리에 30여 분을 여지없이 흘려보내고, 결국은 답 비슷한 것도 찾지 못한 채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을 나서야만 했다.


"아, 오늘 점심 뭐 먹지?"



선택지는 많은데 기회는 매 번 한 번뿐


어김없이 울리는 배꼽시계. 오전 11시경이면 뱃속 깊숙한 곳, 아마도 위장과 십이지장 사이의 어딘가가 꾸르르르 하고 조용하게 진동한다. 혓바닥 아래에 단내 도는 침이 고이고, 나도 모르게 목울대를 꿈틀거리며 이 조용한 허기를 채울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같은 건물에 있는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을까? 아삭한 김치도 좋지만 오늘은 아무래도 오독오독한 단무지가 끌려. 하지만 라면은 그저께도 먹었는 걸? 건너편에 있는 칼국수집은 어떨까? 왕만두도 한 접시 시켜서 동료와 나눠먹을까? 아아, 그렇지만 칼국수 양이 많잖아. 만두까지 먹으면 과식이잖아(안 먹는 선택지는 없냐 인마?). 조금 걸어 나가야 하지만 돈가스는 어떨까? 새콤달콤한 소스에 푹 찍어 먹는 등심 돈가스는 정말 만족스럽겠지. 그렇지만 거기에 입가심으로 커피까지 사 마시기엔 지갑 사정이 간당간당하네. 언제나 그랬듯이 국밥이나 후루룩 할까? 아 근데 거긴 사람 너무 많아. 도착할 쯤엔 사람이 잔뜩 있을 텐데? 오늘 백반집 메뉴가 뭐더라? 고등어나 제육볶음이면 좋겠는데. 설마 비빔밥이려나? 그건 싫은데. 거기까지 가버리면 다른 곳을 갈 틈도 없을 거야. 닭갈비를 다 같이 나눠먹고 자글자글 남은 소스에 볶음밥을 해 먹으면 참 좋겠는데. 타이밍이 안 좋으면 식사를 마치기 전에 점심시간이 끝나버릴지도 몰라. 초밥 먹을까? 점심에 만 이천 원을 태워? 오래간만에 플렉스 해? 근데 점심특선 판초밥에 우동이 나오던가 안 나오던가?


아아, 진짜 어떡하면 좋지?


그야말로 먹거리가 넘쳐나는 시대.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에겐 더할 나위 없는 천국이다. 아마도 그럴 터였다. 그러나 사회인의 점심시간이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선택 장애의 지옥이 펼쳐진다. 어떻게 하면 이 촌음과도 같은 점심시간에 가장 만족도 높은 식사를 할 수 있을 것인가? 맛도 있어야 하고 양은 최소한 모자라지는 않아야 하며, 과하게 비싼 것은 부담스럽고 가능하다면 후식을 따로 사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당한 가격인 것이 최고다(욕심 참 많네). 오죽하면 그날그날의 점심메뉴를 잘 고르는 사람에겐 같이 밥 먹자는 사람이 줄을 설 지경인 것이다!


선택지는 너무나 많고, 그중 하나를 고르는 것은 온전한 나의 자유다. 그리고 올바르고 정상적인 자유가 늘 그러하듯, 선택으로 인한 책임 또한 온전한 나의 것이다. 자유로운 선택에 따르는 온전한 책임. 이 당연하고 정의로운 문구가 가장 냉혹하게 적용되는 곳이 바로 점심식사란 말인가? 


내게 만일 무한한 위장이 있다면, 모두 다 먹을 수 있겠지. 하지만 시간이 없다.

내게 만일 무한한 돈이 있다면, 모두 다 사 먹고 남는 건 포장해도 된다. 하지만 그럴 시간이 없다.

내게 만일 무한한 시간이 있다면, 위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직장 또한 사라질 것이다! 점심시간에 나가서 회사로 돌아오질 않으니까!!!



