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의 몽상

by 김비주





무더위에도 더 이상 자빠지지 않는
늙다리 구두처럼 조금은 헐거워지고

조여지지 않는 낡은 가죽끈은
치운 지 오래,

나는 낡았군요

미리 건드리지 못해 쭈글거리는 얼굴을 잡고
뽀얗게 수증기가 오른 탕 속에서
몸을 빡빡 지워요.

오! 영화 속의 빼빼마른 외국 배우가
긴 팔과 다리로 허우적거리다
벗은 옷처럼 무너져 내려요

어디에서 왔을까요? 이 장면은

고요가 낮달처럼 애처로워져
칠레팔레 달려 나오던
조금은 헐빈한 여자들이
초록 들길을 내달릴 때

개망초, 금계국 보이는 곳마다
솟구쳐 오른 유월을 붙잡아요

뻐꾸기 가끔은 우는데
멀리서 개 짖는 소리만
정적을 움켜쥐어요

우리 이대로 달릴까요
오후의 분수들이
어디에서나 넘쳐나는

2024.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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