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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산책자 sancheckza Nov 18. 2022

하루 중 가장 떨리는 순간

SD카드 딸깍이는 소리

많은 경우 10대에 진로라는 걸 고민하고, 20대에 직업이라는 것을 찾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친구들과 나누게 되는 주제가 있다.

"좋아하는 걸 해야 할까 잘할 수 있는 걸 해야 할까."

혹 스스로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을지라도, 이런 고민을 한번쯤은 주변에서 들은 적이 있을 거다. 아직도 뭐가 정답인지는 모른다. 이 글을 통해 진로에 관한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다. 그런데, 이 '좋아하는 일'에 대해서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들려주곤 했던 얘기가 하나 있어 오늘은 그 이야기를 잠시 나눠보려 한다.

ME | 2022. 10. 22. | Taehwan Kim

대학교 때 보도사진을 자주 찍으러 다녔다. 현장을 처음 경험하는 이들은 주로 집회나 시위를 취재하며 현장을 익히게 되는데, 일정에 따라 하루에 여러 곳을 다닐 때도 있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경찰과 시위대 간 갈등이 극심한 현장을 취재할 때도 있고, 시위 자체 인파에 몰려 몸을 가누기 어려운 상황도 종종 생긴다. 또 경우에 따라 여러 대의 카메라, 렌즈를 사용하거나 사다리와 같은 촬영 보조장비를 들고 다니기도 한다. 그리고 취재 경쟁이 과열될 때면 취재진 간 몸싸움을 해야 하는 순간도 더러 생긴다.


그럼 당연하게도 체력소모가 심한데, 때문에 언론사에서 사진기자를 채용할 때 체력을 무척 중요하게 보는 것이다. 아마 사진기자들의 만보계 수치는 적정한 수준의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3배는 거뜬히 넘을 것이다. 취재가 많은 하루를 보내고 나서 집에 오는 길은 정말 노곤하다. 그럴 때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오늘 진짜 고생했다. 집에 가서 씻고 바로 자야지.' 이렇게 되뇌곤 했었다. 당일 마감해야 할 사진이 있지 않는 한, 잠부터 자자는 생존본능.


그렇게 집에 와서 씻고 침대에 누우면 잠시 극락을 경험하지만 이내 귀신같이 사진 생각이 난다. 꼭 사진 생각이 아니더라도 오늘 경험한 현장 모습이 머릿속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것이다. 뒤이어 이어지는 생각은 다음과 같다. '오늘 작업은 못해. 안돼. 피곤해. 근데, 그래도 오늘 찍은 사진들 한번 훑고만 자자. 한 바퀴만 쑥 돌자.'

마법 같은 순간은 이때부터 시작된다. 앞선 문장들은 이 순간을 위한 서사에 다름 아니다.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어느새 정신이 똘똘해진다. 프리뷰로 간단히 10분, 20분만 보자 했지만 1시간, 2시간을 훌쩍 넘기며 새벽까지 사진을 보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와, 이거 이렇게 찍혔네." 가끔 감탄하는 순간도 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 오랜 격언을 실감하며 도파민이든 아드레날린이든 아무튼 내 몸에서 뭔가 다른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분명하게 느낀다. 그렇게 힘이 완충된 새벽이면 (?) 프리뷰 다음 단계까지 넘어가 라이트룸이나 포토샵을 켜고 밤새 사진을 매만지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이 '*몬스터 모먼트'와 함께 새벽에 다시 부활한 것은 (?) 퓰리처상을 받을 만한 사진을 찍어서도, 매그넘 사진가들이 극찬할 만한 사진을 찍어서도 아니었다. 모니터 속 세상은 분명 내가 경험한 현실이었지만 나의 프레임으로 태어난 또 다른 세계였다. 찍을 땐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장면들이 리뷰 단계에서 발견돼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될 때면 짜릿함마저 느껴졌다. 현장에 사진 찍는 사람은 많지만, 같은 사진은 단 한 장도 없다. 사진만큼 빠르고 손쉬운 매체가 그럴 수 있다니. 이 사실은 꽤나 흥미롭다. '이미지의 홍수' 시대에도 여전히 사진가들이 '나만의 시선'을 거두지 않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 필자가 지어낸 표현.

안국역 앞에서 프로모션으로 받은 몬스터 (...)
"좋아하는 일을 하면 힘든 줄을 몰라."  

그렇게 나에게 사진이라는 건, 이 낭만적인 말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님을 일깨워 준 최초의 각성제였다. 그리고 그 각성 효과는 지금까지 부작용 없이 잘 이어져 오고 있다.

Cat | 2022. 05. 07. | Taehwan Kim

요즘은 길거리 사진을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 차곡차곡 쌓이는 사진들은 내 삶의 조각이자 이 세계의 작은 파편이다. 그래서 나는 2022년에도 이 '스틸 사진'만이 갖는 정수가, 그 매력이 너무 좋다. 그래서 걷고 또 걷는다.

오늘도 종로 일대에서 사진을 찍으며 보냈다. 18,000보 정도 걸었나 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힘든 줄은 모르겠다. 재미있는 장면을 많이 만난 하루였다.

집에 오자마자 하는 일은 카메라 클리닝, 배터리 충전, 그리고 SD 카드를 뽑아 허브에 꽂는 것이다. 이 'SD카드 딸깍이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은 이번 포스팅 제목처럼 '하루 중 가장 떨리는 순간'이다. 오늘은 105장의 사진을 찍었다.

오늘 촬영한 사진들 훑어보기 화면의 일부. 내가 사용하는 카메라는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이 같이 저장된다. 흑백사진은 JPG로, 컬러사진은 DNG(RAW)로 저장된다. 그래서 나는 JPG로 먼저 리뷰를 하고, 컬러로 작업하고 싶은 사진, 리터치를 더하고 싶거나 프리셋을 적용하고 싶은 사진은 라이트룸에서 불러와 편집한다.

이 포스팅의 '발행' 버튼을 누른 뒤 마침내 (?) 오늘 찍은 사진들을 보러 간다. 위 사진 속 댕댕이도 당연히 있을 것이다. (오늘 정말 귀여워서 심쿵했습니다..) 혹시 찍은 사진들이 궁금하시다면, 인스타그램에서 만나요. 산책자라는 이름으로 걷고, 찍고 있어요. @sancheck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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