선택 장애를 해결하는 위대한 해결책을 찾아서


이 선택 장애를 해결하기 위해 요식업계의 위대한 선각자들이 다양한 해결책을 개발해 왔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마도 뷔페일 것이다. 한정된 시간 동안 수십 가지 음식을 원하는 만큼 덜어다 먹는, 그야말로 지상에 강림한 식사의 천국! 그러나 과하게 비싼 식대와, 그 비싼 비용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음식만 '제대로' 파는 식당에 비해서는 하나같이 맛이 모자라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주류가 되지 못했다.


정식, 소위 세트메뉴는 어떠한가. 여러 가지 음식을 동시에 먹을 수는 있지만 결국은 주 메뉴와 곁들임 메뉴의 구성이라 충분한 만족도를 주진 못하였다.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간 것이 플래터인데, 주 메뉴를 여럿 한꺼번에, 골고루 맛볼 수 있다. 한없이 정답에 근접한 것 같은데, 한두 사람이 먹기엔 양이 많고 비싼 데다가 아무래도 자주 먹기엔 부담스럽다.


코스요리는 양과 질을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방법이며, 코스의 구성에 따라서는 가격을 조정할 여지도 충분히 있어서 상당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가능케 했다. 만약 점심시간이 세 시간 정도 되었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텐데, 너무 아쉬운 나머지 눈물이 눈앞을 가릴 지경이다.


정녕 방법은 없단 말인가?



한 그릇인 척, 하지만 그렇지 않은 - 탕짜면


고민이 이어지던 긴 나날 중 언젠가, 중식업계의 한 개척정신 투철한 누군가가 새로운 발상을 해 냈다. 그 결과물이 썩 훌륭한 것을 보니, 그는 아마도 고객들의 고민에 심히 공감하는 훌륭한 요리사였으리라고 짐작된다(망상입니다). 


어쩌다 들른 중국집. 각자가 짜장면을 먹든, 짬뽕을 먹든, 볶음밥을 먹든, 잡채 덮밥을 먹든. 모두가 갹출해서 탕수육 한 접시 하고픈 마음. 집에서 가족들과 배달해 먹는 그 눅눅한 것 말고, 바로 튀겨낸 하얗고 노릇노릇하며 바삭한 탕수육을 김이 펄펄 오르는 끈적하고 새콤달콤한 소스에 적셔 한 입 와삭 깨물 수 있다면 오후를 버텨낼 힘이 솟아오를 것만 같다. 


하지만 막상 탕수육이 나오면 찍먹파와 부먹파의 신경전이 벌어지고, 모두가 같이 돈을 추렴했음에도 고기 한 점 더 먹겠다고 자신의 식사는 식어가게 내버려 둔 채 부먹이든 찍먹이든 탕수육부터 처먹하는 이가 하나쯤은 있지 않던가. 이는 마치 다 같이 햄버거를 먹으러 간 패스트푸드점에서 한 쟁반 위에 쏟아 둔 모두의 감자튀김에 추한 탐욕을 보이는 소금에 절은 손끝과도 같아서, 매 요리마다 애써 무거운 웍을 흔들어 불맛을 머금게 한 보람이 사라지는 광경이었을 터다. 자기 요리도 먹고 탕수육도 사이좋게 나눠먹으면 될 것을. 사람은 어찌 탐욕을 잠시 눌러두지 못하는가!



그래서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혼자서 둘 다 먹으면 안 되는 것인가? 결국 요리사는 한 그릇 안에 벽을 치는 방법을 떠올렸다. 중국식 샤부샤부(훠궈: 火鍋)에서 두 개의 육수를 동시에 담는 원앙과(鴛鴦鍋)의 형태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설도 있으나 제대로 확인된 사실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한 그릇인 척 두 그릇이고, 두 그릇이지만 한 그릇의 형태를 하고 있어 당당하게 남의 젓가락을 물릴 수 있는 식사도구를 만들어낸 것이다.


여럿이 모인 자리, 내 앞에는 나의 식사, 가운데에는 모두의 요리가 있을 때에는 누군가가 각자의 앞접시에 요리를 배분해 주거나, 각자의 젓가락을 들고 음식 각축전에 뛰어들어 각자도생 해야만 했다. 


