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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먹사남 Mar 18. 2021

제목은 파니니로 하겠습니다. 근데 이제 기분을 곁들인

양이나 맛은 따지지 마라

가끔 '칼질'하고 싶을 때가 있는가? 


나는 있다. 함께 식사하는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능숙한 칼질로, 음식을 한 입에 얌전히 들어갈 수 있을 만큼 잘라 입에 넣는 모습은 몹시 우아하고 예쁘다고 생각한다. 포만감에 겨워 배를 두드릴 수는 없지만, 매일 수시로 찾아오는 뱃속 공허함 - 허기 -를 채우면서 우아하게 칼질하는 즐거움을 하나 꼽아 본다면 파니니를 권할 수 있겠다.


둘이서 먹는 파니니


파니니는 대부분 나의 연인이나 이성 친구들과 먹었다. 심플하지만 자기주장이 확실한 맛, 향, 식감이 있고 담음새가 정갈해서 살짝 허기가 지는 시간에 제안하면 거절당하는 법이 거의 없었다. 한참 파니니가 유행이던 때에는 센스가 있다고 칭찬도 제법 받았었지. 심지어 실패하기도 어려운 음식이어서, 적당한 카페에 들어가 주문해도 최소한의 맛은 보장되지 않았던가.


나이프로 탁탁 두드리면 딱딱 소리가 날 만큼 바삭하게 구워진 빵 사이에 녹진한 치즈와 고소한 버터의 향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오면 나도 모르게 침이 꼴깍 넘어갔다. 한편에 소담하게 담긴 샐러드는 거창한 드레싱 대신 산뜻한 오일 베이스의 드레싱을 톡톡 뿌려놓아서, 자칫 텁텁해질 수 있는 입 안을 말끔하게 정돈해준다. 곁들임 채소나 과일이 함께 얹어져 나오기도 하는데 식사 중에 먹든 식사 후에 디저트 삼아 먹든 상관이 없다. 


중간중간 향긋한 커피 한 모금 머금어가며 늦은 식사의 여유를 만끽하고 있으면, 앞에 앉은 그녀도 자연스레 차를 홀짝이며 시선을 마주쳐온다.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은, 적당한 템포의 대화할 타이밍이 생겨난다. 치즈가 유독 고소하다던지, 드레싱이 너무 시큼하다던지, 빵을 조금 부드러운 것을 썼으면 좋겠다거나 샐러드의 쓴 맛이 입 안을 개운하게 해 준다는 등 음식 이야기로 시작한다. 호감이 있는 상대라면 식기를 다루는 모습을 칭찬해도 좋고, 커다란 창가에 쏟아지는 햇살을 만끽하면서 그냥 기분 째지지 않느냐고 답정너식 대담을 이어가도 괜찮다. 정해진 주제가 없는 한가한 이야기, 그야말로 '한담(閑談)'이지만 말 그대로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들어온 참이니 그것으로 충분히 즐겁다. 대화 소재가 떨어진다면 편히 뒤로 기대어 앉아 시간을 흘려보내도 교감이 소록소록 쌓이는 듯하다. 빵 한쪽으로 허기를 지우면서 아직 약간 거리가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약간의 정감으로 돌다리를 놓기에 적당한 메뉴이지 않나.


그렇다. 파니니를 동성(남자)과 함께 먹지 않은 이유는 별다른 것이 아니다. 그들은 파니니 한쪽으로는 양이 차지 않거니와, 먹는 속도가 너무 빨라 나의 다른 허기, 대화하고 싶은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던 것이다.


가끔은 나 홀로 파니니


점심이나 저녁, 다음 일정이 있지만 애매하게 긴 시간이 남으면 나 홀로 파니니를 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지방으로 출장에서, 노트북이나 책 한 권이 가방에 들어 있다면 더욱 좋다. 더욱 강추하는 시간은 해 질 녘. 맛이 좋다고 소문난 집보다는 편안한 조명이 눈에 들어오는 곳이나 커트러리가 예쁜 곳을 선택하는 편. 가장 기본 파니니에 커피는 물을 줄여서 좀 더 진하게 요청하고, 파니니는 썰지 말고 달라고 부탁한다. 나 홀로 우아하게 파니니를 즐기는 방법이다.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우아하게' 무언가를 썰고 싶은 날이. 스테이크면 더 좋겠지만 혼자서 스테이크는 너무 호화로운 것 같고, 빈한한 지갑 사정에도 좀 곤란하니까. 그 대신 써는 재미가 있는 파니니로 나 스스로에게 생색을 좀 내 보는 것이다. 