나 홀로 식사할 때는 어떤가. 짜장면에는 탕수육. 어지간한 먹보가 아니라면 이 찬란한 공식을 이행하기가 너무 버겁다. 먹보라 해도 보통의 직장인이라면, 점심 한 끼에 이 둘을 다 먹긴 힘들다. 시간도 많이 쓰고, 돈도 많이 들지 않는가.

하지만 내 앞에 놓인 한(두) 그릇 안의 음식물에는 감히 주인의 허락 없이 젓가락을 뻗는 이가 없다. 남의 밥그릇에 함부로 손대는 것은 2022년 초 우크라이나를 침범한 러시아의 행위 다음으로 폭력적인 행위이므로. 그리 하여도 되는 것은 오직 사랑하는 나의 임뿐이다(하지만 난 없지). 그릇의 크기 또한 절묘해서, 두 가지 음식을 담아냈을 땐 "이게 다 내 거♥"라며 기뻐할 수 있고, 다 먹은 뒤에도 아쉬움 한 조각 남지 않는 포만감만 가득하다. 심지어 짬짜면, 탕짜면, 탕짬면, 탕볶밥 등등 잘 나가는 메뉴들끼리 조합하기도 좋다.


식당 측에선 음식 한 그릇 내는 데 품이 더 드니 어떻게 생각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일같이 '점심 뭐 먹지'를 고민해야 하는 나의 입장에선 이만큼 고마운 메뉴가 또 없는 것이다.



결국 문제는 양자택일, N자택일이다. 우리는 이미 무의식 중에 '선택'은 결국 다른 무언가를 '포기'하는 행위임을 알고 있다. 경제학에서는 기회비용이라고 부르고, 메뉴판을 보면서 '다음에 먹지 뭐'라고 말하며 미루는 것이며, 그래서 결국은 선택 장애니 뭐니 하며 의사결정에 시간을 소비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일반적으로 자원(돈, 시간, 위장의 크기 등)은 유한하고, '다음' 운운하더라도 '오늘'의 기회는 지금 한 번뿐이며, 선택 후에는 돌이킬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우리는 점심 한 끼를 먹는 것에도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아 가며 회사 근처의 맛집을 찾느라 분주해지고 만다. 신뢰할 수 있는 정보를 찾아서 실패의 가능성을 줄이고 최적의 효용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것. 그것이 어디 비단 점심식사뿐이겠는가마는.


하지만 맛있는 것을 입 안에 넣기 직전의 순간까지 고민에 젖어 있는 것도 너무 괴롭다. 둘 중 하나, 혹은 여럿 중 하나를 고르는 시간이 즐겁지 못하다면, 내게 '오직 하나가 최고고 나머지는 별로'라는 심리적 확신이 있는 탓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그런가? 분명히 '탕수육'이 '짜장면'보다 맛있다고 생각하는 내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짜장면은 맛이 없는 음식이 되는 것이었나. 그런 식이라면 각자가 음식을 시킨 뒤에는 '한입만'을 시전 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여자 친구의(없지만) '한입만' 끝에 메뉴를 완전히 교환하고는 짬뽕을 우걱우걱 먹으며 '그러게 짜장면 두 그릇 하자니까'라며 속으로 투덜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선택을 할 때 하나만 고르는 것이 너무 어렵고 불만족스럽다면, 둘이나 셋을 고르는 선택지도 생각해 보는 것이다. 그 또한 정답은 아닐 수 있지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는 선택이라면 놀라울 정도로 만족도가 상승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낭비하는 것 아니냐고? 우린 그걸 FLEX라고 부르기로 했어요.


그래서 난 내일 점심은 탕짜면을 먹을 예정이다. 

어쩌면 탕볶밥일 수도 있고. 아, 이 또한 선택 장애를 일으키는구나.


그래도 이런 정도는 꽤 즐겁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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