중지와 엄지로 포크를 뒤집어 쥐고 검지 끝으로 지그시 눌러 음식을 고정한 다음, 다른 한 손에 든 칼로 슥슥 자른다. 음식을 자를 때에는 밀 때 힘을 주고 당길 때에는 힘을 빼야 접시가 덜컥 덜컥 흔들리는 일이 없다. 이때 식기가 손에 착 감길 정도로 그립감이 좋다던지, 칼날이 예쁘고 날카로워 사용하는 재미가 있으면 솔직히 신이 난다.


겉면이 예쁜 갈색이 나도록 바삭하게 구워진 파니니는 날카로운 커트러리 아래서 뽀득뽀득하는 소리를 내며 속에 품은 빛깔을 내보이고, 포크를 쥔 손에 약간만 힘을 주어 들어 올리면 주욱 늘어지는 치즈와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햄 따위가 눈 앞에 놓이게 된다. 예쁜 조명이 있다면 각도를 살짝 조정해서 사진을 한 장 찍어 기억에 남긴다. 그리고 주변 눈치 볼 것 없이 입 안에 쑥 집어넣은 다음, 고소한 향기와 바삭한 식감과 촉촉하게 적셔진 듯한 빵의 풍미 따위를 즐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옆에 놓인 노트북으로 예능 하이라이트 장면을 골라서 보거나, 여행길에 함께한 책에서 마음에 드는 글줄을 찾아 형광펜으로 칠하는 시간. 입이 심심하다거나 버터 향기가 코를 간질인다는 이유 따위로 파니니를 먹어 없애면서 그렇게 다음 일정을 기다린다. 주변을 둘러보면, 어느새 파니니 먹는 사람이 한가득이다.



허기보다는 기분을 채우는 요리


유명한 파니니 맛집들이 있는데, 막상 가 보니 파니니 자체가 압도적으로 맛있는 곳은 아직 못 만났다. 대부분은 파니와 함께 먹는 음료가 독특하고 맛있다거나, 꼭 같이 먹어야 하는 사이드 메뉴가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식. 간혹 속재료가 색다른 곳을 발견하지만, 처음에만 신선한 느낌일 뿐 곧 시들해진다. 두세 가지 속재료로 맛을 내봐야 얼마나 풍성한 맛을 낼 수 있겠나. 그것이 가능했다면 온 국민이 닭가슴살로 다이어트에 성공했겠지.


가만히 생각해 보면, 파니니는 어쩔 수가 없다. 다채로운 맛을 내겠다고 속을 풍성하게 채우면 겉을 납작하고 바삭하게 굽기 어려워지고, 어찌어찌 구워 낸다고 해도 그건 파니니의 비주얼이 아닐 것이다. 구운 샌드위치가 되겠지. 이것은 조리법을 바꾸는 정도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파니니만의 아이덴티티 같은 것이어서, 차별화를 꾀한다고 해도 빵이 좀 더 고소하다거나 소스가 다른 곳보다 독특해지는 것 이상의 발전을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내가 여전히 파니니를 찾는 이유는, 다른 유사한 음식이 채워주지 못하는 기분을 파니니가 채워주기 때문이다. 같은 양을 먹어도 샌드위치는 한 끼를 '대충 때운 것' 같고 파니니는 온전히 '식사를 한 기분'이고. '서00이'에서 줄 서서 산 샌드위치는 털썩 주저앉아 와구와구 베어 먹고 금방 일어나지만, 파니니는 고소한 향기가 나도록 구워져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천천히 먹고 일어나고. 급하게 홀로 먹을 때에는 편의점에서 빵에 우유를 곁들여 먹고 나오기도 하지만, 파니니는 가능한 한 같이 먹을 누군가를 찾게 된다. 


어쩌면 나이프와 포크를 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손으로 들고 입으로 베어 먹는 파니니는 상상하기 어렵다. 양은 적은 주제에 가격은 아주 싸지도 않고, 풍성한 샌드위치에 비해 맛은 단순하기 그지없지만, 파니니는 허기보다는 내게 평소 2%쯤 모자란 기분을 채워주는 것 같다. 바삭한 파니니와 그 속에 얇게 채운 치즈의 풍미를 즐기다가, 느끼하다 싶으면 상큼한 샐러드를 아삭아삭 씹어 주고, 커피 한 모금을 입 안에서 굴린다. 반복한다. 약간의 허기가 남을 즈음 '식사'가 끝나지만, 이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이유라면. 


그건 아마, 급한 일상에서 먹어치우는 다른 것들보다는 더 느긋하게 즐겨야만 하는 음식이라서일 것이다. 뱃속 허기와 마음속 허기를 균형 있게 채우려고 하면, 영양소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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